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변방국가의 억눌린 자화상 담은 역사책 <슬픈 아일랜드>
아일랜드는 일본이나 중국처럼 한국인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도 아니고, 정보량으로 따지면 유럽의 다른 국가보다 부족한 곳임에도 우리에게 묘한 정서적 친연성을 느끼게 하는 나라다. 가난했던 과거와 식민지 경험, 분단현실이라는 공통의 환경조건 때문이다. 이외에도 사실 두 나라 사이에 막연한 연대감을 형성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각각 일본과 잉글랜드라는 여전히 긴장관계의 ‘가깝고도 먼 나라’를 옆에 끼고 있다는 점이다. 잉글랜드와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아일랜드인과 한국인을 향해 ‘하얀 검둥이’, ‘옷 잘 입은 아이누족’이라고 손가락질한 사실을 잊은 지 한참 되었지만 두 나라는 치욕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역사로 우리를 읽는다
몇년 전 소설가 윤정모씨가 발표했던 장편소설과 같은 제목의 역사책 <슬픈 아일랜드>(새물결 펴냄)를 쓴 서울대 박지향 교수(서양사)는 “아일랜드의 슬픔은 잉글랜드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12세기부터 시작된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정복과 지배는 자유국이 되는 20세기 초까지 지속됐으며, 북아일랜드가 여전히 영국의 지배하에 있다는 점에서 그 상황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반세기 통치로 식민지 역사는 짧지만 청산되지 않은 과거로 인해 아직도 그 기억을 몸 속 깊이 새기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역시 아일랜드 상황과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슬픈 아일랜드>는 아일랜드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읽는 일종의 비교연구서다.
“인류 역사상 이처럼 고난을 겪은 민족은 없었다.” 19세기 아일랜드의 역사가 윌리엄 리키가 강조한 운명의 비극성은 오랫동안 아일랜드를 관통하는 정서였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恨)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비극적 운명을 만든 타자는 바로 잉글랜드였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러한 피해의식이 일방적인 정복과 지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증폭된 감정에 더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잉글랜드 사람들이 아일랜드에 대해 상투적 이미지를 부여했다면 아일랜드 사람들이 만들어낸 잉글랜드의 이미지 역시 ‘선량한 아일랜드’ 대 ‘사악한 잉글랜드’, ‘못된 계모’ 대 ‘착한 의붓딸’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이면서 상투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아일랜드인들의 피해의식은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자기 위안의 한 방편이 되기도 했다. 많은 지식인들마저 ‘가장 슬프고 비참한 나라’라는 자기 파괴적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은 드물지만 비주류의 소수 지식인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19세기 말 탈(脫)잉글랜드화를 부르짖은 더글러스 하이드는 ‘잉글랜드인을 명백하게 증오하면서 그들을 계속 닮아가는 아일랜드의 정신상태’를 맹렬히 비난했고, 조국을 떠난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를 “심각한 세상에서 영원한 풍자의 대상이 되도록 신에 의해 운명지어진 나라”라고도 했다. 지난 수십년간 진행돼온 민족주의적 역사학과 수정주의적 역사학 논쟁에서도 이러한 면모는 그대로 드러난다. 오랜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아일랜드의 역사서술은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어왔다. 그런데 민족주의 역사학에 반기를 든 수정주의 사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1970년대에는 ‘1840년대 감자마름병에 의해 대기근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수정주의자로 정의한다’는 유머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는 아일랜드 역사학에 어느 정도로 국수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역사적으로 단 한번도 통일국가를 이뤄본 적이 없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의 신화를 깨려고 한 수정주의 사학자들은 잉글랜드의 통치 시기에 아일랜드가 경제사회적으로 성장해왔다는 실증적 자료를 내놓았다. 하지만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잉글랜드 경제에 통합되면서 근대화함에 따라 잉글랜드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심화됐다는 반박을 했다. 이는 우리나라 사학계에서 아직 진행 중인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과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아일랜드와 한국의 식민지 역사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민족정체성에 대한 정의다. 12세기부터 영국에서 이주한 신교도들은 수세기 동안 아일랜드의 지배층이 되어 아일랜드에 동화되었는데, 결국 북아일랜드공화국 성립에 주축이 된 이들은 아일랜드 근대사에서 매우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영국계 아일랜드인의 고독’이라고 지은이가 이름붙인 이들은 게일문화의 가톨릭계 아일랜드인들이 ‘게일-가톨릭’ 민족주의를 들고일어나면서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 경계에 선 인종으로 고립됐다. 아일랜드 토착민뿐 아니라 본국에서도 이들을 ‘잉글랜드 수비대’로 여겼다. 고독한 그들의 오만과 불안
이들의 특징 역시 오만과 불안이라는 양면적 태도로 드러났다. “자신들의 운명이 ‘지배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오만했지만, 동시에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다는 존재의 근저에 깔려 있는 불안은 양면적 속성으로도 나타난 것이었다.” 오스카 와일드, 버나드 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같은 천재 예술가들은 이러한 이중적 정체성이 야기하는 갈등과 고뇌의 생산물이었다. 예이츠는 젊은 시절 잠시 잉글랜드에 머물다 아일랜드로 돌아와 열렬한 민족주의자가 됐지만, 와일드나 쇼는 잉글랜드 작가로 기억될 만큼 런던에서만 활동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일랜드는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 일종의 정신상태였고, 런던의 삶이나 작품 속에서 결토 아일랜드의 그림자를 걷을 수는 없었다. “제 새끼를 잡아먹는 늙은 암퇘지”라고 자신의 고향을 비난한 조이스의 작품 세계 역시 아일랜드라는 뿌리와 결코 분리될 수 없었다.
1990년대 후반 아일랜드가 국민소득에서 잉글랜드를 앞질렀음에도 피해의식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90년대 중반 어떤 이는 아일랜드의 ‘과잉 정체성의 위기’가 정점에 이르렀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고 해도 월드컵으로 인해 요즘 우리나라 역시 애국주의와 ‘대∼한민국’ 사람에 대한 정체성 확인작업이 여느 때보다 뜨겁다. 월드컵의 열기를 식히며 우리와 닮은 아일랜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는 것이 ‘오∼ 필승 코리아’ 후유증 예방을 위한 한 방법이 될 듯하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슬픈 아일랜드> 박지향 지음, 새물결(02-6141-8696) 펴냄.
“인류 역사상 이처럼 고난을 겪은 민족은 없었다.” 19세기 아일랜드의 역사가 윌리엄 리키가 강조한 운명의 비극성은 오랫동안 아일랜드를 관통하는 정서였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恨)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비극적 운명을 만든 타자는 바로 잉글랜드였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러한 피해의식이 일방적인 정복과 지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증폭된 감정에 더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잉글랜드 사람들이 아일랜드에 대해 상투적 이미지를 부여했다면 아일랜드 사람들이 만들어낸 잉글랜드의 이미지 역시 ‘선량한 아일랜드’ 대 ‘사악한 잉글랜드’, ‘못된 계모’ 대 ‘착한 의붓딸’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이면서 상투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아일랜드인들의 피해의식은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자기 위안의 한 방편이 되기도 했다. 많은 지식인들마저 ‘가장 슬프고 비참한 나라’라는 자기 파괴적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은 드물지만 비주류의 소수 지식인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19세기 말 탈(脫)잉글랜드화를 부르짖은 더글러스 하이드는 ‘잉글랜드인을 명백하게 증오하면서 그들을 계속 닮아가는 아일랜드의 정신상태’를 맹렬히 비난했고, 조국을 떠난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를 “심각한 세상에서 영원한 풍자의 대상이 되도록 신에 의해 운명지어진 나라”라고도 했다. 지난 수십년간 진행돼온 민족주의적 역사학과 수정주의적 역사학 논쟁에서도 이러한 면모는 그대로 드러난다. 오랜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아일랜드의 역사서술은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어왔다. 그런데 민족주의 역사학에 반기를 든 수정주의 사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1970년대에는 ‘1840년대 감자마름병에 의해 대기근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수정주의자로 정의한다’는 유머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는 아일랜드 역사학에 어느 정도로 국수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역사적으로 단 한번도 통일국가를 이뤄본 적이 없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의 신화를 깨려고 한 수정주의 사학자들은 잉글랜드의 통치 시기에 아일랜드가 경제사회적으로 성장해왔다는 실증적 자료를 내놓았다. 하지만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잉글랜드 경제에 통합되면서 근대화함에 따라 잉글랜드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심화됐다는 반박을 했다. 이는 우리나라 사학계에서 아직 진행 중인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과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아일랜드와 한국의 식민지 역사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민족정체성에 대한 정의다. 12세기부터 영국에서 이주한 신교도들은 수세기 동안 아일랜드의 지배층이 되어 아일랜드에 동화되었는데, 결국 북아일랜드공화국 성립에 주축이 된 이들은 아일랜드 근대사에서 매우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영국계 아일랜드인의 고독’이라고 지은이가 이름붙인 이들은 게일문화의 가톨릭계 아일랜드인들이 ‘게일-가톨릭’ 민족주의를 들고일어나면서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 경계에 선 인종으로 고립됐다. 아일랜드 토착민뿐 아니라 본국에서도 이들을 ‘잉글랜드 수비대’로 여겼다. 고독한 그들의 오만과 불안

사진/ 영국계 아일랜드 작가 예이츠(왼쪽)와 버나드 쇼. 이들은 평생 경계에 선 인종으로서 고뇌하며 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