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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보물에 호적을 새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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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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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내력 밝혀낸 펀드매니저 이순우씨… 꼼꼼한 고증, 충실한 조사로 이동경로 추적

사진/ (박승화 기자)
“나는 쥐뿔도 모르는 사람이다. 적어도 문화재에 관한 한 그렇다. 이제껏 문화재에 관해 정규교육을 받은 적도, 더구나 이 일을 본업으로 삼아 살아본 적은 단 한순간도 없는 사람이다.”

이순우(40)씨의 본업은 투자자문회사 소속 펀드매니저. 매일매일 숨가쁘게 투자 종목주를 찾아내고 분석한다. 그런 그가 최근 문화재를 다룬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하나>(하늘재 펴냄)를 냈다. 서문을 읽으며 궁금증이 일었다. “쥐뿔도 모른다”면서 왜 이런 책을 낸 것일까. 뭐든 따지고 모으는 편집광이거나 문화유산답사 붐을 타고 등장한 중뿔난 사람이 아닐까. 그러나 삐딱선을 타고 보기엔 그가 정리한,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의 사연은 꼼꼼한 문헌고증과 충실한 현장조사를 밑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알짜 종목주 찾듯 문화재 탐방


서울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옆 야외전시장에서 만난 이씨는 큰 덩치에 어눌한 말투의 소유자였다. “빈 절터를 기웃거리는 걸 좋아하다. 그곳에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석탑과 부도와 탑비와 석등과 석불과 철불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것들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다”는 게 스스로 밝히는 문화재 이동경로 연구의 계기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많은 문화재들이 고향을 잃었다. 호사가들의 취미에 따라 일본을 들락거리고 국내를 빙빙 돌던 사이 문화재는 “넘어지고 깨어지고 동강나고 매몰되고 때로는 흉측한 몰골로 고쳐지기까지” 했다. 그 통에 자신의 본모습은 물론 이름도 잃어버렸다. 이씨는 지난 2년 동안 주말마다 현장을 쫓아다니고 국회도서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자료를 뒤졌다. 조사결과 문화재가 호적과 주민등록지를 잃어버린 데는 잘못된 기록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기록의 잘잘못을 가늠할 정도의 눈썰미도 생겨났다. “무모하고 경솔한 짓이지만” 자신이 알고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을 기록해둬야겠다는 조바심이 일었다. 이것이 책을 펴낸 이유다. 그는 “일찍이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된 증권가에서 밥벌이를 한 덕분에 이런 조사와 기록이 가능했다”라고 무덤덤하게 덧붙인다.

연구의 배경 설명에는 말을 아끼던 그가 야외전시구역에 흩어져 있는 석탑과 부도의 내력을 설명할 때는 생기가 돌며 말이 빨라진다. 주차장에 가장 가깝게 서 있는 영전사보제존자사리탑은 두개가 쌍둥이처럼 서 있다. 이씨는 이들의 있던 곳이 영전사가 아니라 영천사였다고 설명한다. 이름이 달라진 것은 박물관 기록카드 정리자의 실수였다. 흥례문을 지나 국립문화재연구소 옆으로 옮겨가자 옛 시절 앞서 두 탑과 형제처럼 서 있었다는 또 다른 석탑이 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이 탑에는 천수사삼층석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두 탑에서는 사리가 나왔지만 이 탑에서는 사리가 나오지 않은 탓에 보물로 대접받지도 못하고, 형님들과 생이별까지 하게 된 것이다. 초라한 몰골로 이름도 잃어버린 삼층석탑의 내력을 이씨가 알게 된 계기는 이들 세 탑이 함께 있는 사진을 우연히 발견하면서다.

일본인 수집가와 호사가들에게 시달리긴 했지만 때론 그들의 다툼과 욕심 때문에 물건너갔다 되돌아온 문화재도 있다. 국보 101호인 우아한 외양의 지광국사현묘탑이 대표적이다. 이 사리탑이 반출된 사실은 기록이 있지만 언제 어떤 경로로 되돌아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씨는 그 내력을 추적했다.

지광국사현묘탑은 1911년 원주 법천사지를 떠나 두어 차례 매매된 뒤 명동의 한 병원 자리에 놓였다가 한 호사가의 집 마당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 뒤 오사카의 한 남작집안에 묘지 장식용으로 실려갔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총독부에서 발끈했다. 조선을 자신의 땅이라 여겼던 데라우치 총독은 문화재를 모으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 총독의 사유재산인 조선의 문화재를 허락 없이 가져간 죄를 지은 탓에 결국 지광국사현묘탑의 소유자는 이를 총독부에 반납했다. 야외전시장 앞 안내문에는 1915년에 되돌아왔다고 쓰여 있지만 이씨는 그 이전 시기로 추정한다. 그해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마당 한가운데 지광국사현묘탑이 멀쩡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재 연대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

이씨는 “보통 사람에게 1, 2년 차이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문화재를 보존·관리하고 기록하는 위치에서 연대는 중요하다. 문화재의 이동경로에는 당대의 운수관계나 노역상황, 보존능력 등 다채로운 정보가 담겨 있다”라고 말했다. 거꾸로 총독부의 안목과 입맛에 따라 가치를 잃어버린 문화재도 있다. 대표적인 것은 지금 일본 도쿄 오쿠라호텔 구역에 서 있는 이천향교방석탑. 이 석탑을 눈여겨보지 않은 총독부는 일본재벌 오쿠라(선린상고 설립자)가 조르자 이를 그에게 주어버렸다. 그 뒤로 이천향교방석탑은 줄곧 일본땅에서 일본을 찾는 관광객을 맞고 있다.

‘나홀로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그의 아파트(서울 성동구 응봉동)는 자료 창고로 바뀌었다. 무던한 성품의 아내도 잔소리를 하고, 6년 동안 별탈 없이 탄 르망 승용차는 2년간 집중적으로 굴린 탓에 올 초 길바닥에서 장렬히 전사해 폐차장으로 갔다.

이씨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학계에서 두 가지 견해가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대가들은 콧방귀도 안 뀔 것이고 전문가들은 아마추어리즘을 지적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학맥도 인맥도 없는 탓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문화재 이동경로의 오류를 밝히는 작업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는 “누군가 나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새로운 사실을 찾았으면 좋겠고, 나 역시 잘못 이해한 내용을 바로잡을 기회를 꾸준히 갖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찾아낸 방대한 참고자료들의 목록과 그 목록의 한계까지 모두 책에 담았다. 게으름피우지 않으면 1년에 한권씩 문화재 이동경로를 정리한 조사보고서를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경북 경산 과수재배농의 5형제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그 시절 보통의 시골 아이들처럼 무던한 성장기를 보냈다. 서울로 유학와 군대 마치고 증권사에 취직할 때까지 특별히 튀지도 않고, 문화재와 관련도 없던 삶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를 정리하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에는 유독 관심과 재능이 많았다.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동안에 <증권시장의 사생아>(1995)를 필두로 세권의 주식 관련 책을 썼고, <시골할머니들의 주식투자 성공담>(1997) 등 두권의 책을 번역했다. 아무나 책을 쓸 수는 없지만 누구든 책을 쓸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자신이 관심 갖고 몰두하는 분야가 있다면 굳이 알아주는 직위나 명함이 없다 하더라도 세상에 발표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흔히 문화재와 문화유적을 즐기는 데도 수준 차이가 있다고들 말한다. 초급자는 불국사·해인사 등 이름난 사찰을 찾아 이름난 보물들을 감상한다. 중급자가 되면 자기 취향이 생겨 절의 분위기와 가는 길, 인근 먹을거리 등을 따지며 골라서 찾게 된다. 마지막으로 고급자가 되면 빈 절터를 찾는다. 허물어지고 흔적 없는 공간에서 무한한 상상력에 빠져보고 옛 풍경을 그려본다는 것이다. 이씨의 경우도 이런 과정을 착실히 밟아왔다.

길 잃고 타향 헤매는 문화재여!

이씨는 일제강점기와 분단, 전쟁을 거치며 수많은 문화재와 유적을 잃은 것은 안타깝지만, 문화재에 대한 상상과 기억을 지켜오지 못한 것은 남 탓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심정을 책머리에 이렇게 밝힌다.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는 안쓰럽다. 그나마 문화재의 무덤으로 일컬어지는 박물관으로 흘러들어간 경우는 좀더 형편이 나은 축에 속하고, 그렇지도 못한 채 낯선 땅, 낯선 사람 앞에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는 문화재는 차라리 슬프기까지 하다.”

그는 “쥐뿔도 모른다”는 자기 소개처럼 문화재를 많이 아는 사람은 아닐지 모르지만, 문화재를 많이 좋아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사진기자의 주문에 따라 어색한 표정으로 석탑과 부도를 오가며 포즈를 잡는 그를 보니 옛날 탑지킴이가 있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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