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군주제도 건너뛰고 공화제로 직행… 대중 지지 못 받고 고종 죽음까지 겹쳐
일제의 억압에서 우리가 해방되었을 때 유력한 정치세력은 한결같이 공화제 도입을 지지했다. 새로이 어떤 정치체제의 국가를 세울 것인가 하는 초미의 관심사에서 사회주의적 공화제인가 자본주의적 공화제인가가 문제였지, 왕정의 복고나 입헌군주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채 10년이 되지 않아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도 왕정의 복고나 입헌군주제의 채택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왜 500년 왕조가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국가를 세울 때 전제왕정의 부활이나 하다못해 입헌군주제도 의제로 상정되지 못한 것일까? 민주공화제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준비가 그만큼 철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무식한 나라엔 입헌군주제가 낫다?
입헌군주제라는 새로운 방식은 1880년대부터 <한성순보> 등을 통해 간간이 소개되었지만, 이 제도의 도입을 하나의 운동으로 추진한 것은 1890년대 말의 독립협회였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일부 지식인들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입헌군주제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고 그 제도에 대한 이해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래도 1900년대 중반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 室文集)이 국내에서 널리 읽히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고 신문·잡지·교과서 등에서 입헌군주제를 비롯하여 전제군주제와 공화제의 정체가 자주 논의된 것도 1905∼06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바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우리의 국권을 본격적으로 침략해오던 시기였다. 이런 때에 입헌군주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이 제도가 국권의 침탈을 막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 일본이 강대한 청나라와 러시아를 격퇴한 것은 바로 입헌통치로 인민의 권리를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호함으로써 애국심이 생겼기 때문이라거나 일본이 서양의 풍조를 먼저 본받아 입헌정치로 동양의 패권을 독점할 수 있었다는 인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서구 열강이나 일본이 부강하게 된 근원을 입헌정치에서 찾은 것이다. 당시의 입헌군주제 논의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개신유학자들 중에 이 이론을 수용한 사람이 상당히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입헌군주제를 군주제를 유지하면서 유교정치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군민동치(君民同治)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개신유학자들은 입헌제를 중국 고대의 제도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국가 멸망의 원인이 전제정치에 있다고 보았고, 입헌정치의 불가피성이 명확해지는 상황에서 입헌제를 중국의 삼대(三代)시대의 정치제도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와 같은 개신유학자들의 입헌제 수용은 유인석(柳麟錫) 등 위정척사파들이 망국의 근본원인을 개화로 인식하고 개화의 실체를 서법(西法)으로 보면서 공화제와 입헌제를 싸잡아 비판한 것과는 분명히 다른 태도였다. 그런데 역사는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를 거쳐 민주공화제로 단선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을사조약을 전후한 시기, 입헌군주제에 대한 논의는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공화제에 대한 논의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루어지기도 했다. 일찍이 독립협회는 “자유나 민권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민권을 주어 하원을 설치하는 것은 위태하다”면서 “무식한 나라에서는 군주국이 민주국보다 견고”하다고 하여 민중들의 국정참여에 반대하였다. 유길준(兪吉濬)도 입헌군주제를 시행해야 하는 이유를 프랑스혁명을 예로 들면서 무지한 인민의 소란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막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입헌군주제를 소개하는 데 앞장선 원영의(元泳義) 같은 논객은 민중의 우매성 때문에 입헌군주제조차 즉각적으로 시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당시의 지식인들이 주장한 입헌군주제는 의회를 통해 군주의 절대권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것을 추구하기는 했으나, 그 의회는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민주적인 의회는 분명 아니었다. 1910년 이전, 공화제 주장 거의 없어 중국의 경우 청 왕조는 만주족에 의해 수립된 정복왕조였다. 따라서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한족에 의한 공화혁명을 이루려는 운동은 당시 중국민족주의의 요구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었다. 중국에는 공화제와 민족주의가 쉽게 결합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조선 왕조의 왕실, 또는 대한제국의 황실은 민족주의적 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무능이 비판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정통성을 쉽게 부인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실제로 개항기에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위기 앞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세력들은 낡은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출발을 꾀하기보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충군(忠君)을 내세우며 근왕주의(勤王主義)적 태도를 보였다. 1894년 농민혁명 당시의 전봉준이 그랬고,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또 그랬으며, 문화계몽운동에 참여한 신지식인들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1910년 이전, 공화제에 대한 논의나 공화제를 실시하자는 주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비록 일제의 침략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었다 해도 엄연히 군주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는 논의는 쉽지 않았다. 중국에서도 공화주의운동이 해외의 화교들에 의해 주도되었듯이, 해외, 특히 미국 동포들이 공화제도를 적극 주창하였다. 물론 미국 동포들 중에도 대동보국회는 보황주의(保皇主義)의 입장에서 입헌군주제를 지지하였지만, 공립협회(共立協會)는 좀더 적극적으로 전제정치의 폐습을 비판하면서 공화주의를 거론했다. 그러나 공립협회도 이 시기에 군주를 부정하고 국민국가를 수립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공립협회와 연결된 신민회(新民會) 관련 일제 자료에 공화주의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만, 많은 학자들은 자료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3·1운동 이전 1910년대의 독립운동에서는 대한제국의 부활을 바라는 복벽주의(復 主義)나 최소한 입헌군주제의 실시를 통해 군주제를 유지하려는 보황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복벽주의의 대표자는 척사론의 맥을 이은 의암 유인석(毅庵 柳麟錫)이었다. 그는 돌아오지 않은 밀사 이상설(李相卨) 등과 더불어 고종을 연해주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병운동을 일으킨 임병찬(林炳瓚)이 주도한 대한독립의군부 역시 입헌공화론은 내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황제를 복위시키고, 황제의 명에 의해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적 질서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광복시키려 한 것은 국가와 제정만이 아니라 “강상의 대륜”(綱常의 大倫)도 포함되어 있었다. 천황이 오래 간 이유
복벽운동의 한계는 척사유생들이 지배층의 입장에서 민중들을 향약으로 대표되는 구질서 속에 묶어두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일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의병전쟁 기간에 척사의병장들은 발군의 전투력을 과시한 평민의병장들을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양반능욕죄로 처형하기도 했으며, 의병군 내에 들어와 있던 동학 농민군 잔여세력을 색출하여 처형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전통적 신분질서를 강조하는 복벽주의자들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기는 어려웠다.
한 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복벽론자들이 군주제로의 복귀를 바라기는 했지만, 그 군주제가 전제군주제는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 개화파나 입헌군주제 지지자들이 메이지 치하의 일본을 모델로 삼았다면, 복벽론자들은 일본의 막부제를 본받고 싶어했다. 일본의 막부제에서 실권은 ‘장군’이 장악했고, ‘천황’은 완전히 잊힌 존재였다. 일본에서 ‘천황’의 가문이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자랑’할 수 있게 된 비밀도 여기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의 ‘천황’ 가문이 이어진 것은 위대하거나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힘없이 뒷방으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다스린 중국에서 왕조의 교체 주기는 200∼300년이었던 반면, 국왕이 다스린 한국에서 왕조의 교체 주기는 500년이었고, ‘천황’이 다스린 일본에서는 ‘천황’가의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만약 일본의 ‘천황’이 중국 ‘황제’에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조선 ‘국왕’에 버금가는 권한을 행사하였다면 만세일계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조선 국왕의 권한은 중국의 황제권에 비하면 대단히 약했지만, 그 권한은 동등한 영주들 중 서열 1위(first among equals)에 불과한 서구 봉건국가의 국왕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강력했다. 일본 막부제 아래서 ‘천황’의 권위와 권한은 조선시대의 국왕은 물론이고, 개명군주제 또는 외견적(外見的) 입헌군주제 형태의 메이지 시대의 일본이나 프로이센의 입헌군주의 권한에 비해 훨씬 약했던 것이다. 복벽론자들이 추구한 모델에 따른다면 대한제국이 복원된다 하더라도 황제는 명목상의 군주일 뿐, 실권은 대신들이 장악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기 정도전과 뒷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의 대립에서 보인 왕권과 신권의 대립에서 신권이 극대화된 형태를 복벽론자들은 꿈꾸었던 것이다. 물론 신권의 극대화 아래에서 민권이 설 자리는 없었다.
한편 1915년에 이상설을 중심으로 결성된 신한혁명당 역시 고종을 국외로 탈출시켜 신한혁명당의 당수로 옹립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이 당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이상설 이외에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 유동렬(柳東說) 등 뒤에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신규식은 중국의 공화주의 혁명인 신해혁명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이상설 역시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을 견지해온 인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의 휘하에서 배출되었는데 1915년 당시에는 보황주의적인 입장으로 돌아가 고종의 망명을 추진한 것이다. 이들은 당시 1차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판단하고, 그렇게 되면 중국에서 일본과 독일의 이해가 충돌하여 독립전쟁이 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 독립전쟁에서 조선의 동맹국은 중국과 독일이 될 것인데, 독일이나 위안스카이(袁世凱)에 의해 제정이 부활된 중국이 모두 군주국이기 때문에, 공화주의를 정강으로 채택하는 것은 불리하기 때문에 고종을 운동의 맹주로 추대하려 한 것이었다.
'대동단결선언'의 공화주의적 지향
우리 독립운동에서 공화주의적 지향이 명확하게 제시된 것은 이미 세상을 떠난 이상설 이외에 신한혁명당의 핵심인물들인 신규식·박은식 등에 조소앙(趙素 ) 등이 가세하여 1917년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이다. 이 선언의 서명자들은 융희 황제(순종)의 주권포기는 군주의 주권포기일 뿐으로, 한인이 아닌 일본에 대한 주권 양여는 근본적인 무효이며, 순종의 주권 포기는 우리 국민 동지들에 대한 묵시적 선양이기 때문에 주권은 국민에게 상속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선언은 3·1운동 직후 공화주의가 전면에 제기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대동단결선언’이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3·1운동 직후 수립된 임시정부가 입헌군주제도 건너뛰고 별다른 반대 없이 공화제로 직행할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왕정의 복고를 추진하든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든 간에 국민의 통합의 구심역할을 할 정통성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순종의 경우 건강상태, 즉 독살음모의 후유증으로 인해 정상적인 군주, 또는 입헌군주의 역할을 수행할 만한 처지에 있지 못했다. 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 영친왕이 있었지만, 그는 여덟살 어린 나이에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일본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국민의 기대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뜨자 복벽운동이나 입헌군주제 운동은 구심점을 잃고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적인 이유, 그리고 이씨 왕가가 독립운동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임시정부를 건립할 때 공화제 헌법의 채택에는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일제의 통치하에 있던 일반 조선인들에게 공화제의 의미가 얼마만큼 침투될 수 있었는지는 극히 의문이 아닐 수 없다.
1919년 11월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전협(全協)을 단장으로 하는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 고종의 둘째아들인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망명을 시도하여 이강 공이 신의주 건너 중국 안동(安東)에서 체포된 것은 이왕가의 인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에 직접 관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대동단이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한 것 때문에 대동단을 복벽주의 단체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대동단은 의친왕을 망명시켜 상해임시정부에 가담시키려 한 것이다. 순종이 살아 있고, 또 영친왕이 건재한 상황에서 왕위계승권에서 한발 비켜 서 있는 의친왕을 내세워 대한제국의 부활을 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승만과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
이미 임시정부에서 공화제를 채택하고, 또 민족해방운동 세력 모두가 왕정의 복고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1948년 이남에 단독정부가 수립될 때 공화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정치제도였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말기에 보면 일본에 유학 중인 학생들이 “이왕가를 매국의 책임자로서 처단하고 입헌공화국을 세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1948년 이남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 이승만은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의 귀국을 바라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그 헌법에서 구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 물론 이에 대한 반대도 상당히 있었다- 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영친왕이 대한제국 황태자 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황태자가 아닌 자연인 이은(李垠)의 귀국을 막은 것은 이승만의 제왕적·봉건적 사고방식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전주 이씨로 태종의 큰아들인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만은 셋째아들 세종의 후손이 대대로 왕노릇하다가 급기야 나라가 망한 것을 못마땅히 여겼다고 한다. 이승만이 미국 유학시절,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미국인들에게 조선의 왕족인 ‘프린스 리’로 행세한 것이야 젊은 날의 치기로 보면 그만이지만, 이은을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로 여겼다는 사실은, 그리고 이은이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민주공화제를 시행하기 위한 기반이 취약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양녕대군의 후손 이승만은 효령대군의 후손 이기붕(李起鵬)을 후계자로 점찍고, 그 아들인 강석(康石)을 양자로 삼았다가 이기붕 일가의 비극적인 자살을 가져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주공화제가 채택되어 우리 역사에서 형태상의 군주제는 완전히 사라져버렸지만, 지난 50년간의 ‘민주공화제’ 실험에도, ‘군주제’가 내용적으로 극복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현재의 김대중 대통령은 과거의 독재자들에 비하면 형편없이 권한이 축소되었음에도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런 비판을 하는 자들이 과거 군사독재 시기의 ‘제왕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제왕’으로 군림한 독재자들에 대한 비판은 고사하고, ‘제왕’으로 떠받들기에 앞장섰던 자들이라는 점은 역겨운 일이다. 그러나 ‘가신정치’가 계속되는 권력 핵심의 분위기며, ‘대군마마’들이 사기꾼과 어울려다녀도 제대로 쓴소리한 사람이 없었던 것을 보면 그런 비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불행한 일이다. 역사학도의 노파심에서 한 가지 더 보태고 싶은 것은 왕조시대의 제왕보다 현대의 대통령이 훨씬 더 큰 권한을 행사하고, 훨씬 더 많은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제왕들은 지금과는 달리 정부 내에서 관료들의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사진/ 조선조의 마지막 왕가. 왼쪽부터 황태자 영친왕, 순종, 고종, 순종비, 덕혜옹주.
이 시기는 바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우리의 국권을 본격적으로 침략해오던 시기였다. 이런 때에 입헌군주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이 제도가 국권의 침탈을 막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 일본이 강대한 청나라와 러시아를 격퇴한 것은 바로 입헌통치로 인민의 권리를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호함으로써 애국심이 생겼기 때문이라거나 일본이 서양의 풍조를 먼저 본받아 입헌정치로 동양의 패권을 독점할 수 있었다는 인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서구 열강이나 일본이 부강하게 된 근원을 입헌정치에서 찾은 것이다. 당시의 입헌군주제 논의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개신유학자들 중에 이 이론을 수용한 사람이 상당히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입헌군주제를 군주제를 유지하면서 유교정치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군민동치(君民同治)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개신유학자들은 입헌제를 중국 고대의 제도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국가 멸망의 원인이 전제정치에 있다고 보았고, 입헌정치의 불가피성이 명확해지는 상황에서 입헌제를 중국의 삼대(三代)시대의 정치제도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와 같은 개신유학자들의 입헌제 수용은 유인석(柳麟錫) 등 위정척사파들이 망국의 근본원인을 개화로 인식하고 개화의 실체를 서법(西法)으로 보면서 공화제와 입헌제를 싸잡아 비판한 것과는 분명히 다른 태도였다. 그런데 역사는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를 거쳐 민주공화제로 단선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을사조약을 전후한 시기, 입헌군주제에 대한 논의는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공화제에 대한 논의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루어지기도 했다. 일찍이 독립협회는 “자유나 민권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민권을 주어 하원을 설치하는 것은 위태하다”면서 “무식한 나라에서는 군주국이 민주국보다 견고”하다고 하여 민중들의 국정참여에 반대하였다. 유길준(兪吉濬)도 입헌군주제를 시행해야 하는 이유를 프랑스혁명을 예로 들면서 무지한 인민의 소란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막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입헌군주제를 소개하는 데 앞장선 원영의(元泳義) 같은 논객은 민중의 우매성 때문에 입헌군주제조차 즉각적으로 시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당시의 지식인들이 주장한 입헌군주제는 의회를 통해 군주의 절대권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것을 추구하기는 했으나, 그 의회는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민주적인 의회는 분명 아니었다. 1910년 이전, 공화제 주장 거의 없어 중국의 경우 청 왕조는 만주족에 의해 수립된 정복왕조였다. 따라서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한족에 의한 공화혁명을 이루려는 운동은 당시 중국민족주의의 요구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었다. 중국에는 공화제와 민족주의가 쉽게 결합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조선 왕조의 왕실, 또는 대한제국의 황실은 민족주의적 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무능이 비판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정통성을 쉽게 부인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실제로 개항기에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위기 앞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세력들은 낡은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출발을 꾀하기보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충군(忠君)을 내세우며 근왕주의(勤王主義)적 태도를 보였다. 1894년 농민혁명 당시의 전봉준이 그랬고,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또 그랬으며, 문화계몽운동에 참여한 신지식인들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1910년 이전, 공화제에 대한 논의나 공화제를 실시하자는 주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비록 일제의 침략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었다 해도 엄연히 군주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는 논의는 쉽지 않았다. 중국에서도 공화주의운동이 해외의 화교들에 의해 주도되었듯이, 해외, 특히 미국 동포들이 공화제도를 적극 주창하였다. 물론 미국 동포들 중에도 대동보국회는 보황주의(保皇主義)의 입장에서 입헌군주제를 지지하였지만, 공립협회(共立協會)는 좀더 적극적으로 전제정치의 폐습을 비판하면서 공화주의를 거론했다. 그러나 공립협회도 이 시기에 군주를 부정하고 국민국가를 수립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공립협회와 연결된 신민회(新民會) 관련 일제 자료에 공화주의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만, 많은 학자들은 자료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3·1운동 이전 1910년대의 독립운동에서는 대한제국의 부활을 바라는 복벽주의(復 主義)나 최소한 입헌군주제의 실시를 통해 군주제를 유지하려는 보황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복벽주의의 대표자는 척사론의 맥을 이은 의암 유인석(毅庵 柳麟錫)이었다. 그는 돌아오지 않은 밀사 이상설(李相卨) 등과 더불어 고종을 연해주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병운동을 일으킨 임병찬(林炳瓚)이 주도한 대한독립의군부 역시 입헌공화론은 내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황제를 복위시키고, 황제의 명에 의해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적 질서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광복시키려 한 것은 국가와 제정만이 아니라 “강상의 대륜”(綱常의 大倫)도 포함되어 있었다. 천황이 오래 간 이유

사진/ 고종을 연해주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우려 계획했던 유인석(왼쪽)과 의친왕을 망명시켜 상해임시정부에 가담시키려 한 김가진.

사진/ 3·1운동 직후 수립된 임시정부가 입헌군주제도 건너뛰고 별다른 반대없이 공화제로 직행할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