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즐겁게 하는 요설·해학·풍자…성석제와 은희경의 신작 소설집
(성석제 소설을 읽고도 그의 어투를 흉내내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니 과장과 비약을 이유로 이 글을 너무 책하지 말기를…)
장담하건대 만약 어느 시점에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글 ‘이야기꾼과 소설’이 총체적인 오류로 판명된다면, 그것은 한국일 것이 분명하다. 성석제가 있으니 말이다. 벤야민은 어리석게도(?) 아주 오래 전에 ‘이야기꾼’(소설가의 전신)의 소멸을 애도해버렸는데,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성석제 같은 ‘이야기꾼’이 건재해 있다면 그는 확실히 너무 서둘렀거나 총체적인 오류를 범한 셈이다. 역으로 성석제가 이야기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고도 그를 ‘당대 가장 탁월한 이야기꾼’(사실 좀 식상한 광고 문안처럼 들리긴 한다. 그러나 이 문구가 성석제에게만큼 잘 어울리는 경우는 없어 보인다)으로 인정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근과거의 공간 속에서 부활한 이야기꾼
“저 좆만한 새끼들, 좆을 짤라서 떠볶이(떡볶이??)를 해가지고 개한테 먹일 개새끼들, 좆에다 못을 박아서 벽에 걸 놈들, 좆으로 기름을 짜가지고 보일러 돌릴 놈의 새끼들…” 이윽고 그 함성은 “좆, 좆, 좆” 하는 말로 통일이 되어 부두목의 움직이는 귀의 귓바퀴를 통해 부두목의 외이도에 도달한다. 이윽고 고막을 진동한 소리는 망치뼈·등자뼈로 이루어진 3개의 이소골을 거쳐 달팽이관의 난원창에 전달되고 음압이 20배로 상승한다.(<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창작과 비평사 펴냄, 107∼108쪽))
그리고는 더 길게, 쾌활냇가에서 명랑한 계모임을 갖고 있던 ‘상호친목계’(한번 계원이 되면 상호간에 평생 친구가 되어 목숨을 걸고 서로를 지키는 계) 회원들의 욕설이 ‘대도시 범죄단체의 진짜 건달 부두목’의 청신경에 전달되는 생리학적 과정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드디어 그 소리가 부두목의 ‘대뇌피질 측두엽의 청각부’에 이르렀을 때, 그가 한 마디한다.
“아니, 저 토인(土人) 애들이 복날 더위먹고 미쳤나. 왜 저런다니?”(같은 책,108쪽)
언어란 주제를 담는 그릇이라는 상식을 벗어나 오로지 ‘말하는 재미’에 취한 듯 속도감있게 이어지는 위의 문장들만으로 그를 ‘이야기꾼’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이 아직 미심쩍다면, 조금 거슬러올라갈 용의도 있다. 예를 들면 <조동관약전> <순정>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같은 작품들이 취했던 ‘전’(傳)자류의 옛날 이야기 형식을 돌이켜보는 것도 좋겠다. 또한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묘비명 형식과, 영웅 탄생설화를 연상시키는 ‘천하제일 남가이’의 도입부를 언급할 수도 있겠다. 확실히 성석제가 이전 시대 판소리꾼의 계보를 잇는 ‘이야기꾼’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제아무리 강심장이라 한들, 성석제를 근거로 벤야민이 틀렸다고 단정하기는 힘든 일인데, 무엇보다도 벤야민이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어서 지금도 여전히, 그것도 꾸준히, 징후적으로도 읽히고, 또는 전복적으로도 읽히는 20세기 최고의 문예이론가이기 때문이다. 사실 판소리꾼이 오래 전부터 문화재로 지정된 세태만 보더라도 우리는 그의 ‘이야기꾼 소멸론’의 정당성을 인정해야만 하는데,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말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에 대한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이야기꾼은 죽었다는데 이야기꾼이 버젓이 살아 있다니…. 아무래도 비밀은 독자가 풀 일이다. 다만 나로서는 그의 주인공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잡스런 범죄자가 되고 여자를 후리고 노름을 하고 공짜술을 마시는 터전, 즉 소설의 공간적 배경에 주목하라는 말로 힌트에 갈음할까 한다. 이야기꾼이 죽은 것은 근대화와 더불어 그가 나고 자란 태반으로서의 언어 공동체, 성의 공동체, 가난과 소문의 공동체가 소멸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오룡리로, 때로는 신대리로, 때로는 은척이나 중간시로 변형되기도 하는 성석제의 소설적 공간들은 아직 근대화 이전의 이런 공동체적 특성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말하자면 성석제 소설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이 저개발의 근과거 지역은 여전히 이야기꾼이 활동할 수 있는 주요한 무대가 되어준다. 성석제는 영리하게도 유구한 이야기꾼의 전통을 잇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야기꾼들의 활동무대마저 아예 소설 속으로 가지고 들어갔던 것이다. 이제 그를 당할 ‘이야기꾼’은 없어보인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한 사람이 은희경이다. 이번에 출간된 소설집 <상속>(문학과 지성사 펴냄)에 실린 작품 중 가장 탁월한 축에 속하는 ‘딸기 도둑’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호탕한 웃음, 칼을 숨긴 웃음
‘함께 사는 동안은 그는 두 가지 이유에서 돈을 벌지 않고 저에게 그 일을 양보했습니다. 한 가지는 자신이 돈을 벌려고 마음먹으면 지나치게 많이 벌 텐데 그렇게 되면 다른 돈 잘 버는 남자들처럼 바람을 피우게 돼 제 마음을 아프게 할 게 뻔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또 다른 하나는 제가 나태한 습관에 물들어 인생을 쉽게 생각할까 봐 배려하는 것이고요. 자신은 돈을 벌지 않아도 나태해질 위험은 없는 것이 인생관 자체가 무위도식이기 때문이라나요. 그 실천을 위해서 애써 돈을 벌지 않고 있으니 나태는 커녕 무서울 정도로 인생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겠지요. 그에 따르면 무위도식은 현대와 같은 경쟁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자기 희생적 덕목이라더군요. 세속적 욕망을 벗어난 호연지기의 최고 경지이고요’(<상속>, 174∼175면)
확실히 요설과 아이러니에서 은희경은 성석제에 결코 뒤지지 않는 ‘이야기꾼’이다. 그러나 두개의 사자성어 ‘무위도식’과 ‘호연지기’가 논파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연결되고 마는 이런 요설을 성석제의 문장들 속에서 발견했다면 그냥 웃어주면 되는 것이겠지만, 은희경 소설 속에서 발견했다면 그래선 안 된다. 은희경의 언어는 여전히 주제를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성석제의 웃음은 호탕한 것이어서 해학에 가깝고, 은희경의 웃음은 칼을 숨기고 있어서 풍자에 가깝다는 문체론적 특질들로 분해할 필요까지는 없을 줄 안다. 간단하게 성석제는 남성 이야기꾼이고, 은희경은 여성 이야기꾼이란 이유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이 작품집에 실린 ‘아내의 상자’나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 같은 작품을 읽어보라. 아직 우리 사회는 여성 이야기꾼들이 아무런 악의도 원한도 없이 쾌활냇가에서 명랑한 곗날을 즐길 만한 단계에 진입하지는 않았음에 틀림없다.
김형중/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