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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비극에도 ‘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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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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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무협극’에 담긴 살기등등한 생존의 현장, 조광화의 <생존도시>

사진/ 폭력미학을 통해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주고, 배우의 매력을 극대화 함으로써 연극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연출가 조광화씨.
파괴적인 열정의 기운이 느껴졌던 전작 <남자충동>처럼 연출가 조광화(37)씨는 스스로를, 연극 내부를 ‘파괴’하고 있다. 한없이 자기 안으로 침잠하면서 어느덧 문약해진 연극계, 그리고 “연출 중심의 연극이 배우를 외면하고 그림 만들기에만 몰두”하느라 관객을 쫓아낸 현실이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배우의 몸과 연출가의 머리가 근사하게 만난 <생존도시>(6월23일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02-763-9784∼6)는 이에 대한 조심스런 처방인 셈이다. 불과 3∼5분 정도로 짧게 끊어가는 장면들은 CF적 효과를 발휘하고, ‘판타지 무협극’이란 형식에 맞춤하도록 정교하게 합을 이룬 검객들의 액션은 강렬하다. 게다가 로커 빅토르 최와 윤도현의 비장한 사운드는 뮤지컬적 효과까지 낸다. 그 속에서 배우들은 격렬하게 뛰어논다. 배우의 몸이 살아움직일 때, 그 무대가 주는 시청각적 쾌감은 꽤나 자극적이다.

연극은 연극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

형식보다 더 살기등등한 건 생존의 벼랑에 내몰린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비극의 이어짐이다. 오염된 땅과 강이 더 이상 먹을 것을 생산하지 못하자 ‘생존도시’는 인간 개개인을, 가족을 처절하게 유린한다. 젖이 나오지 않는 어미는 자기 살을 도려내 아기를 키워야 하고, 아직은 순수한 10대들을 모아 대안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려는 짱은 제 아비를, 친구의 어미를 죽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죽고 죽임의 연속된 장면 그 자체가 무협 액션을 왜소하게 만들 지경이다. 폭력의 미학? 혹은 폭력에 대한 탐구?


“진짜 폭력과 이데올로기화된 가짜 폭력이 있다. 인디언이 생존을 위해 벌이는 사냥이 전자라면, 가죽상품을 만들기 위해 행해지는 대량 사냥은 후자다. 영화 <친구>에서 건달과 권력이 친구라는 이름으로 이상하게 결합하는 모습도 후자에 해당한다. <생존도시>에서는 언제 사랑이 떠나갈지, 언제 자식이 나를 배신할지 모르는 이상한 불안감에 휩싸인 도시의 상실감을 폭력성으로 치환해 직시하고자 했다.”

수많은 캐릭터 중에 사건에 개입하면서도 관찰자적 태도를 취하는 특이한 인물이 ‘박쥐’다. 악마적이나 우울하고 고독한 영웅이다.

“강한 생존력으로 강자가 된 박쥐는 약한 자들끼리 살아남으려 치고 박고 싸우는 현장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살아남은 자의 철학’을 형상화한다. 일종의 영웅인데, 영웅은 사실 수많은 자를 죽임으로써 탄생한다. 그래서 우리 편일 때는 의인이지만, 상대편일 때는 더없는 악한이 된다.”

그렇다고 연출가가 삶을 부정하거나 회의 일변도인 건 아니다. 높아가던 긴장감을 순식간에 웃음으로 풀어주는 염소라는 캐릭터처럼, 똥을 먹어도 살아갈 수 있고, 덤으로 남에게 먹을 젖까지 만들어주는 그런 삶을 찾고 싶어한다.

연극만으로 생계조차 쉽지 않은데도 연극의 운명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게 연극인의 숙명인가보다. “지난해 여름 한강변에 자전거를 타러 갔다가 밝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고 일종의 충격을 받았다. 스스로의 한계에 갇혀 어두운 연극을 되풀이하는 현실을 반성하게 됐다. 밝은 열정의 연극도 가능하겠구나, 어두운 얘기를 해도 장엄함으로 다가오며 비극의 멋을 느낄 수 있는 연극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배우 매력 극대화하는 연극 만들고파”

그 욕망이 아귀다툼하는 도시의 삶을 직시하게 만들고, 배우의 몸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려는 <생존도시>로 나타났지만, 여의치는 않다. “아주 잘되지도 그렇다고 부진하지도 않은” 흥행 사이로 관객들의 반응이 열광적이기는 하지만 1억원을 훌쩍 넘긴 제작비를 회수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건 배우다. “이 연극에 1년 동안 정열을 쏟아부은 배우들이 뭔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연극계 안에서도 이 작품을 낯설어하는 것 같다. 배우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연극을 계속 만들고 싶지만 자꾸 걱정이 앞서는 건 이 때문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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