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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살림을 향한 간결한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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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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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생명의 신성성 노래한 김지하의 <화개>… ‘동이적 상상력’을 세계사적 지평으로

사진/ 홍용희 ㅣ 문학평론가·경희사이버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김지하의 새 시집이 간행됐다. 그는 서문에서 “문득 한 기억이 떠올라 옛 노트들을 정리하던 중 약 100편 정도의 미발표 시고(詩稿)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고 전언하고 있다. 옛 노트의 어두운 갈피에 묻혀 잠들어 있던 시편들이 “캄캄한 허공” 속에서 “붉은 꽃봉오리 살풋 열리듯”(‘花開’) 세상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들 시편들이 창작된 시기는 대부분 7시집 <중심의 괴로움>(1994)이 간행될 무렵이고, 4부의 10여편은 비교적 근자인 2∼3년 전이다. 따라서 이번 시집 <화개>(花開)는 <중심의 괴로움>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된 생명의 신묘한 존재 원리와 진경에 대한 직시, 생태계 파괴의 현실에 대한 개탄의 연속성 속에 놓인다. 특히 4부는 그의 생명 사상이 내면화되고 순치되어 꽃잎처럼 연하고 부드러운 ‘흰 그늘’의 눈부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흰 그늘’의 미학 돋보여

사진/ 김지하 시집<화개> (실천문학사 펴냄).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생명가치를 훼손시키는 죽임의 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응전과 대립에서 죽임의 세력까지도 순치시켜 포괄해내는 좀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살림의 문화 재건’으로 심화·확대되는 양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대체로 그의 시집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가 전자에 해당하고 <애린 1, 2>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이 후자에 해당한다. 여기에 <화개>가 간행되면서 그가 지속적으로 탐색해온 신령하고 무궁한 우주 생명에 대한 실체가 좀더 선명하게 시의 몸으로 현현되고 있다. 여기에서 시의 몸으로 현현된다는 것은 그의 시 세계의 주제 의식은 물론 형식미학 자체가 우주 생명의 존재원리에 상응하는 체위를 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강조다.


이번 시집의 형식 미학의 특징은 우선 대부분의 시편이 짧고 간결하게 전개되면서 성긴 틈의 공간이 열리고 있다는 점이다. 언어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열려진 이 틈은, 우주적 삶의 기운과 독자들의 상상력이 생성하고 소통할 수 있는 창조적 여백으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감기 들린 작은 놈 콜록 소리/ 내 가슴에 천둥 치는 소리/ 손에 끼었던 담배/ 저절로 떨어지고/ 춥다/ 그리고 덥다.”(‘단시 셋’)의 경우처럼 행과 행, 연과 연의 전이의 마디절이 응축적으로 생략되면서 창조적 여백이 생성된다. 이때 여백은 각각의 시행의 독자적인 의미 생성의 장을 제공해주면서 동시에 이들 시행의 상호 연결의 의미망을 형성시킨다. 그러나 이때의 의미망은 각 행의 독자성을 또한 해치지 않는다. 이 시편에는 가없는 시적 정황의 우주적 지평이 수렴되고 확장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작은 개체 생명이 안으로 닫혀 있으면서도 밖으로 열리어 무궁한 우주 생명의 깊은 질서를 깊이 호흡하고 공명하는 이치와 유사하다. “내 마음과/ 몸 안에” 해와 달이 모두 있다(‘신새벽’)는 시적 인식이 형식 미학을 통해서도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이번 시집 전반에는 ‘흰 그늘’의 미학이 표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늘’이란 판소리 용어로 곡절 많은 신산고초의 삶과 연관된다면, ‘흰’은 “우주 리듬의 독특한 용(用) 즉 신명성의” 충만과 연관된다. 따라서 ‘흰 그늘’이란 고통스런 삶의 과정이 생명의 고양된 충일로 몸바꿈을 하는 역설적 균형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그늘’의 어둠이 어둠에 그치지 않고 이를 초극하는 ‘흰’빛을 생성시키는 배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이를테면 그가 “내 고통/ 긴 기다림이 있다/…/기다림이 꽃으로 바뀌는 소리/ 들린다”(‘변환’)라고 노래하는 역동적인 생성의 원리와 연관된다.

우리가 가장 주목할 부분은 바로 “내 고통”, 즉 그늘의 지층이 시인 개인의 내적 체험의 범주를 넘어서서 민족적인 범주의 심연과 닿아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적 역동성의 힘이 동이족의 상상력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는 “검은 봉우리/ …/ 신내려/ 떨림/…/ 아아 伽倻여 伽倻여/…/ 망한 옛/ 東夷의 아득아득한/ 솟대여”(‘伽倻의 산들’)라고 부르는 탄식과 “너의 이름은/ 夷史,/ 잃어버린 東夷族의/ 아득한 넋/ 내/ 마지막 삶의/ 밑둥이여”(‘현풍을 지나며’)라는 노래가 전면에 울려퍼진다. 따라서 그가 “신령이 와/ 말을 건다/…/ 아,/ 이제야/ 왔다/…/ 그러매 이젠/ 몸 안에 있는 눈들도/ 모두 열려라”(「八顯四隱」)라고 할 때, “몸 안에 있는 눈”은 바로 “東夷族의/ 아득한 넋”의 “눈”을 가리킨다.

병든 세계의 어둠을 치유한다

여기에 이르면 그의 우주 생명의 신성성을 노래하는 시편들이 이토록 깊고 웅혼한 울림과 “캄캄한 허공”의 쓸쓸함 속에서도 “붉은 꽃봉오리 살풋 열리”(‘화개’)는 환희의 빛을 건져올리는 역동성을 지닐 수 있었던 배경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시적 상상력은 저 유구한 동이족의 역사의 지층에서 솟아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시선은 그의 동이족의 상상력이 오늘날 병든 세계의 어둠을 치유하는 살림의 문화로 기운생동해 나갈 모습으로 향하게 된다. 이 지점은 그의 시 세계의 ‘흰 그늘’의 눈부심이 세계사적 지평으로 확산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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