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습니다. <블러드>까지는 의학, 미스터리에 기반을 둔 구도였는데 <김과장>부터 코미디가 강해지고 웃음에 많은 공을 들였죠. <블러드>가 끝나고 온갖 병이 다 몰려왔어요. 10년치 스트레스에 몸이 무너진 시기였죠. 수술하고 병원에서 2주 정도 쉬면서 할 일이 없어 대한민국 예능이란 예능은 다 봤어요. 지금도 글을 쓸 땐 보든 안 보든 항상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습니다. 요즘엔 <피지컬: 100>이 재미있더라고요. 아무튼 그때 확장성, 그러니까 대중적 이야기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한번은 쉬면서 전북 군산으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수다 떠는 두 아저씨를 만났어요. 한쪽이 다른 쪽에 채용을 부탁한 상황처럼 보였는데, 나중에 성의 표시를 안 해서 섭섭하다는 말을 나누고 있었죠. ‘김 과장, 사람 그러는 거 아니야. 좋은 마음으로 해줬으니 나는 괜찮아. 근데 거기 식구들은 환영식도 해줘야 하고 돈이 필요할 거 아니야?’ 그 대화를 듣는 순간 차기작은 <김과장>으로 정해졌습니다.(웃음)”
“이거다, 하는 순간이 있어요. 내가 지친 상태이다보니 기분이 좋아지는 코미디를 하고 싶었어요. 안 해본 방향이었지만 어렵게 생각하진 않았어요. 일단 뭐를 좋아할지 모르니 좋아할 만한 걸 다 넣었죠. (웃음) 아까 말했다시피 나는 A부터 Z까지 다 건드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에요. 코미디는 유치함과의 싸움입니다. 병맛부터 슬랩스틱까지 웃음의 스펙트럼을 최대한 넓게 가져가고 싶었어요.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 1편을 다 본 것처럼 버라이어티하게 가는 거죠. 사실 다 넣는다는 게 말은 쉽지만 전체적인 리듬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어요.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주인공이라는 마에스트로를 중심으로 다양한 조연들이 파트마다 개성 있는 색깔을 선보이는 게 중요했어요. 그러다보니 전체적으로 조연 수도 많아졌고, 조연마다 각자가 주인공이 되는 파트가 있어요. 장르물이라지만 실은 버라이어티 캐릭터물인 셈이죠.”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게 목표예요. 메시지만 있으면 그저 프로파간다(
)에 불과하고, 재미만 있으면 의미 없는 공허한 오락에 불과하죠. 웃음에는 시선을 모으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어요. 바닥을 찍을 때도 다시 튕겨 오를 수 있게 해주는 게 웃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코미디가 매력적이죠. 제대로 잘 웃기려면 공감할 수 있는 단단한 내용물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과장> 속 김 과장은 마냥 의인이 아니라서 좋아해요. 이기적·이타적 행동을 나누는 사이 진짜 중요한 걸 놓치지 않았는지 회의가 들 때가 있어요. 김 과장은 적당히 계산적이고 속물인데, 최후의 선은 지키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인물이죠. 마냥 정의롭기만 한 건 피곤하니까요. 과정이 매번 정당할 수만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현실에서 하기 힘든 부분을 시원하게 건드려주고 싶었습니다.”
박재범 작가가 집필할 때 애용하는 기계식 키보드. 박재범 제공
―사회 비판과 풍자의 또 다른 맛은 수많은 명대사에 있습니다. <김과장>에서 “우리 목표는 1번 버티기, 2번 더 버티기, 3번 죽어도 버티기”라는 대사는 각박한 세상에서 평범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대신 읊어주는 동시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자조가 묻어납니다.“감사합니다. 시청자 마음의 소리를 대신 꺼내주고 싶었어요. 대사는 매일 일상에서 떠오를 때마다 메모해두는 편입니다. 특정 테마에 꽂히면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게 모두 그 방향으로 출력되거든요. 아이디어의 원천이 있다면 대체로 잡념에 가까워요.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을 다듬고 정제하는 작업이 글 쓰는 일의 8할인 것 같아요. 아침에는 잠깐 책을 보고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회의합니다. 5시 이후부터가 온전한 내 시간인데, 나이 들수록 체력이 달려서 오래 쓰진 못해요. (웃음) 그래서 일상 속에서 모아둔 아이디어나 대사, 말들이 더 소중합니다.”
―글이 막힐 때 돌파하는 요령이 있을까요.“(단호하게) 안 써야 해요. 일단 멈추고 거리를 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글이 안 써진다는 건 지금 구조적으로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신호니까요. 하나에 몰두하다보면 전체 구조가 안 보일 때가 있어요. 중요한 건 전체적인 설계예요. 부실 공사인데 끝까지 몰아붙인다면 결국 균열이 가게 돼 있습니다. 캐스팅이 엉망이라서, 재미가 없어서 등등 드라마가 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초기 설계와 구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2022년이 딱 데뷔 20주년이었는데 되돌아보니 이제껏 마감할 수 있었던 동력은 상상력인 것 같습니다. 작품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마감 이후의 시간에 대한 상상력 말이에요. 글이 막힐 땐 우선 마감일에 맞춰 호텔 예약을 해놓습니다. 마감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언제 하는지는 알 수 있다고 하잖아요. 탈고한 뒤 상황을 상상하면서 버티는 거죠. 한번은 동료 작가들과 ‘우리는 언제쯤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진지하게 토론했는데, 결론은 이 일을 관두기 전에는 불가능하다는 거였어요. 어차피 해결할 수 없다면 친해질 수밖에 없는 이 친구를 잘 다독이면서 가야죠.”
2058년 미래 SF,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김과장> 때는 “힘들어도 사람답게 살면서 버티자”였다면 <열혈사제> 때는 “왜 여러분은 성당에 와서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요? 자신들이 잘못한 사람들한테 가서 용서부터 받고 오세요”라며 강한 어조로 세상을 질타합니다. 급기야 <빈센조>에서는 “악마가 악마를 괴롭힌다”는 기조로 타락한 것들을 향해 칼날을 들이밀어요. 주인공의 행동이 통쾌할수록 점점 비관적으로 보이는 건 착각일까요.“결국 글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한 화답입니다.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으니 내 리액션도 거기에 맞춰 커진 거죠. <김과장> 때는 그래도 일말의 낙관이 있었다면 <빈센조>를 쓸 때쯤엔 회의적이랄까, 비관론에서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 됐어요. 계기를 고백한다면 노회찬 의원이 돌아가셨을 때 크게 바뀐 것 같아요. 마피아라는 일종의 장르적 판타지를 택한 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반작용인 셈이죠. ‘과정의 올바름을 믿다가 놓쳐버린 것이 너무 많아. 이제 너희를 응원하지 않을 거야’라는 나름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제 햄릿 형의 성장형 주인공은 더는 그리고 싶지 않아요. 답답하니까요. 어쩌면 <빈센조>의 과격한 판타지는 작가로서 내가 느낀 낙담의 끝이기도 합니다. 나쁜 놈들은 너무 강하고 이제는 웬만큼 성장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거든요. 그 절망의 끝자락에 빈센조라는 마지막 답변이 나왔습니다.
<빈센조>를 마치고 난 뒤 더 강한 저항이 가능할지, 의미가 있을지 고민 중입니다. 그래서 준비 중인 차기작은 (<열혈사제2>를 제외하고) 에스에프(SF)예요. 현재에서는 더는 해결이 안 나니 할 이야기가 없더라고요. 준비하는 작품은 2058년이 배경인데, 미래에 민주주의·법치주의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상상해보는 중입니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어느 쪽이든 지금 현실의 그림자가 투영될 건 분명합니다. 지금 현실에 필요한 이야기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하고 싶어서 택한 SF니까요.”
글 송경원 <씨네21> 기자, 사진 최성열 <씨네21> 기자
박재범 작가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 최성열 <씨네21> 기자
박재범 작가의 작품은 쉽고 재미있다. 긴 인터뷰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재미있는 내용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단단한 시선과 오랜 고민, 묵직한 깊이가 필요하다는 진실 말이다. 인터뷰 말미에 좋은 이야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투박한 질문을 던지자, 그는 “많은 사람이 이해하는 극본”이라고 명확한 답을 내놓았다.
“이야기는 식빵에 잼을 골고루 바르는 작업이다. 어디를 먹어도 그 잼을 먹을 수 있게 잘 펴바르는 게 상업예술이라면, 순수예술은 특정 부위에 발라서 사람들이 그 부위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우열의 문제는 아니지만 나는 누가 봐도 즐겁고 재미난 글을 쓰고 싶다.”
즐거움과 대중성에 대한 박재범 작가의 확고한 태도는 역설적으로 그가 누구보다 단단한 주제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다시,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정의 내리긴 쉽지 않다. 다만 분명한 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야기는 예외 없이 시대와 호흡한다는 사실이다. 박재범 작가의 작품이 그렇다. “시대의 가려운 곳을 확실히 긁어주는 효자손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말이 유난히 미더운 이유다.
드라마
<빈센조>(tvN, 2021년): 박재범 작가 특유의 풍자와 웃음, 캐릭터 쇼의 결정판. 조직의 배신으로 한국에 들어온 이탈리아 마피아 변호사가 악당의 방식으로 악당을 쓸어버린다.
<열혈사제>(SBS, 2019년): 죄를 짓고도 반성하지 않는 악인들을 향해 펀치를 날리는 다혈질 가톨릭 사제가 있다. 각양각색의 캐릭터와 쉴 틈 없는 웃음으로 통쾌한 쾌감을 안긴다.
<김과장>(KBS, 2017년): 돈 냄새 맡는 데 탁월한 삥땅 전문 경리과장이 부정과 불합리에 맞서는 오피스 코미디. 배우 남궁민의 탁월한 캐릭터 해석이 돋보인다.
<블러드>(KBS, 2015년): 뱀파이어 의사의 활약상을 그린 판타지 메디컬 드라마. 독특한 소재와 장르 결합으로 화제를 모았다.
<굿 닥터>(KBS, 2013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소아외과를 배경으로 한 서번트증후군 의사의 성장기. 소아외과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가운데 치료를 넘어 마음을 구해내는 이야기로 사랑받았다. 미국 드라마로 리메이크됐다.
<신의 퀴즈> 시즌1~3(OCN, 2010~2012년): OCN 자체 제작 오리지널 시리즈이자 대한민국 최초 메디컬 수사 드라마. 법의관들의 활약상을 그린 드라마로 시즌3까지 박재범 작가가 각본을 맡았고, 시즌4는 크리에이터로 참여했다.
영화
<비상선언>(각색, 2022년)
<여곡성>(각본, 2018년)
<씨어터>(각본, 2000년)
한겨레21 1454호 표지. 서점에서 판매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