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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제2라운드는 ‘스크린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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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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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미 대결 앞둔 여름 극장가… 거대 예산의 대작들 잇따라 개봉

월드컵이 끝나도 한·미전은 계속된다. 이번에는 여름마다 전 세계를 석권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선수로 나섰다. 지난해, 거칠고 유머 넘치는 한국 조폭들의 집단 방어에 미국이 맥을 못 추는 기현상이 벌어졌으나 이번에는 좀 다르다. 일찌감치 <스파이더맨>으로 기세를 잡았고, <스타워즈 에피소드2-클론의 습격> <마이너리티 리포트> <맨 인 블랙2> 등 1천억원 안팎의 거대 예산이 투입된 대작들이 7월 초부터 차례로 극장가를 두드린다. 게다가 할리우드 최고의 흥행사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협공이다.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로, 스티븐 스필버그는 <죠스>로 70년대를 휩쓸며 블록버스터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이다. 또 세 작품 모두 공상과학(SF) 장르다.

여름영화 전쟁에 뛰어드는 한국 선수들도 만만치는 않다. 800만명을 훌쩍 넘기며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새로 쓴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 <챔피언>(6월28일 개봉)으로 제일 먼저 승부수를 던진다. 주인공도 의미심장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투혼을 발휘하다 목숨을 잃은 권투선수 김득구다. 그 뒤를 잇는 건 신비의 이미지로 CF계를 휩쓸었던 ‘TTL 소녀’ 임은경이다. 장선우 감독의 SF 블록버스터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7월26일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톰 크루즈 주연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개봉날과 같다. <챔피언>과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총제작비가 각각 70억, 90억원을 넘는다. 80억원을 쏟아넣은 또 하나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아 유 레디?>(7월12일 개봉)는 예측불허의 복병이다. 한국 최초의 판타지 어드벤처라는 미지의 영역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개인기 탁월한 SF 물결


사실 관객들은 여름영화 전쟁을 국가대항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국적보다는 개별 선수들의 외모가 얼마나 화려한지, 입담은 얼마나 뛰어난지 가늠해보고 각 선수의 개인기를 즐기는 전통을 만들어왔다. 선수 각자의 프로필은 그래서 중요하다. <스타워즈 에피소드2-클론의 습격>은 이례적으로 평일인 7월5일(수요일) 밤 9시에 개봉한다. 미국에서 5월 중순 개봉해 한달 가까이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지켜내며 2억5500만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 전작 <스타워즈 에피소드1-보이지 않는 위험>이 이야기가 몹시 빈약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국내에서 이렇다 할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캐릭터의 특성이나 이야기의 집중도를 제법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특히 아나킨 스카이워커(헤이든 크리스턴슨)과 아마딜라 여왕(내털리 포트먼)의 금지된 사랑을 중심에 놓으면서 로맨스를 유난히 강화했다.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앞서 개봉된 <스타워즈> 4·5·6편에서 막강한 어둠의 힘을 자랑했던 다스 베이더와 동일 인물이다. 에피소드2에서는 선한 전사라고 할 제다이의 본분을 지키고 있는데, 그런 그가 왜 제다이를 몰살시키는 악한으로 변해버리는지 실마리를 내보인다. 유난히 승부근성이 강한 스카이워커는 스승 오비완 케노비(이완 맥그리거)의 통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데, 어머니가 살해당하도록 방치했다는 죄책감과 분노에 휩싸이면서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레옹>에서 킬러를 매혹시켰던 소녀 내털리 포트먼이 성숙한 매력을 보여주고, 고수 중의 고수 자리를 말로만 지켜왔던 요다가 비로소 광선검을 잡고 액션을 펼친다. 그건 일종의 보너스다.

각본·감독·제작의 조지 루카스는 소니의 고화질(HD)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한 100% 디지털 촬영으로 기술적 실험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디지털 파일을 상영할 수 있는 프로젝터를 구비한 극장이 미국 안에서도 70여개에 불과한 실정이어서 대다수 관객은 필름으로 다시 옮긴 영상을 볼 수밖에 없다.

<맨 인 블랙2>(7월12일 개봉)는 에서 심각한 음모론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유머와 액션을 집어넣은 듯한 외계인 이야기로 1997년의 화제작이 된 <맨 인 블랙>의 속편이다. 윌 스미스와 토미 리 존스의 두 주인공, 감독 배리 소넨필드가 다시 뭉쳤고, 마이클 잭슨이 코믹스런 캐릭터로 단역 출연했다.

맨 인 블랙(MIB)은 지구에서 인간의 얼굴로 살고 있는 외계인의 출입 관리와 범죄 행위를 감시하는 비밀 조직이다. 이들의 존재는 중앙정보국(CIA)이나 연방수사국(FBI)도 알지 못한다. 목격자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장비 덕분인데, 속편은 그 기억의 복원에서 시작한다. 조직 일부가 사악한 외계인 셀리나(라라 플린 보일)와 손잡아 지구가 위험에 처하자 요원 제이(윌 스미스)가 은퇴한 선배 케이(토미 리 존스)를 찾아나선다. 그런데 기억을 지워버리고 평범한 우체국 직원으로 살고 있는 케이의 과거를 복원하는 일부터가 쉽지 않다. 윌 스미스, 토미 리 존스, 라라 플린 보일 등 출연진이 6월6일 내한해 홍보를 벌이는 등 가장 적극적으로 공략에 나섰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배우 톰 크루즈가 처음 만났다는 사실도 화제이지만, 예쁜 상상력이 특기인 스필버그가 암울한 분위기의 SF 누아르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소식이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아닌게아니라 원작자가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등 철학적인 SF의 세계를 만들어온 필립 K. 딕이다. 스필버그는 촬영감독에게 “내가 만든 어떤 영화보다 추하고 더러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고 한다. 지난해 어른을 위한 SF 동화 같던 와 정반대되는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닐까?

서기 2080년, 사전 범죄를 단속하는 특수경찰이 맹활약 중이다. 아직 죄를 범하지도 않은 사람을 미래의 범행 가능성이라는 혐의로 체포해 범죄의 씨를 근원에서 없애는 것이다. 특수경찰을 이끌던 존 앤더톤(톰 크루즈)은 정작 자신이 범죄 예상자로 찍혀 동료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고, 그는 첨단기술을 동원한 추격전 속에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향수에 젖고 미래 속으로…

남성적 복고 취향을 자극했다는 <친구>처럼 <챔피언>도 어딘가 과거의 향수, 남성적 집념의 냄새를 풍긴다.

“17살…. 텔레비전에서 처음 본 그는 별로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선수였다. 그러나 공이 울리고 첫 라운드가 시작되자 나는 브라운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들것에 실려 마지막으로 링을 떠나는 그의 모습에 17살이었던 나는 서러움과 분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뇌리 속에 김득구라는 이름 석자를 박아넣었다.”

그 뒤 20년이 흘러 곽경택 감독의 뇌리에 간직됐던 김득구는 영화 <챔피언>으로 되살아났다. 이 과정에서 곽 감독은 네 인물과 우연치 않게 만나면서 큰 도움을 받았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김득구의 고향인 강원도 고성군 반암리를 찾았던 그가 마을에서 처음 마주친 사람이 김득구의 형이었고, 초고를 완성한 뒤에는 김득구가 이런저런 상념을 쓴 대학노트를 간직해온 한 신문기자를 만났다. 또 김득구의 친구이자 권투선수였던 이상봉, 로스앤젤레스 촬영현장을 직접 찾아온 레이 붐붐 맨시니(1982년 라스베이거스의 특설링에서 김득구에게 치명타를 안겨준 바로 그 선수). 이들은 유오성이 연기한 김득구의 삶에 살아 있는 생명력과 디테일을 불어넣는 원천이 됐다.

미국 로케이션에서 수천명의 엑스트라를 고용하고, 그것도 모자라 수많은 관객을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내느라 순제작비만 50억원을 훌쩍 넘겼다.

장선우 감독은 어느 순간 한국영화계에서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가 됐다. <나쁜 영화>와 <거짓말>이 차례로 거센 찬반 논쟁을 일으키더니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를 찍으면서 제작사의 존재 기반을 흔들며 숱한 소문을 낳았다. 4년 전 기획단계에서 33억원으로 책정된 예산은 촬영을 시작할 때 56억원으로 불어났고 촬영이 끝난 시점에서는 90억원을 넘겼다. 6개월로 예정된 촬영기간은 14개월로 늘어났다. 장선우 감독이 촬영 도중 잠적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건 마치 한국판 <지옥의 묵시록> 같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은 필리핀에서 촬영하면서 제작 규모를 눈덩어리처럼 불려가면서도 악성 루머를 뿜어내고 영화는 완성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차지하면서 악몽 같은 과거를 씻어내기는 했지만.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 블록버스터답게 포섭 대상으로 올려놓은 관객의 범위를 넓게 잡았다. 가상현실과, 호접몽이라는 장자의 우화를 인터랙티브 액션게임의 형식으로 풀어냈다. 액션·코미디·멜로·판타지 등 장르도 복합적이다. 철학적 깊이와 형식적 실험, 그리고 대중적 재미를 모두 노린 셈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라는 게임 안과 바깥의 현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면서 온갖 사건이 벌어진다.

사진/ <아유 레디?>
<아 유 레디?>(감독 윤상호)는 ‘우리는 왜 <인디아나 존스> <미이라>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없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판타지 어드벤처 영화다. 놀이동산의 사파리 열차를 맹수들이 습격하고 여기서 도망치던 6명의 사람들이 ‘아 유 레디’라는 문에 들어서면서 이상한 세계로 빨려든다. 총알이 빗발치고 쥐떼가 습격하는 등 꿈같은 현실을 펼치느라 실사촬영보다 컴퓨터그래픽의 분량이 더 많이 들어갈 예정이다. 정상급 배우를 과감히 기피하면서도 성공하는 <스파이더맨>처럼 블록버스터가 무명배우의 기용으로 성공하는 예가 가끔 있다. <아 유 레디?>도 김정학·김보경·이종수·천정명 등 아직 덜 알려진 배우들을 포진시켰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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