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영화제 수상 계기로 찬반 논쟁 가열… 거장의 미학적 성취, 그 빛과 그림자
조선시대 화가 오원 장승업의 일생을 그린 <취화선>으로 제55회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임권택 감독은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동안 멍에를 짊어지고 사는 것 같았는데 수상 발표 순간 멍에에서 벗어나는 기분이었으며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그의 수상 소감은 한국영화계 전체의 것이기도 하다.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가 한국영화에 비로소 경의를 표한 것이니까. 그런데 임 감독은 국내 비평계에 묵직한 숙제를 던져놓았다. <취화선>의 미학적 성과가 도대체 무엇인지 밝혀보라는 물음이다. 칸영화제 수상이라는 기쁨은 여기에 알맞는 조건을 만들어줬다. <취화선>에 대한, 그리고 임권택 감독에 대한 찬반 논쟁은 이제 권위에 근거 없이 도전하거나 터무니없이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의 기초 쌓기를 ‘해방감’을 가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해낼 수 있는 시기가 됐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레퍼토리 반복에 그쳤다”
<취화선>에 대한 국내의 초기 평가는 만장일치는 아니더라도 긍정적이라는 일정한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반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영화평론가 강한섭(서울예술대 영화과 교수)씨는 월간 <프리미어> 6월호에서 ‘임권택이라는 신화’라는 제목으로 ‘세게’ 치고 나왔다. 강씨는 <취화선>이 상당히 실망스런 작품이라며 이 영화를 향한 저널리즘 비평의 찬양 일변도를 혹독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그의 비판은 신문의 비평기사보다 <씨네21> <필름2.0> 같은 영화 전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간지들은 무리하고 솜씨 없는 드라마 구성을 지적하고 그 반대급부로서의 영상미의 탁월함을 부각시키면서 이 영화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데” 반해 영화 전문지들은 “결점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의도된 결핍 또는 새로운 시도로 미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씨가 지적하는 결점은 이런 것들이다. “임권택의 오원은 근거도 없는 화가의 일차 정보들을 일대기라는 지루한 이야기 방식 속에 용감하게 나열하고 있었다. …게다가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은 임권택-정성일(촬영감독) 시스템의 반복이었다. …창작의 역사는 이름 그대로 기존의 소재와 양식에 대한 부정과 극복의 역사였다. 그런데 임권택의 <취화선>은 감독의 18번을 반복하고 있었다.” <프리미어> 같은 호에 실린 소장 평론가 이명인씨의 글은 <취화선>을 좀더 치밀하고 신랄하게 공격한다. 이씨는 판소리를 끌어들여 형식의 새로움을 만들어낸 <춘향뎐>에 비해 <취화선>은 영화의 형식 면에서 새롭게 성취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포문을 연 뒤, 내용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에 들어간다. “<태백산맥>에서 절정에 달했던 양비론적이고 방관자적 시대관과 세계관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으며, “영화는 어느 순간, 장승업을 선비 세계, 양반 문화 속으로 편입시킨다”는 것이다. 마침내 서구의 호감을 이끌어내려는 “오리엔탈리즘에 복무”한다는 혐의까지 제기한다. 중견 평론가 이효인(동국대 교수)씨도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혐의를 포함해 <취화선>에 대한 비판적 평론을 <한겨레> 6월4일치 ‘영화관람석’에 실었다. “<취화선>은 <개벽>에서 범했던 안일하고도 주관적인 역사 해석과 러닝 타임 혹은 무엇인가에 쫓기면서 직조한 파편적인 에피소드들의 나열이라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장승업이 추구한 선경의 세계나 거친 삶과는 달리 화면은 너무 기름져서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장승업에 관한 상상된 허구적 삶이 실제 삶을 억눌렀을 뿐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은 기름진 화면 속에서 제각각 나뒹군다.” 딴죽 걸기인가, 이유 있는 비난인가
임권택, 그리고 <취화선>에 대한 논쟁은 이제 막 시작이지만,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평론가들이 모두 ‘영화계가 알아주는’ 쟁쟁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이후 펼쳐질 지형은 흥미를 넘어선다. 먼저 <필름2.0> 편집위원이자 영화평론가인 김영진씨가 강씨의 <취화선>에 대한 비판, 그리고 저널비평에 대한 비판 모두에 반발했다. 김씨는 <취화선>이 완벽한 걸작은 아니지만 영화가 아주 잘 만들어졌다며 말을 이어갔다. “임 감독은 후기작으로 갈수록 플롯 중심이 아니고 삽화적으로 가면서 이야기의 흐름보다는 화면의 흐름으로 미학을 만들어가는데, 같은 맥락에서 장승업의 그림과 영화의 화면이 잘 조응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림 속의 산수와, 카메라가 잡아낸 영화 속의 산수가 서로 경쟁하듯. 그리고 거기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의 장승업을 겹쳐내고 있다. 이런 미학을 보여줄 수 있는 감독은 한국영화에 현재는 없다.”
김씨는 또 <개벽>이나 <태백산맥>에서 나타난, 개인을 역사적 상흔 같은 시대와 연결지으려는 강박을 보이지만 이것이 작품을 훼손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특히 그는 “신문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전문지에서는 만세를 불렀다”며 강씨의 저널비평에 대한 평가의 전제에 동의하면서도, “전문지들이 장문의 인터뷰와 리뷰를 통해 중간결산을 해내는 건 마땅한 자세이지 절대로 과한 게 아니며, 강 교수의 딴지 걸기는 지나친 것 같다”고 했다.
강씨의 주요 타깃이 된 <씨네21>의 허문영 편집장은 사안을 좀더 복합적으로 바라봤다. 그는 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평론가들이 작가주의라는 ‘칼’을 마구 휘두를 때 이들을 아끼던 앙드레 바쟁이 미학적 인격숭배로 흐르는 경향에 대해 경계했던 점을 떠올렸다. 이런 맥락에서 강씨의 비판은, 한국 저널비평 전반이 미학적 인격 숭배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는 점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면서도, 작가주의 정책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단호히 말했다.
“장 뤽 고다르의 어떤 한 영화가 걸작인 건 아니다. 그의 필모그래피가 보여주는 예술적 탐험과 여정이 미학적 혁신을 이루고 있기에 고다르가 20세기 최고의 영화감독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취화선>이 실패작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임권택이라는 한국 영화미학을 대표하는 사람의 실패라면, 그 속에는 어떤 미학적 에너지가 있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 실패의 지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 않다.”
허씨의 결론은, 임 감독이 새로운 미학적 모험을 시작했으며 그것이 어떤 지점에서 나온 도전의 산물인가를 얘기해야 할 때라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취화선>을 둘러싼 논쟁은 작가주의의 유효성 여부라는 ‘해묵은’ 이야기로 층위가 넓어진다. 강씨는 ‘임권택이라는 신화’에서 “안정적이고 논리적인 정체성을 가진 슈퍼맨으로서의 창작자를 출발점으로 삼는 작가주의는 도전받고 비판받아, 영화비평의 주류로부터 추방된 지 오래”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작가주의 정책은, 허씨가 보기에, 작가의 미학적 모험을 격려해야 하는 저널리즘 비평의 주요한 역할이다. 모험은 항상 완성된 형태가 아닌 불균질의, 불완전한 것으로 제출되는데 비평은 그 모험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주도하는 영화산업이 여타의 영화를 소외시키는 상황에서 그 구실을 관객이 할 수 없다는 점도 이유가 된다.
작가의 미학적 실험은 계속되나
이효인씨도 작가주의를 폐기하려는 강씨의 견해에는 반대했다. “과거의 작가주의가 학문적 연구대상이었다면, 지금은 대중 스스로 영화를 작가주의 형태로 만나고 있기 때문에 작가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대중 전체는 아니지만 감독과 작품을 연결짓고 집착하는 현상이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는 <취화선>이 끊임없는 형식적 실험의 연장선상에 있느냐는 질문에서 ‘그건 아니다’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최근의 찬반 논쟁은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와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그러나 <취화선>을 둘러싼 논쟁은 좀더 ‘거대’하다. 임권택이라는 거장이 버티고 있어서라기보다 이른바 ‘한국적 미학’에 대한 검토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를 풍요롭게 할 그 수확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씨네21 이혜정 기자)
<취화선>에 대한 국내의 초기 평가는 만장일치는 아니더라도 긍정적이라는 일정한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반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영화평론가 강한섭(서울예술대 영화과 교수)씨는 월간 <프리미어> 6월호에서 ‘임권택이라는 신화’라는 제목으로 ‘세게’ 치고 나왔다. 강씨는 <취화선>이 상당히 실망스런 작품이라며 이 영화를 향한 저널리즘 비평의 찬양 일변도를 혹독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그의 비판은 신문의 비평기사보다 <씨네21> <필름2.0> 같은 영화 전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간지들은 무리하고 솜씨 없는 드라마 구성을 지적하고 그 반대급부로서의 영상미의 탁월함을 부각시키면서 이 영화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데” 반해 영화 전문지들은 “결점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의도된 결핍 또는 새로운 시도로 미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씨가 지적하는 결점은 이런 것들이다. “임권택의 오원은 근거도 없는 화가의 일차 정보들을 일대기라는 지루한 이야기 방식 속에 용감하게 나열하고 있었다. …게다가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은 임권택-정성일(촬영감독) 시스템의 반복이었다. …창작의 역사는 이름 그대로 기존의 소재와 양식에 대한 부정과 극복의 역사였다. 그런데 임권택의 <취화선>은 감독의 18번을 반복하고 있었다.” <프리미어> 같은 호에 실린 소장 평론가 이명인씨의 글은 <취화선>을 좀더 치밀하고 신랄하게 공격한다. 이씨는 판소리를 끌어들여 형식의 새로움을 만들어낸 <춘향뎐>에 비해 <취화선>은 영화의 형식 면에서 새롭게 성취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포문을 연 뒤, 내용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에 들어간다. “<태백산맥>에서 절정에 달했던 양비론적이고 방관자적 시대관과 세계관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으며, “영화는 어느 순간, 장승업을 선비 세계, 양반 문화 속으로 편입시킨다”는 것이다. 마침내 서구의 호감을 이끌어내려는 “오리엔탈리즘에 복무”한다는 혐의까지 제기한다. 중견 평론가 이효인(동국대 교수)씨도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혐의를 포함해 <취화선>에 대한 비판적 평론을 <한겨레> 6월4일치 ‘영화관람석’에 실었다. “<취화선>은 <개벽>에서 범했던 안일하고도 주관적인 역사 해석과 러닝 타임 혹은 무엇인가에 쫓기면서 직조한 파편적인 에피소드들의 나열이라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장승업이 추구한 선경의 세계나 거친 삶과는 달리 화면은 너무 기름져서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장승업에 관한 상상된 허구적 삶이 실제 삶을 억눌렀을 뿐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은 기름진 화면 속에서 제각각 나뒹군다.” 딴죽 걸기인가, 이유 있는 비난인가

사진/ 일부 평론가들은 <취화선>이 새로운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