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만화의 ‘재미’ 속에 숨겨진 은밀한 메시지… 역사왜곡, 정치가의 망언보다 무섭네
회사원 김아무개(36)씨는 일곱살 먹은 딸이 이웃에서 빌려온 일본만화영화를 보고 소름이 끼쳤다. <반딧불의 묘>.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제작한 이 작품은, 두 일본인 남매가 2차 세계대전 중에 고생하다 죽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귀여운 여동생 세쓰코, 오빠 세이타, 어머니로 이루어진 이 가정은 공습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된다. 천진하기 짝이 없는 세쓰코가 굶어 죽어가는 과정은 눈물없이 볼 수 없을 만큼 절절하다. 1988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이제까지 미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돼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이 최루성 만화영화의 폭격에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김씨는 뒤늦게 안 것이다.
‘피해자’ 일본을 위해 눈물을 흘려라?
김씨가 <반딧불의 묘>를 보고 놀랐던 이유는, 일제의 만행을 배워온 자신조차도 어느덧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였다”라는 메시지에 공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특성은 디테일이 충실하다는 것인데, 세이타가 세쓰코를 위해 먹을 것을 훔치는 장면이라든가, 어린 세쓰코가 돌을 구워 오빠에게 먹으라고 권하는 장면이 눈물겹게 그려져 있어 관객의 누선을 자극한다. 배고픈 세쓰코가 빈 사탕깡통에 물을 넣어 마시면서 “사탕맛이 난다”며 웃을 때, 눈물이 핑도는 관객은 2차 세계대전의 시발자가 바로 일본이었다는 사실도, 그들이 점령했던 나라의 어린이들은 사탕깡통을 구경조차 못하고 황군의 창검에 죽어갔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게 된다.
<반딧불의 묘>처럼 읽는 이들에게 “나쁜 건 일본이 아니라 전쟁이야”라는 유의 메시지를 던지는 일본만화는 국내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일본만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메시지들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일본은 세계 유일의 피폭국가다, 일본 역시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다”라는 전쟁피해자론, 둘째는 “동아시아는 리더국가를 필요로 한다, 일본이 그 적임자다”는 대동아공영권론이다. 셋째는 “일본은 세계의 돈줄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다, 패전국가라는 이유로 타국가들에 너무 고분고분해왔다”는 일본위상 재고론이다. <시마과장>으로 유명한 히로카네 겐시의 <정치9단>은 이 세 가지 메시지를 모두 담고 있는 만화다. 정치 신인 가지 류우스케는 엘리트코스를 제대로 밟은 정치인 가문의 후계자로, 일본 정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려 하고 있다. 이 만화에서 주인공 가지는 대내적으로는 구태의연한 정계분위기를 쇄신하고, 대외적으로는 국제감각에 뛰어난 만능 정치인이다. 이러한 영웅이 데뷔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악역이 필요하다. <정치9단>에서 악역은 북한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일본은 한국처럼 북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십중팔구 미사일이 날아오겠지”라는 것이 일본 총리비서관의 의견이며, “‘가까운 시일 안에 북한이 한국의 국경을 넘어 침공해올 것이다’라는 정보도 들어와 있습니다”라는 것이 미 국무장관의 의견이다. 가지 류우스케는 “지금 일본의 아주 가까운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결론짓고, 이에 대한 회의를 소집한다. 이 회의에서 북한의 위협이라는 안건은 일본 헌법 개정이라는 안건으로 돌변한다. “북한이라는 태풍이 있으니 우리도 같이 토방을 쌓아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부자니까 일꾼들 밥값만 내겠다’라는 태도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헌법을 고쳐 일본이 공식적으로 군사력을 갖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다. 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승전국들은 일본이 다시는 침략을 위한 군사력을 갖지 못하도록 헌법에 정해두었다. 이는 세계평화를 위해서 일본이 다시금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9단>은 이를 왜곡한다. 젊은 영웅이 외치는 대동아 공영권
“일본의 헌법은… 세계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었을 때 만들어졌다…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일본은) 세계평화에 공헌할 수 없다”고 가지 류우스케는 말한다. 일본이 정규 군사력을 갖는 것이 세계평화에 공헌하는 길이라니 참으로 일본에 편리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이 밖에도 남북한에 대한 작가의 불편한 시각은 이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외무성 차관 가지는 일본을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만들기 위해 유엔회의에서 연설을 시도한다. 그러자 북한은 “일본은 아직 우리나라에 충분한 전후보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나라는 상임이사국이 되어선 안 됩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가지는 “전쟁에 관한 보상문제는 어디까지나 당사국간에 행해지는 것”이라며 일축한다. 북한의 반대 이유를 ‘보상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라고 축소해석하고, 마치 일본이 북한에 충분히 돈을 주면 국제사회에서 방해는 없어질 것이라는 식의 상황판단이다.
한국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은 마찬가지다. APEC회의에서 한국쪽은 “(일본이 북한에)멋대로 (쌀을) 지원한다면 한국의 입장이 난처해집니다”라고 불만을 표시한다. “일본이 한반도 분단을 획책하는 것이 아니냐”는 한국쪽의 항의에 일본쪽은 “당치 않은 소리!”라며, “인도적인 식량지원”이라고 말한다. 일본은 여기서 돈은 돈대로 쓰고 정치적 잇속도 굴리지 않는 인도적이고도 선한 국가로, 한국은 굶주린 동포에게 식량을 지원하는 것도 막는 국가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일본이 말하고 싶어하는 메시지를 서방의 거물들이 대신 말해준다는 것이다. <정치9단> 13권에서 미국의 국무장관과 통상차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생각에 일본은 지나치게 아시아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아요… 아시아 제국들이 원하는 것은 일본의 ‘반성하는 마음’이 아닌, 그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경제효과입니다. 한마디로 ‘그렇게 반성하고 있다면 말만 할 게 아니라, 돈으로 성의를 표시해라’는 식이죠.” 동아시아 국가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모욕적인 발언은 없다. 미 국무장관의 발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시아에는 리더십을 가진 나라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위험한 상태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일본이 아시아의 리더가 되어야겠지만, 일본 자체 내에 ‘과거’에 대한 죄의식이 너무 강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주장한 대동아공영권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작가가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사가 일본인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편리하게도 미국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다. 이로써 독자들이 이 발언이 마치 일본의 이기적인 의견이 아니라 국제사회 전반의 여론인 양 받아들이게끔 한다.
서방거물 입 빌려 강한 일본을 말하다
서방거물이 일본 입장을 대변해주는 것은 이케가미 료이치의 <빛과 그림자>(성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에서 미 대통령 크리프는 일본을 방문해, 차후의 미-일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예스, 노를 정확히 할 수 있는 관계야.” 이 어구는 일본 정치만화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어구다. 이 “예스 노를 명확히 할 수 있는 관계를 원한다”는 어구는 문자 그대로 “정확하게 의사소통하는 국제관계”만을 의미한다고 보기 힘들다. 이 개념은 10년 전쯤 일본열도를 강타한 베스트셀러 (이시하라 신타로)에서 원용된 개념으로, “일본은 이제 국제사회에서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뜻이다.
<빛과 그림자>에서는 또 “전쟁범죄자가 일본의 근대를 주도했다”라고 말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작품 10권에서 야쿠자 거물 첸 선생은 집권당 거물 하라 간사장을 은밀히 만나 이렇게 말한다. “그들(주인공들)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은, 패전 직후 이곳에서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이 아닌가? 그 수용소에서 당신과 나는 전범으로 만났지… 그리고 일본은 다시 회생해 현재에 이르렀고, 정치가 역시 최고로 정치다운 정치를 했던 시기이기도 하지.” 참고로 여기서 첸 선생이 “최고로 정치다운 정치를 했던 시기”라 함은 1955년부터 93년까지 38년간 보수우익 자민당이 집권했던 시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첸 선생은 여기서 “일본의 미래가 안 보여…”라면서 그 미래를 주인공 젊은이들에게서 찾는다. 주인공 용하운과 겐조는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지만 그들이 가진 비전은 결국 ‘새로운 헌법, 국제사회 속의 강한 일본’에 다름 아니다.
어이없는 ‘베트남 학살론’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입지가 좀더 높아져야 한다”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깔린 또다른 만화로는 <대사각하의 요리사>가 있다. 베트남 주재 일본대사의 요리사 고우는 선량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대사관 요리사와 요리대결에서 이겨 일본의 위신을 높이기도 하고, 베트남 거물에 요리를 만들어주어 베트남인이 갖고 있는 일본의 나쁜 이미지를 누그러뜨린다. 한마디로 “일본인도 알고보면 부드러운 사람들이에요”를 홍보하는 민간대사다. 그런데 이 작품의 61번째 에피소드 ‘물과 기름’은 한국인 입장에서 주목할 만한 소재를 다뤘다. 한 일본인 기자가 한국군의 양민학살을 밝히려고 하다가 베트남 공안에 구속된다.
이 배경에는 한국에서 파견된 공대사가 있었다. 이 일본인 기자가 양민학살을 추적하는 이유는 베트남 양민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흔히 아시아의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본의 잔학행위만 강조하잖아!… 그 20년 뒤에 아시아에서 똑같은 짓이 행해졌다고 하면 그건 특종일 거라고 생각했지”라고 말한다. 베트남전 양민학살에 대해 세계최초로 보도한 것이 한국 언론이었다는 점이 다행스러워지는 순간이다. 또한 이 일본인 기자는 “일본 정부는 그 일(일본의 한국침략)에 대해 사죄했을 텐데요”라고 말하며, “당신들 민족간의 싸움(6.25전쟁)으로 잃은 생명이 훨씬 더 많지 않습니까?”라고 공대사에게 따진다.
결국 이 만화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의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는 것으로 결론을 짓고, 공대사가 “유엔에 진출해서 미국의 독주를 막겠다, 지켜봐달라”고 약속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미국이라는 공적을 만들어 한-일간에 어설픈 화해를 이룬 셈이다.
이렇게 일본의 자국 이기주의가 드러나는 만화는 이외에도 많다. 모토카 무라카미의 <용>은 중국인 조씨의 입을 빌려 일제가 세운 괴뢰국가 만주국에 대해 평하는데,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인들은 자신의 지배자가 누구든 먹고살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라며, 일본은 단지 통치 방식이 서툴렀을 뿐이라고 말한다. 또 가와구치 가이지의 <침묵의 함대>는 핵잠수함 야마토의 원수 가이에다의 입을 통해 불안정한 세계를 평화로 이끌기 위해 무력으로 세계를 제압하는 군대가 필요하다며, 일본이 진정한 세계의 리더로 나서려면 핵잠수함 야마토의 국가적 주권을 인정하고 야마토에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랑스럽기에 위험한…
이토록 노골적인 주장들이 만화로 읽었을 때 쉽게 눈에 띄이지 않는 이유는 매력적인 캐릭터, 방대한 자료수집, 짜임새 있는 스토리 등이 눈을 현혹하기 때문이다. 또 작가가 일본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에 적이 되는 상대들은 대개 참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대사각하의 요리사>에서 일본인 기자는 한국대사 때문에 구속되고, <용>에서 중국인들은 중국에 대해 호의적인 일본인 용을 함부로 대한다.
일찍이 만화가 박재동씨는 일본만화 캐릭터들을 가리켜 “무서운 문화전사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사랑스럽기에 위험하다. 요리사 고우의 얼굴은 그 감춰진 메시지와는 달리 너무나 미끈하며, 젊은 정치인 가지는 파시즘의 아들로 보기엔 너무나 멋있다. 이제 한국의 부모들은 일본만화의 야한 장면보다 일본인의 그릇된 시각이 우리 아이들에게 은연중에 심어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시점이다. 귀여운 세쓰코와 세이타의 눈물은 어느 일본정치인의 망언보다 더 확실하게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민아 기자mina@hani.co.kr

(사진/2차세계대전중 죽어간 남매의 삶을 그려 관객들의 심금을 울린 <반딧불의 묘>. 그 이면에는 일본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는 메세지가 숨어있다)
<반딧불의 묘>처럼 읽는 이들에게 “나쁜 건 일본이 아니라 전쟁이야”라는 유의 메시지를 던지는 일본만화는 국내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일본만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메시지들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일본은 세계 유일의 피폭국가다, 일본 역시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다”라는 전쟁피해자론, 둘째는 “동아시아는 리더국가를 필요로 한다, 일본이 그 적임자다”는 대동아공영권론이다. 셋째는 “일본은 세계의 돈줄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다, 패전국가라는 이유로 타국가들에 너무 고분고분해왔다”는 일본위상 재고론이다. <시마과장>으로 유명한 히로카네 겐시의 <정치9단>은 이 세 가지 메시지를 모두 담고 있는 만화다. 정치 신인 가지 류우스케는 엘리트코스를 제대로 밟은 정치인 가문의 후계자로, 일본 정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려 하고 있다. 이 만화에서 주인공 가지는 대내적으로는 구태의연한 정계분위기를 쇄신하고, 대외적으로는 국제감각에 뛰어난 만능 정치인이다. 이러한 영웅이 데뷔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악역이 필요하다. <정치9단>에서 악역은 북한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일본은 한국처럼 북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십중팔구 미사일이 날아오겠지”라는 것이 일본 총리비서관의 의견이며, “‘가까운 시일 안에 북한이 한국의 국경을 넘어 침공해올 것이다’라는 정보도 들어와 있습니다”라는 것이 미 국무장관의 의견이다. 가지 류우스케는 “지금 일본의 아주 가까운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결론짓고, 이에 대한 회의를 소집한다. 이 회의에서 북한의 위협이라는 안건은 일본 헌법 개정이라는 안건으로 돌변한다. “북한이라는 태풍이 있으니 우리도 같이 토방을 쌓아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부자니까 일꾼들 밥값만 내겠다’라는 태도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헌법을 고쳐 일본이 공식적으로 군사력을 갖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다. 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승전국들은 일본이 다시는 침략을 위한 군사력을 갖지 못하도록 헌법에 정해두었다. 이는 세계평화를 위해서 일본이 다시금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9단>은 이를 왜곡한다. 젊은 영웅이 외치는 대동아 공영권

(사진/<정치9단>의 젊은 영웅 가지 류우스케는 일본이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정규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는 억지논리를 편다.또한 이 만화는 서방 거물들의 입을 빌려 일본 우익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사진/<침묵의 함대>는 핵잠수함 '야마토'를 탈취해 독립국가를 세우려 하는 가이에다의 입을 빌려 세계평화를 위해 무력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사진/<대사각하의 요리사>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의 양민학살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이 이야기는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정당화하는 어이없는 결말로 끝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