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의 거장 마야자키 하야오의 꿈을 새긴 지브리 스튜디오
“‘돼지 꼬리는 오른쪽 왼쪽, 어느 쪽으로 감기지’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돌연한 질문에 스태프들이 곤혹스러워한다(2000년 7월13일)”, “돼지 정면 얼굴의 자료를 찾으라는 미야자키의 지령을 받는다. 직접 양돈장에 가는 안도 나왔지만 작화부 스태프가 돼지를 찍은 비디오가 있어…(2000년 7월27일)”, “작화에 참고하기 위해 돼지를 취재하러 간다.(2000년 7월31일)”.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최우수작품상(금곰상)을 받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6월28일 개봉)의 제작일지 일부는 하나의 완벽한 판타지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치밀한 현실의 관찰이 필요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순전한 허구의 세계인 듯 보이는 <센과 치히로…>의 공간 또한 현실에서 그 상상의 단초를 빌려왔음은 마찬가지다. 다테모노엔이라는 우리로 치면 남산 한옥마을쯤에 해당할 공원에 있는 에도시대의 건축물들이 모델이 됐다. 미야자키의 중요한 창작 비밀의 하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애니메이션에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가 예사로 그려지지 않는 까닭이 절로 이해가 간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은 예술가의 천재성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새삼스레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영화와 삶이 일치된 공간에 들어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즐겨찾는 다테모노엔에서 걸어서 30분 거리. 도쿄 교외의 고가네이시 주택가에 자리잡은 아담한 흰색 목조건물. 이곳이 바로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시작해 <이웃집 토토로> <추억은 방울방울> <원령공주> 같은 재패니메이션의 수작들의 모태가 된 지브리 스튜디오다. 이 건물은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처럼 자연친화적이다. 담쟁이와 키 큰 나무들로 인근 주택가에서 이곳만이 유난스럽게 푸르다. 푸르기는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그의 아틀리에 ‘니바리에’가 더하다. 온통 나무로 둘러싸여 있는데다 외벽을 녹색으로 칠한 이 집은 동화의 제목처럼 ‘숲 속의 나뭇잎집’으로 보인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고유한 특징으로 꼽히는 ‘식물묘사의 치밀함’은 그러니까 그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배태된 것이 아닐까? 진실한 거장들이 그러하듯 그에게 영화와 삶은 결코 둘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언급한 대로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자연 묘사는 극사실화에 가깝다. 하지만 분업과 효율을 중시하는 상업 애니메이션에서는 식물의 생태계를 제대로 묘사할 수 없다. 일반적인 재패니메이션에서 나무와 숲은 단순한 기호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미야자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들며 그 한계를 통감했다.
자연의 묘사만이 아니다. 60년대 이후 텔레비전 시리즈물에 치중하던 메이저 스튜디오의 시스템은 그가 원하는 영화를, 원하는 방식대로, 원하는 기간 안에 끝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미야자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성공 이후, 그와 같은 절망을 느꼈던 또 한 사람의 애니메이터 다카하다 이사오와 함께 지브리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출판사 도쿠마쇼덴이 출자한 단돈 500만원을 출자금 삼아. 지브리의 입지를 굳혀준 사건은 <천공의 성 라퓨타>(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다카하다 이사오 제작)의 성공. 이어 두 사람은 제작과 감독을 번갈아가며 잇따른 성공작들을 내놓았다. 사하라 사막에 부는 뜨거운 바람이란 지브리(ghibli)의 뜻대로 이들은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나아가 세계 애니메이션계에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지브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다 이사오, 두사람의 상상력을 마음껏 현실화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돼주었다. 그러니까 지브리는 두 사람을 위한 ‘꿈의 공장’인 셈이다. 이곳에서 미야자키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지브리 스튜디오 설립에 참여한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는 다음과 같이 지브리의 존립 기반을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이 작업한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재능 있는 한 사람의 생각이 공동작업으로 구체화될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 월트 디즈니의 미국식 애니메이션에는 바로 그 ‘한 사람의 재능’이 없다.”
감독의 의도를 충실하게 살리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과 함께 지브리가 지금껏 고집해온 또 다른 창작 원칙 가운데 하나는 애니메이션은 손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전체 직원 150명 가운데 60명이 작화실에 속한 인적 구성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브리도 <원령공주> 때부터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채색이나 데이터의 보존, 손으로 그리기가 불가능한 극히 일부 장면에서만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다. 그림을 컴퓨터로 그리는 일은 절대로 없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약 10만장이 이렇게 손수 그려졌다.
도쿄 도미타카시 이노바시라 공원 안에 터를 잡은 지브리 박물관에는 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원화 전량의 뭉텅이가 유리상자 안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종이들 위에는 베를린영화제에서 수상한 금곰상이 놓여 있다. 마치 아이들에게서 온 것을 아이들에게 돌려준다는 듯이.
손으로 작업한 삽화와 토토로의 인형들
정말 이곳은 미야자키의 꿈이 총화된 아이들의 천국이다. 아이들이 길을 잃고 헤매도록 의도한 박물관 내부의 기본 설계에서 애니메이션 제작과정을 보여주는 전시실까지 모든 것이 아이들을 위해 준비되었다. 아이들이 만지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미야자키가 그린 애니메이션 원화들까지 아이들의 손이 닿도록 전시되어 있다. 아이들은 이 박물관을 관람하는 게 아니다. 그냥 논다. 뭐니뭐니해도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2층에 있는 고양이 버스. <이웃집 토토로>에 나왔던 그 고양이 버스의 푹신푹신한 느낌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제작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는 이 버스는 12살 미만의 아이들만 탑승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일대에는 역시 <이웃집 토토로>에 나왔던 숯검댕이 인형이 널려 있다. 아이들은 그것을 던지며 논다.
숱한 인터뷰에서 미야자키는 “아이들이 보고 즐거워할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10살 된 친구 딸을 위해 만들었다고 했다. 이제 미야자키의 남은 꿈은 “1만평의 대지를 구입해 아이들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마을을 만들고 그 가운데 보육원을 짓는 것”이다. ‘살아있는 세계의 거장’이라고 어른들이 근엄하게 생각했던 미야자키는 정작 아이들에게는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 담벽 없는 아이들 나라의 왕이었다.
도쿄=이유란 기자/ 씨네21부 fbird@hani.co.kr

사진/ 다테모노엔 안에 있는 일본 전래의 공중 목욕탕 앞에 선 미야자키 하야오와 <센과 치히로…>에서 센의 목소리를 연기한 실제 소녀.

사진/ 지브리 스튜디오 1층에 자리잡은 작화실 내부. 그림을 컴퓨터로 스캔받아 채색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애니메이션 제작과정을 보여주는 5개의 방 가운데 하나. 초록 인형들은 애니메이터들의 마감강박증 등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진/ 박물관에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 아이들은 고양이 버스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숯검댕이를 던지며 신나게 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