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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섹시한 웃음에 갈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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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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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광고제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과 흐름… 에로티시즘과 재미를 버무려 느낌 전한다

쪽빛 하늘과 코발트 블루의 지중해, 말 그대로 코다 쥐르(cote d'azur)의 도시 칸에 세계의 크리에이터들이 모였다. 6월16일부터 23일까지 계속된 49회 칸 광고제. 필름, 프레스/아웃도어, 사이버, 미디어, 그리고 올해부터 신설된 다이렉트까지 총 5개 부문에 걸쳐 진행된 이번 크리에이티브의 축제엔 지난해 1만9013편보다 줄어든 1만7247편이 출품됨으로써 세계적인 경제 침체를 반영했다.

사이버, 미디어, 다이렉트 부문에도 눈에 띄는 수작들이 수두룩했다. 특히 미디어와 다이렉트 부문은 마케팅적 성과를 중요시하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칸 광고제가 크리에이티브의 창의성에만 너무 초점을 맞춘 것 아니냐는 지적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그러나 칸의 시선은 역시 인쇄와 전파부문의 크리에이티브 내공 겨루기에 집중됐다. 전 세계에서 가려 뽑은 내로라 하는 작품들이 어깨를 견주었으니 예선을 통과한 쇼트리스트에 오른 작품들을 보는 즐거움만도 꽤 쏠쏠했다.

섹스의 욕망을 재미로 포장


사진/ 프레스/아웃도어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여행클럽 ‘클럽 18-30’ 광고. 젊은이들의 섹스 욕망을 숨은그림찾기 식의 재미로 드러냈다.
흔히 인쇄부문이라고 하는 프레스/아웃도어 부문에는 67개국에서 모두 9077편이 출품되었다. 프레스 부문의 그랑프리는 런던의 사치 앤드 사치(Saatchi & Saatchi)에서 제작한 여행클럽 ‘Club 18-30’에 돌아갔다. 이 여행사의 주요 타깃은 이름에도 표기되어 있듯이 성인이 되는 18세에서 20대를 마감하는 30세까지의 피끓는 20대다. 솔직히 말해 유럽 젊은이들의 여행 목적은 섹스다. 이 광고 역시 그 점을 노려 크리에이티브의 컨셉트를 섹스에 집중시켰다.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기 위해 몸을 굽힌 여자 뒤로 한 남자가 하체를 내밀고 기지개를 켜고 있다. 섹스의 동작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이 광고는 해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상적인 동작을 섹스 동작의 코드로 치환함으로써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서 꿈틀대는 섹스의 욕망을 숨은그림찾기 식의 재미로 드러냈다. ‘Ciub 18-30’ 광고는 전파 부문, 즉 필름 부문에서도 금상을 차지했다. 여행지에서 일탈의 분위기에 젖어 온통 섹스의 광란에 빠진 젊은이들. 그러나 그들의 섹스 행위를 직접 보여줄 수는 없는 일. 이 광고는 개들의 섹스를 통해 젊은이들의 호랑방탕함을 은유로 드러낸다. 재미있는 것은 오럴섹스에서부터 다양한 체위의 섹스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벌이는 각종 섹스 장면을 개들이 재현한다는 점이다. 칸 상영관을 메운 많은 사람들이 개들의 섹스파티에 웃음과 환호성을 보냈음은 물론이다.

필름 부문은 61개국에서 모두 5059편을 출품했다. 5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그랑프리의 영예를 차지한 것은 미국 포틀랜드의 위든 앤 케네디(Widen+Kennedy)에서 제작한 나이키였다. 1998년에 이어 4년 만에 대상을 되찾은 나이키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로 크리에이티브의 트렌드를 주도해 온 명가답게 이번에도 고수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세 편이 시리즈로 출품된 나이키는 그 중 치기장난을 뜻하는 ‘태그’(Tag) 편이 그랑프리를, 그림자 밟고 뛰기의 ‘셰이드 러닝’(Shade Running) 편이 금상을 수상했다. ‘태그’ 편은 어릴 때 동네 골목길에서 하던 치기장난 놀이를 뉴욕의 한복판으로 옮겨왔다. 재미있는 설정이다. 길을 오가던 다 큰 어른들이 도심에서 치기장난을 벌인다는 해프닝은 분명 대단한 상상력이다. ‘셰이드 러닝’ 편엔 역시 뉴욕 도심에서 조깅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독특한 것은 그림자만을 밟으면서 뛴다는 점이다. 마치 아이들이 보도블록 위를 걸을 때 금을 밟지 않고 걷는 놀이를 하듯이 말이다.

대상 거머쥔 나이키… 한국은 은상 하나

사진/ 필름부문 그랑프리를 차지한 ‘나이키’ 광고. 어릴 때 동네 골목길에서 하던 치기 장난놀이를 뉴욕의 한복판으로 옮겨왔다.
이 두편의 광고는 현대인의 운동에 대한 강박을 유희로 반전시켰다. 운동을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감에서 해방시켜 그저 즐겨보라는 식으로 표현했다. 즉 기존의 나이키 컨셉트인 ‘저스트두 잇’(Just do it)의 무거움에서 벗어나 ‘놀아라’(Play)라는 쉽고도 재미가 넘치는 컨셉트로 선회했다. 거의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느낌. 나이키이기에 할 수 있는 주장이다.

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또 한편의 눈에 띄는 작품이 있다. 금상을 차지한 ‘도요타 셀리카’(Toyota Celica) 광고가 그것. 화면엔 쿠페형 스포츠카 한대가 조용한 마을 길에 멈춰 있다. 그때 저 뒤에서 개 한 마리가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그러고는 멈춰 있는 차 뒤를 들이받는다. 잠깐의 정적 후 차 뒤에서 슬금슬금 나오는 개. 그 위로 ‘빨라보입니다’(Looks Fast)란 자막이 뜬다. 빠르다는 스포츠카의 속성과 빨리 달리는 것을 보면 쫓아가는 개의 속성을 통해 예기치 못한 반전을 불러일으킨 이 광고는 대부분의 스포츠 광고의 전형인 전력질주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도 빠르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뛰어난 작품이었다.

사진/ 도요타의 스포츠카 셀리카. 달리는 스포츠카를 쫓아가다 멈춘 차를 들이받고 차에서 나오는 개를 통해 전력질주를 강조하는 스포츠카의 전형적 광고표현에서 벗어났다.
이상 몇몇 작품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이번 칸 광고제의 크리에이티브는 에로티시즘과 재미(fun)에 모아졌다. 섹스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Club18-30’의 광고는 에로티시즘을 통해 유머를 자아냈고, 나이키는 ‘플레이’란 컨셉트를 매우 세련된 영상에 담아 고급스런 재미의 느낌을 드러냈다. 도요타 역시 사물의 속성을 지금까지 보지 못한 방법으로 구현해내어 반전의 즐거움을 배가시킨 작품이었다. 여느 때처럼 뻔해보이는 반전을 담은 작품이나 광고적 의도가 지나쳐 인위적으로 보이는 작품들은 야유와 함께 냉대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모두 129편을 출품한 한국은 필름 부문의 맥도날드 광고로 은상 하나를 건졌다. 버스 안에서 한 남자가 옆에 앉아 졸고 있는 험상궂은 남자의 튀긴 감자 하나를 훔쳐먹는다. 그런데 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튀긴 감자는 다 쏟아지고 하나를 달랑 들고 있는 그 남자가 오해받는다는 내용이다. 유머가 통했다. 세계 공통언어는 역시 유머였던 셈이다. 맥도날드가 상을 받은 까닭은 두 가지 점이 있다. 첫째는 맥도날드가 서양 심사위원에게도 익숙한 제품이라는 점이다. 몇해 전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드려야겠어요”의 경동보일러가 출품되었을 때 그 광고를 이해하는 서양인은 거짓말 보태지 않고 한명도 없었다. 맥도날드가 월드와이드 브랜드인 만큼 세계인의 공통정서에 다가가기 쉬웠다는 것이다. 둘째는 한국 전파광고의 특징인 획일적으로 정해져 있는 15초 분량에 담기에 알맞은 구성이었다는 점이다. 한번의 반전을 통해 유머를 전달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한국적 매체환경에서 구현할 수 있는 최대치를 선보인 것이다.

세계적 정서로 15초의 한계를 넘어

칸 광고제에 참가할 때마다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광고대국인 반면 광고 크리에이티브에서는 세계 최하위라는 자괴감을 느낀다. 사실이 그렇다. 광고를 통해 예술실험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비용을 들여서 보는 사람도 즐겁고 동시에 브랜드와의 친밀도까지 높일 수 있으면 좋은 일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먼저 세계적인 브랜드가 나와야 한다. 국내 경쟁상황에서도 벌벌 떠는 형국에서 의연하고 심도 있는 크리에이티브를 구현한다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다. 아울러 전파광고의 경우 15초로 한정된 매체환경도 바뀌어야 한다. 한국의 많은 광고들이 광고내용의 특성에 관계 없이 모든 메시지를 15초에 우겨넣기 위해 억지의 촌극을 벌이는 예가 많다다. 한국 광고는 15초 내에 반전과 클라이맥스의 찬란함까지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싸인 조급증 환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하나 광고심의를 들 수 있다. 전체 맥락을 보지 못하고 부분에만 집착하여 제재를 가하는 분위기에선 크리에이티브가 발을 디딜 공간이 없다.

모든 선행조건들은 전반적인 사회의 성숙도와 비례해 나아질 것이다. 장점을 키우기보다는 단점을 지적하는 데 익숙한 문화적 토양에서 창의력은 싹트기 힘들다. 광고는 사회의 반영이다. 훌륭한 광고를 누릴 자격은 훌륭한 사회에 주어진다.

김홍탁/ 광고평론가·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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