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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미술, 그 이상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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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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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삶을 동시에 살찌우게 할 ‘공공미술’, 작가와 기획자들의 치열한 관심을

공공미술은 그렇게 새롭거나 특별하게 색다른 미술이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그 자리를 지켜오던 미술의 모습들이 공공미술이다. 당연히 이 미술의 자리를 복원하고 좀더 적극적으로 그 위상을 자리매김하는 것이 우리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공공미술과 환경조형물은 동의어가 아니다

사진/ '코뮤너티오브엔젤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대표국인 공공미술 전시단체다. 이 단체는 예술, 경제, 교육, 엔터테인먼트 등에 고루 참여하고 있다. 지난 4월 중순부터 열리고 있는 전시회 모습들.
요즈음 우리 미술계에서 공공미술을 환경조각 또는 환경조형물과 혼돈하여 동의어처럼 사용하거나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런 공공미술의 몰이해는 일면 맞기도 하다. 공공미술의 큰 테두리 안에서 구별할 수 있는 하위개념들 중 분명 환경조형물이 하나의 카테고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공공미술은 벽화(벽화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벽화와 낙서와 같은 그래피티로 나누어 공공미술의 일면을 차지한다.), 각종 조형물과 그 디자인들 그리고 환경조각 또는 환경조형물과 거리조각들, 조경과 건축까지 아우르는 구체적인 미술형식을 취하면서 한편으로 테마 이벤트와 지역사회의 주민참여형 프로그램까지 포괄한다. 따라서 공공미술이라고 할 때 우리는 미술이라는 외연을 크게 확장하여 생각해야 하고 사회적 효용성을 적극적으로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공공미술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미술 또는 예술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충분하게 토의해야 한다. 한 가지는 미술(또는 예술)이 작가 개인의 온전한 자발성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요구사항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표현할 수 있는지 그 사회적 파트너십에 대해 진지하고 심도 있는 사전 협의가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는 공공영역에서 요구되는 공공장소성을 작품이 스스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측면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이다. 거리에 놓인 조각은 조각작품이기 전에 통행에 지장을 주는 방해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공미술의 실천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다양한 논의에 대하여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가와 기획자 그리고 수용자(일반시민과 후원·협찬 기업 또는 관공서를 포함한)는 공공미술(예술)에 대하여 얼마나 적극적인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우선 합의를 해야 한다.

우리 미술계에서는 공공미술을 마치 거대한 프로젝트로 구성되어 거대 조형물을 세우는 일로 착각하는 경우가 왕왕 있음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런 피상적 이해와 공공성에 대한 충분한 논의 없이 진행되는 단순한 미술품의 거래방식은 그 결과가 환경조형물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공공미술의 영역 밖의 일이 되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중 간과할 수 없는 중요 공공미술 영역이 조경사업을 통한 공원 꾸미기다. 여의도 공원처럼 거대한 공원부터 동네 놀이터를 리노베이션하는 작은 공원까지 관이 주도하는(기획·입안하고 사업을 진행하는 전반적인) 프로젝트는 아쉽게도 공공성을 그 외연이 유지하고 있으되 공정의 공공성이 박탈당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논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자

공공미술의 실천에는 우선 시민사회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다양한 견해들에 대한 취재와 논의 그리고 협의와 합의를 통하여 서로가 무엇을 성취하고 실천할 수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절차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공공미술은 거대 자본이 선물하거나 계획된 프로젝트를 통해 사회가 수집하여 진열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과도기에 처한 우리 미술에서의 공공미술은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다(미국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거대 자본의 적극적인 기부문화를 통해 공공미술의 형식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아마도 미국적 문화특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점은 일반론으로 공공미술을 규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좀더 충실하게 작가와 기획자는 자신들의 작업이 굳이 공공미술의 형식을 취하게 될 때, 주변에 대한 논의 안에 풍덩 들어가 기꺼이 그 지루한 논란의 늪에서 허우적거려야 한다. 그 늪에서 몸을 겨우 뺄 때, 우리 미술계에서 공공미술은 하나의 대안이 되어 미술과 삶을 동시에 살찌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섭/ 미술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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