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속물들에게 ‘카운터 펀치’를!

414
등록 : 2002-06-19 00:00 수정 :

크게 작게

테리 지고프 감독의 <판타스틱 소녀백서>… 조롱·냉소에 비판적 감동 담아

미국판 ‘고양이를 부탁해’인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니드(도라 버치)와 레베카(스칼렛 조핸슨)가 지독한 아웃사이더이자 사회부적응증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게 정당방위에 가까운 태도라는 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판타스틱 소녀백서>(원제 고스트 월드, 6월21일 개봉)는 냉소주의의 깊은 뿌리를 유머로 발산하는 여유를 보인다. 또 주변 사람들을 죄다 속물 취급하면서 조롱하는 이니드와 레베카에게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게 만드는 솜씨가 탁월하다.

왜 <고양이를 부탁해>가 떠오를까

“스테이시가 로드와 잘까?”


“멋진 짝이야!”

“저 계집애 에이즈 숙주야, 조쉬.”

졸업 파티장에서 멋지게 어울리는 연인을 향해 내뱉는 이니드의 독설은 친구 조쉬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레베카와 함께 조쉬의 집을 찾아갔으나 그가 없자 이런 메모를 남겨둔다.

“조쉬에게. 너랑 하러 왔는데 집을 비우다니! 넌 게이가 틀림없어.”

짧게 끊어 치는 말투로 종횡무진 좌충우돌하지만, 그의 속내가 그리 못된 것은 아니다. 우연히 마주쳤던 금발 여자를 찾기 위해 광고를 낸 중년의 시모어(스티브 부세미)를 골려먹다가도 그의 선함과 독특한 개성에 동류의식을 갖게 된다. 시모어는 순해빠진데다가 말주변도 그저 그래서 여자와는 좀체 인연을 맺지 못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재즈와 블루스를 지독히 사랑하는 취향이 있어 흘러간 명곡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니드의 맘을 조금씩 움직이게 한다. 급기야 20여년의 나이차를 넘어서는 듯 가까워질 때, 이니드는 훌쩍 떠나버린다.

쏟아지는 유머 덕에 킬킬거리며 화면을 좇다 보면 어느덧 이니드와 시모어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된다. 테리 지고프 감독은 지적인 카타르시스 혹은 비판적 감동을 만들어내는 데 확실한 재주를 가졌다. 이미 그는 언더그라운드 만화작가 로버트 크럼에 대해 경의를 표한 다큐멘터리 <크럼>과, 잊혀졌던 블루스 뮤지션을 발굴해낸 다큐멘터리 <루이 블뤼>를 선댄스영화제에 선보이면서 스타로 떠올랐다. <…소녀백서>는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만화작가 대니얼 클라우즈의 <고스트 월드>를 원작으로 했다.

“대니얼은 상당히 예리하고 비판적인 눈을 지녔다. 꽤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의 작품이 선정적이고 허무주의적이며 염세적인데다가 신성모독까지 겸했으며, 지나치게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라고 비난해왔다. 내가 이런 사람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감독이나 대니얼 클라우즈는 모두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은 각색 작업에만 2년이란 시간을 쏟아부었다.

로맨스까지 갖춘 블랙코미디 성장영화

사진/ <판타스틱 소녀백서>는 현대인의 속성을 유머로 파헤치며 지적인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현대 미국사회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교조적인 것은 아니다. 이니드의 미술 보충수업 교사인 로베르타는 창조적 개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그를 통해 디테일을 갖춘 예술적 실천보다 관념과 개념으로 가득 찬 현대미술의 허영을 아프게 꼬집는다. 찻잔 속에 생리대를 넣은 학생의 작품을 보고, 억눌린 여성의 쇼킹한 이미지를 담았다고 과도한 해석을 내리면서 흥분하는 교사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식이다. 영화는 먹물근성도 속물근성도 모두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요즘 영화들의 한 특징이라면 몇 가지 장르를 복합적으로 쓰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소녀백서>도 블랙코미디와 성장영화, 로맨스까지 고루 갖추고 있지만, 이는 편집증과 소외감, 냉소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처지를 보여주기 위한 적절한 장치로 쓰였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