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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상상을 현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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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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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침투한 전복적 사유 분석한 <도발-아방가르드 문화사>

1913년 2월. 뉴욕의 언론과 예술계는 휑뎅그렁한 무기창고에서 열린 한 전시회로 발칵 뒤집혔다. 이곳에 전시된 유럽의 인상주의와 입체파 그림들은 이제까지 미국인들이 알고 있던 예술의 개념-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현실의 완벽한 재현이라는- 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이곳으로 몰려든 8천여명의 예술가들은 정신의 해리상태(??)를 겪을 지경이었고 삼삼오오 모일 때마다 목청높인 논쟁을 벌이곤 했다. 이 가운데서도 논란의 중심이 된 작품은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였다. 뒤샹은 나체를 보여준다고 했지만 사람들이 본 것은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널빤지 조각들”이거나 “지진 뒤에 폐허로 남은 고가철도”였다. 이 에피소드는 아방가르드가 기존의 예술과 어떻게 부딪히고 사회의 통념을 전복하는 보여준다.

그들의 거침없는 도전은 무엇을 남겼나

사진/ <도발-아방가르드의 문화사, 몽마르트에서 사이버 컬쳐까지> (마크 애론슨 지음·장석봉 옮김, 이후 펴냄. 1만 7천원).
당대의 예술과 사회에 도전한 이 작품이 교양주의자들의 살롱이 된 호화 미술관의 터줏대감이 된 지금 아방가르드는 무엇을 의미할까. 미국의 젊은 문화사가 마크 애론슨이 쓴 <도발-아방가르드 문화사, 몽마르트에서 사이버 컬쳐까지>(이후 펴냄)는 인상파에서 인터넷 등장에 이르기까지 아방가르드의 역사를 사회·문화사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애론슨은 우리가 흔히 착각하듯 아방가르드를 예술의 영역에 국한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1차대전 살육의 역사에서, 러시아의 절대주의 종말을 스탈린주의의 오류에서 읽는다. 애론슨에 따르면 아방가르드는 삶의 방식이자, “미래를 내다보고 자신들의 통찰력을 우리 눈 앞에 들이대는 일에 자신의 재능, 심지어 삶까지도 바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살롱전에서 떨어지고 ‘낙선전’을 조직해 프랑스의 부르주아 호사가와 예술가들에게 ‘엿을 먹인’ 마네이기도 하고,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베트남 창공의 비행기 굉음이나 암살과 자극적인 사건들로 미쳐가는 미국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로 갈기갈기 찢어놓은 지미 헨드릭스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들처럼 “위험을 무릅쓴 사람들과 그들이 살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자 “우리가 세계를 상상하는 방식을 바꿔놓은 예술, 그리고 그 예술을 가능케 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진/ 1913년 뉴욕 예술계를 뒤흔든 아머리(무기창고) 전시회에 대한 충격을 그린 풍자 만화.
앞서 말한 뒤샹의 예처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선대가 쌓아놓은 관습과 통념에 침을 뱉는 것으로 체제와 맞섰다. 마네는 <올랭피아>에서 우윳빛 피부와 수줍은 표정의 나체가 아니라 피로한 표정에 관객을 깔보듯 응시하는 나체를 그렸고, 스위스에 집결한 다다이스트들은 글이 쓰인 종이를 찢어 뿌린 다음 무작위적으로 연결하면서 전혀 문맥에 닿지 않는 시를 낭독했다. 원인과 결과의 논리를 해체한 다다이스트들의 생각은 우연을 모든 존재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과학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발표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문화와 사회, 과학계를 뒤집은 우연에 원리 뒤에는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가 내놓은 피비린내나는 결과물, 1차 세계대전이 있었다.

이처럼 시대의 불화하면서 동시에 호흡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아방가르드는 필연적인 자기 모순의 함정을 가졌다. 작품에서 구체적인 묘사나 주제, 또는 제재를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한 러시아 절대주의 예술가들이나 구성주의자들은 육체성의 한계를 기계성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의 이러한 이상은 소비에트 건설에 활기를 불어넣었지만 결국 소비에트를 지지하는 것 이외에는 인민들에게 아무런 자유도 주지 않는 스탈린주의에 복무하는 것으로 끝났다. 아방가르드가 주장하는 거침없는 자유와는 대조되는 결말이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 오면서 아방가르드는 더욱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는다. 마약·혼음 등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은폐되고, 불법화되고, 이상한 일로 여겨지던 모든 일들이 보란 듯이 펼쳐진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히피족, 즉 60년대 “아방가르드 세대의 테마파크”였다. 그러나 우드스탁은 “시장의 승리”이기도 했다. 자유를 택한 히피들의 삶의 방식은 판에 박은 듯 똑같았고, 대학 기숙사 방마다 체 게바라와 지미 헨드릭스 사진이 나란히 걸렸다. 아방가르드주의는 유행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변방에서 울리는 비판이 아니라, 한 세대가 내거는 투쟁의 구호가 된 아방가르드는 “더 이상 신념 체계가 아니라, 출생증명서 위에 찍혀 있는 날짜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말한 워홀- 기성 이미지를 무한 복제해내는 워홀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에 이르면 아방가르드 사상은 그 역사상 가장 전복적인 변화를 겪는다. 워홀은 “대중문화 자체가 이미 아방가르드”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었다.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예술로 보았기 때문에” 레디메이드는 예술작품이 됐지만 워홀이 만든 이미지들은 “볼 만한 가치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예술작품이 됐다.

다시 폐허 위에서 미래를 조각한다

이처럼 전투적인 에너지에서 자가당착과 모순으로 옮겨온 아방가르드는 70년대 이후 폐허가 된 자리에서 다시 건물의 밑동부터 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100여년 아방가르드의 역사가 형식의 문제였다면 지금부터는 내용의 문제가 된 것이다. 예술가들은 사회운동의 영역 안에 있던 여성주의, 동성애(에이즈), 인종차별주의를 예술영역의 전면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금기를 무대의 중앙으로 끌어오는 아방가르드의 속성은 또 다른 아방가르드의 공격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의 사도마조히스틱한 모습을 사진에 담은 사진가 메이플소프는 보수주의자뿐 아니라 동성애자, 흑인, 여성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서 공격을 받았다.

지은이는 인터넷을 통해 단 한번의 클릭으로 전 세계를 옮겨다니고 예술과 정치, 테크놀로지와 일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서로의 영역을 넘나드는 지금, 아방가르드적 이념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확실한 건 이 시대에도 한 걸음 더 내딛는 예술가가 존재하고 모든 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진실을 꿈꾸는 몽상가도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이 아방가르드에게 형태를 부여해줄 수 있을까. 그는 이렇게 자문자답한다. “지미 헨드릭스가 곧잘 말했듯이 이는 경험해 봐야 할 일로 남아 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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