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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지구 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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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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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일러스트레이션/ 차승미
자연과학 법칙 중에 ‘엔트로피 증대 법칙’이 있다.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길은 있다. 엔트로피는 한마디로 ‘무질서도’, 곧 우리가 관찰하는 계가 얼마나 무질서한지를 나타내는 척도다. 그리고 엔트로피 증대 법칙은 “모든 자발적 과정에서 외부 간섭이 없는 계의 엔트로피는 언제나 증가한다”는 현상을 가리킨다.

엔트로피 증대 법칙에 대한 예로 ‘유치원’을 들 수 있다. 유치원의 하루 일과는 질서정연하게 시작된다. 선생님이 온 신경을 쏟아 어린이들을 각자의 자리에 잘 배치한 뒤 하루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가 바로 외부의 간섭에 의하여 형성된 상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선생님의 감독이 서서히 느슨해진다. 그에 따라 어린이들의 행동도 차츰 흐트러진다. 무질서도, 곧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침내 쉬는 시간이 되면 더욱 자유롭게 행동한다. 그러면 어린이들의 엔트로피는 최댓값이 된다. 엔트로피 증대 법칙은 이처럼 직관적으로는 비교적 단순 명쾌하다. 그런데도 이 법칙이 널리 일반의 흥미를 끄는 까닭은 거기에 실제적으로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지적으로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구를 살펴보자. 인간이 비록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정신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존재는 아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우리 지구는 유치원 어린이들의 세상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수많은 지역에서 무분별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 개발로 인하여 언뜻 겉으로는 질서가 창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험난한 산, 강, 사막, 바다, 밀림 대신에 들어선 반듯한 길거리와 건물들로부터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 관점에서의 피상적인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그런 개발에 따라 엄청난 양의 엔트로피 증가가 초래된다. 그리고 이 증가분은 고스란히 좁은 지구의 자연환경에 전가된다.

예전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태양이라는 거대한 에너지원으로부터 이러한 엔트로피 증가를 벌충하고도 남을 만큼의 에너지가 계속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급기야 최근에는 1985년을 기점으로 인류의 자원 소비가 지구의 공급 능력을 초과했다. 99년에는 그 비율이 120%를 넘어섰다는 발표도 나왔다. 물론 아직은 회복 불능의 최대 엔트로피 상태에 도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구 전체를 관리할 유치원 선생님은 없다. 따라서 인류 스스로 각성하지 않는 한 수십년 안에 극도로 피폐한 환경에서 살게 되리라는 예상이다. 그런데 인류 자신의 각성만으로 해결될 단계는 이미 지났다. 다만 현대 첨단 과학의 발전에 비춰볼 때 지구 황폐화 현상이 궁극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는 예상이 있어 다소나마 위안이 된다.

인류는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갖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가장 번성한 종이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알 수 있듯이 수많은 민족과 국가를 쓰러뜨린 시련은 대개 내부로부터 자라난다. 인류에 대한 외부적 위협은 없는 가운데 우리는 이제 새로운 내부적 시련을 맞았다. 그리고 여기에는 도덕적 각성과 지적 역량 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인간이 과연 진정한 만물의 영장인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증명할 시점에 살고 있는 셈이다.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p@sunchon.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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