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을 일상에 파고든 마약으로 다룬 윌리엄 더프티의 <슈거 블루스>
<슈거 블루스>는 192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대중가요로, 마음의 상처와 우울을 잊기 위해 설탕에 빠져든다는 내용의 노래다. 이 노래가 발표된 1923년은 금주령이 내린 해였다. 술집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밤마다 텔레비전 앞에서 캔디통을 껴안고 살면서 설탕 소비가 두배로 급증했다. 덕분에 가수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이 노래는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노래가 됐다. 또한 노래는 잊힌 지 오래지만 노래 제목만은 지금까지 일반명사의 자격을 획득해 살아남았다. ‘슈거 블루스’란 보통 설탕이라 불리는 정제 수크로오스의 섭취로 발생하는 육체 및 정신의 복합적인 질환을 말한다.
설탕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은 글을 깨치기 시작한 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비만의 원인이 되고 충치가 생기는 등의 기초상식뿐 아니라 갖가지 성인병의 원인이 되며 성격 형성에도 좋지 못하다는 따위의 많은 정보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런 정보가 콜라 자판기의 버튼을 누르거나 스니커즈 초콜릿바 앞으로 손이 뻗치는 걸 막지는 못한다. 이는 최근 일고 있는 금연 바람이나 육류소비 감소와 매우 다른 현상이다. 왜 그럴까? 이들 ‘유해식품’보다는 설탕이 덜 유해하기 때문에? 미국의 저널리스트 윌리엄 더프티가 쓴 <슈거 블루스>(이지연·최광민 옮김, 북라인 펴냄)를 읽으면 ‘그렇다’는 쉽게 대답이 나올 수 없다. 차라리 설탕은 공기나 물처럼 우리의 삶 속에 깊이 침투해 있기 때문에 그 위협을 망각하고 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치명적 위협 간직한 중독성 물질
뉴욕 포스트의 수석기자로 전 미연방수사국(FBI) 국장 에드가 후버와 군부의 비리를 파헤치던 더프티가 설탕이라는 ‘사소한’ 주제에 매달리게 된 데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여느 미국의 소년처럼 과일맛 설탕음료와 사탕, 초콜릿에 길들여지며 성장한 지은이는 지독한 여드름과 피부병, 편두통, 치질로 고통받으며 수십년을 살아왔지만 어느 의사에게서도 설탕 섭취를 줄이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기자간담회가 있던 어느날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커피에 넣을 각설탕을 듬뿍 짚다가 옆에 앉아 있던 여배우 글로리아 스완슨이 내뱉는 한마디를 듣는다. “그건 독약이에요.” 놀란 그는 각설탕을 떨어뜨렸다. 설탕의 유해함을 깨달은 건 이 말을 듣고도 한참 뒤의 일이지만 30년 이상 달고 다니던 고질병들을 설탕을 끊으면서 물리친 뒤 그는 설탕이라는 주제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 책에서 설탕은 코카인·모르핀·헤로인 등의 마약과 동일선상에 놓인다. 백색가루라는 겉모양부터 중독성, 건강에 끼치는 치명적인 위협까지 유사하다는 게 저자의 논리다. 한해에 자신의 몸무게만큼이나 설탕을 먹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 말은 과장된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설탕의 역사에서 설탕 제조업자들의 치열한 로비까지 파고 들어간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그다지 황당한 논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설탕이 만들어지고 보급된 역사는 아편이나 다른 마약 중독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애초에는 약품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감각적 쾌락을 좇는 습관성 물질이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편도 한때는 브리태니카 사전에 DIY(Do It Youself) 흡연방법이 친절히 소개됐고, 헤로인이나 모르핀 역시 사회적으로 널리 용인되던 때가 있었다. 설탕과 진정제 중독의 차이 역시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17세기 중반 영국의 런던에서는 3만명을 죽음으로 몰고간 역병이 유행했다. 가장 먼저 병이 걸린 사람들은 부유한 유명인사들이었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의사 토머스 윌리스는 자신이 돌보던 유명인사들의 소변이 전에 없이 달짝지근해졌다는 사실을 최초로 기록하고, 이 병에 당뇨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그가 붙인 학명(diabetes mellitus)에는 설탕으로 인한 질병이 아닌 벌꿀로 인한 질병(mellitus)으로 돼 있다. 당시 영국은 설탕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괜한 시비로 설탕 소비를 줄일 수 없다는 정부의 무언의 압력이 들어간 결정이었다. 이처럼 지은이는 설탕이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게 된 건 정부와 기업, 그리고 의사들의 담합 때문에 가능했다고 이야기한다. 현대의학이 발달하면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사람들의 건강은 일상적 식생활도 점점 더 유리됐다. 비타민의 발견이 한 예다. 헝가리 태생의 미국의사 조 골드버거는 펠라그라병 연구를 통해 정제곡류와 설탕이 이 병을 야기하고 현미와 통밀 등으로 구성된 식사가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연구논문을 통해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결과는 주목받지 못했다. 대신 1936년 막대한 양의 쌀겨에서 추출한 비타민 B1(*작은 1로)의 발견은 신문마다 대서특필됐다. 사람들은 당시 1파운드에 10센트 하던 현미 대신 그람당 400달러짜리 비타민을 사먹으라고 권장받았다. 비타민이 엄청난 돈을 버는 종교의 경지에 이르자 비타민의 최초 발견자인 폴란드 화학자 카시머 펑크는 이런 말을 남겼다. “비타민은 요술 같은 약이 아니다. …자연이 스스로 충분한 양의 음식을 생산하는데, 인간의 음식을 인공적으로 합성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자연이 우리에게 충분한 음식을 공급하고 있는데도 우리 스스로 합성한 식품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정말 우스운 생각이다.” 1929년 <식품법 위반의 역사>를 쓴 미국의 화학자 하비 와일리는 미국 농무성 화학분과를 책임지면서 설탕을 비롯해 카페인 등 각종 불법화학첨가물 덩어리였던 코카콜라를 식품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그러나 정부 최고위층을 동원한 코카콜라사의 로비로 법정은 코카콜라 쪽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쌍방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뒤 대법원은 결국 지방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와일리의 화학분과 손을 들어줬지만 그 사이 코카콜라사는 뉴욕 증시에 자사주식을 상장할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월드컵과 올림픽을 비롯한 세계적인 이벤트의 공식후원자가 되어 최후의 승자로 남아 있다. 와일리는 훗날 미식품의약국(FDA)에서 공식 발암물질로 인정한 사카린이 건강에 나쁘다고 대통령에게 직언한 직후(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담당 주치의의 권유로 설탕 대신 사카린을 복용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물러났고 화학분과는 해체됐다. 양심적 설탕 거부자에게 권리를… 지은이는 마약에 대한 관리가 엄격하며 비흡연자를 옹호하는 법조항와 문화가 일반화됐음에도 “양심적 설탕 거부자가 하루 종일 사는 것은 술취한 사람이 지뢰밭을 용케 걸어가는 것만큼이나 조마조마하다”고 말한다.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고, 초콜릿을 거부한다 해도 충치를 없애주는 치약에까지 부드러운 맛을 위해 설탕을 첨가하는 세상에서 설탕을 피해가기란 쌍둥이 빌딩 사이를 줄타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더프티는 1975년에 이 책을 썼다. 이 책이 출판된 지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코카콜라와 펩시, 네슬레 등 설탕으로 먹고사는 기업들은 더욱 규모를 불렸고, 설탕 소비량 역시 별로 줄지 않았다. 지은이가 제안한 대로 자연식을 직접 조리하며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다니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미래를 생각하면 어린 꼬마에게 상으로 사탕을 집어주는 건 당장 그만둘 일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슈거 블루스> 윌리엄 더프티 지음. 이지연·최광민 옮김. (북라인 펴냄).
뉴욕 포스트의 수석기자로 전 미연방수사국(FBI) 국장 에드가 후버와 군부의 비리를 파헤치던 더프티가 설탕이라는 ‘사소한’ 주제에 매달리게 된 데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여느 미국의 소년처럼 과일맛 설탕음료와 사탕, 초콜릿에 길들여지며 성장한 지은이는 지독한 여드름과 피부병, 편두통, 치질로 고통받으며 수십년을 살아왔지만 어느 의사에게서도 설탕 섭취를 줄이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기자간담회가 있던 어느날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커피에 넣을 각설탕을 듬뿍 짚다가 옆에 앉아 있던 여배우 글로리아 스완슨이 내뱉는 한마디를 듣는다. “그건 독약이에요.” 놀란 그는 각설탕을 떨어뜨렸다. 설탕의 유해함을 깨달은 건 이 말을 듣고도 한참 뒤의 일이지만 30년 이상 달고 다니던 고질병들을 설탕을 끊으면서 물리친 뒤 그는 설탕이라는 주제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 책에서 설탕은 코카인·모르핀·헤로인 등의 마약과 동일선상에 놓인다. 백색가루라는 겉모양부터 중독성, 건강에 끼치는 치명적인 위협까지 유사하다는 게 저자의 논리다. 한해에 자신의 몸무게만큼이나 설탕을 먹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 말은 과장된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설탕의 역사에서 설탕 제조업자들의 치열한 로비까지 파고 들어간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그다지 황당한 논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설탕이 만들어지고 보급된 역사는 아편이나 다른 마약 중독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애초에는 약품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감각적 쾌락을 좇는 습관성 물질이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편도 한때는 브리태니카 사전에 DIY(Do It Youself) 흡연방법이 친절히 소개됐고, 헤로인이나 모르핀 역시 사회적으로 널리 용인되던 때가 있었다. 설탕과 진정제 중독의 차이 역시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17세기 중반 영국의 런던에서는 3만명을 죽음으로 몰고간 역병이 유행했다. 가장 먼저 병이 걸린 사람들은 부유한 유명인사들이었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의사 토머스 윌리스는 자신이 돌보던 유명인사들의 소변이 전에 없이 달짝지근해졌다는 사실을 최초로 기록하고, 이 병에 당뇨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그가 붙인 학명(diabetes mellitus)에는 설탕으로 인한 질병이 아닌 벌꿀로 인한 질병(mellitus)으로 돼 있다. 당시 영국은 설탕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괜한 시비로 설탕 소비를 줄일 수 없다는 정부의 무언의 압력이 들어간 결정이었다. 이처럼 지은이는 설탕이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게 된 건 정부와 기업, 그리고 의사들의 담합 때문에 가능했다고 이야기한다. 현대의학이 발달하면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사람들의 건강은 일상적 식생활도 점점 더 유리됐다. 비타민의 발견이 한 예다. 헝가리 태생의 미국의사 조 골드버거는 펠라그라병 연구를 통해 정제곡류와 설탕이 이 병을 야기하고 현미와 통밀 등으로 구성된 식사가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연구논문을 통해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결과는 주목받지 못했다. 대신 1936년 막대한 양의 쌀겨에서 추출한 비타민 B1(*작은 1로)의 발견은 신문마다 대서특필됐다. 사람들은 당시 1파운드에 10센트 하던 현미 대신 그람당 400달러짜리 비타민을 사먹으라고 권장받았다. 비타민이 엄청난 돈을 버는 종교의 경지에 이르자 비타민의 최초 발견자인 폴란드 화학자 카시머 펑크는 이런 말을 남겼다. “비타민은 요술 같은 약이 아니다. …자연이 스스로 충분한 양의 음식을 생산하는데, 인간의 음식을 인공적으로 합성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자연이 우리에게 충분한 음식을 공급하고 있는데도 우리 스스로 합성한 식품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정말 우스운 생각이다.” 1929년 <식품법 위반의 역사>를 쓴 미국의 화학자 하비 와일리는 미국 농무성 화학분과를 책임지면서 설탕을 비롯해 카페인 등 각종 불법화학첨가물 덩어리였던 코카콜라를 식품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그러나 정부 최고위층을 동원한 코카콜라사의 로비로 법정은 코카콜라 쪽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쌍방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뒤 대법원은 결국 지방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와일리의 화학분과 손을 들어줬지만 그 사이 코카콜라사는 뉴욕 증시에 자사주식을 상장할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월드컵과 올림픽을 비롯한 세계적인 이벤트의 공식후원자가 되어 최후의 승자로 남아 있다. 와일리는 훗날 미식품의약국(FDA)에서 공식 발암물질로 인정한 사카린이 건강에 나쁘다고 대통령에게 직언한 직후(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담당 주치의의 권유로 설탕 대신 사카린을 복용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물러났고 화학분과는 해체됐다. 양심적 설탕 거부자에게 권리를… 지은이는 마약에 대한 관리가 엄격하며 비흡연자를 옹호하는 법조항와 문화가 일반화됐음에도 “양심적 설탕 거부자가 하루 종일 사는 것은 술취한 사람이 지뢰밭을 용케 걸어가는 것만큼이나 조마조마하다”고 말한다.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고, 초콜릿을 거부한다 해도 충치를 없애주는 치약에까지 부드러운 맛을 위해 설탕을 첨가하는 세상에서 설탕을 피해가기란 쌍둥이 빌딩 사이를 줄타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더프티는 1975년에 이 책을 썼다. 이 책이 출판된 지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코카콜라와 펩시, 네슬레 등 설탕으로 먹고사는 기업들은 더욱 규모를 불렸고, 설탕 소비량 역시 별로 줄지 않았다. 지은이가 제안한 대로 자연식을 직접 조리하며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다니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미래를 생각하면 어린 꼬마에게 상으로 사탕을 집어주는 건 당장 그만둘 일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