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의 숨은 가치를 찾기 위해 인문·과학적 전문지식을 총동원한 <손이 지배하는 세상>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 “사물의 중요한 측면을 은폐하는 것은 그 단순성과 일상성이다.” 그 일상성 때문에 중요성이 간과되는 것들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손이 지배하는 세상>(마틴 바인만 엮음, 해바라기 펴냄)의 지은이들이 가장 먼저 꼽는 것은 인간의 손이다.
숫자탄생의 토대가 되어준 손
사람들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거나 밥을 먹을 때, 심지어 대화를 할 때조차 갖가지 손동작을 쓰는 등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이지만 손은 뇌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하녀’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않아왔다. 독일의 의사와 신경생리학자, 철학자와 문학가들이 학제간 연구를 통해 완성한 이 책은 근대 철학의 문을 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에 “창조적 육신은 자신의 의지의 수단으로 정신을 창조했다”는 니체의 말을 빌려 반박한다. 육체의 활동을 대표하는 인간의 손은 정신의 하수인이 아니라 정신과 상호교통하고 이론의 발전을 이끌어내는 ‘호스트’라는 것이다. 이 책을 기획한 마르코 베어는 “육체는 정신의 무덤”이라는 플라톤의 명제를 “육체는 영혼의 모태”로 수정할 것을 주장한다. 왼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오른손으로 8자를 그리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동료 과학자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지만 아무도 명쾌한 대답을 주지 못해 직접 이 책을 기획하게 됐다는 그가 이 까다로운 작업을 시작한 데는 물리학 박사로 “입노동자”(정신노동자)이면서 동시에 무용가라는 “손노동자”(육체노동자)의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차가운 물줄기가 내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동안 선생님은 내 다른 쪽 손에 ‘물’이라고 썼다. 바로 그 순간 번개같이 되살아난 정신이 내 몸을 타고 흘렀고, 언어의 비밀이 열리기 시작했다.” 눈과 귀의 기능이 정지된 헬렌 켈러가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하던 순간을 회고한 이 구절은 쉽게 축소되는 손의 가치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다. 헬렌 켈러뿐 아니라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손의 감촉만으로 사물을 정확하게 묘사해낸다. 의학박사 마틴 바인만은, 모든 움직임은 두뇌의 일방직 지시가 아니라 두뇌와 손의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신경생리학적으로 풀어쓴다. 그는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제시한다. 대뇌피질의 특정부위를 자극하면 신체의 특정부분에서 그 자극을 느끼게 된다. 이에 따라 대뇌피질의 감각지형도를 그릴 수 있는데 이를 완성하면 실제 인간 모습과 달리 거대한 손(과 혀)을 지닌 인간모형이 완성된다. 호몬쿨루스(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인조인간)라고 부르는 감각지형도는 손이 인간의 행동에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확인한다. 체스왕 카스파로프와 컴퓨터의 체스게임 결과에서 볼 수 있듯 인간의 두뇌를 앞지르는 인공지능은 등장했지만 인간의 손동작을 모방하는 인공손의 등장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는 사실도 ‘손’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인간의 손은 인류문명의 토대가 된 숫자와 언어체계의 탄생에도 중요한 계기가 됐다. 마르코 베어는 수학자들이 자연수나 정수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신격화함으로써 수의 본질을 도외시했다고 비판한다. 그 이유로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의 부족 가운데는 여전히 하나, 둘, 여럿으로 무리 없이 일상을 꾸려나가는 부족이 많다는 사실을 든다. 이들은 손이나 발, 눈, 귀 등 신체를 숫자로 사용한다. 어린아이들 역시 셈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는 도구는 손가락이다. 셈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10진법이 손가락 숫자에서 기인했다는 필자의 주장은 일견 단순해보이지만 설득력 있다.
입노동자는 손노동자에게 빚졌다
철학자 페터 야니히는 “손노동자”가 “입노동자”에 비해 낮은 대우를 받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난센스인지를 밝힌다. 그는 물체를 점·선·면으로 개념화한 유클리드 기하학의 기원과 한계를 지목하며 입노동자가 하는 언어진술의 타당성을 가능하게 하는 학문적 합리성이 손노동자에게 빚지고 있는지 설명한다. 원에 대한 유클리드의 정의 즉 ‘라나의 선으로 둘러싸인 평평한 형상이며, 내부에 위치한 한 점에서 선으로 이어지는 길이가 모두 똑같다’는 진술이 수공업적인 제작과정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려서 도형을 만들어내려면 이미 어떤 입체적 형태가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상가들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잘못 알려진 기하학의 성과는 손노동자에게 돌려져야 한다는 게 글쓴이의 주장이다.
마지막 장인 ‘신비로운 손’은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분석에서 살짝 벗어나 인류사 이래로 손이 가져온 의미를 여러 통념과 속설 속에서 살펴본다. 지금도 법정에서 진실을 맹세할 때 손을 성서 위에 올려놓거나 기도할 때 두 손을 가슴 위에 놓는 행위 등은 오래 전부터 손이 지녀온 기능 이상의 가치를 보여준다. 고대로부터 손을 잘라내는 것은 가장 가혹한 형벌 중의 하나였다. 이는 행동할 능력을 잃게 함과 동시에 영혼을 파괴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아이들의 배가 아플 때 ‘엄마손은 약손’이라고 말하며 엄마가 아이의 배를 문질러주듯 동서양의 여러 가지 손동작은 기원과 보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의 미래를 내다보는 데 아직도 ‘손금’이라는 수상(手相)을 들여다보는 것이 적잖은 신뢰를 얻고 있는 사실도 손이 가지는 ‘동작 이상의 가치’를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손의 진화와 기능에 대한 신경생리학적·물리학적 분석이 다소 까다롭게 읽히지만, 손이 숨기고 있는 가치를 찾기 위해 인문학적·과학적 전문지식들을 총동원하는 학제간 작업은 매우 흥미롭다. 완독이 쉽지는 않을지라도 500쪽에 이르는 이 책을 덮고 나면 너무나 익숙해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소중한 내 손’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육체의 활동을 대표하는 인간의 손은 정신의 하수인이 아니라 정신과 소통하면서 이론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주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