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운명적 사랑에 ‘속살’이 없네

411
등록 : 2002-05-29 00:00 수정 :

크게 작게

사제간 러브스토리의 화제작 <로망스>… 파격적 접근보다는 신파 공식에 충실

사진/ 여교사와 남제자의 사랑을 다룬 문화방송의 <로망스>. 이 드라마에선 금지된 사랑의 파격과 아릿함이 드러나지 않는다.
요즘 안방극장의 화제작은 단연 문화방송의 <로망스>(배유미 극본, 이대영 연출)다. ‘바람머리’ 배용준과 ‘듄상이’를 외치는 최지우(한국방송의 <겨울연가>)에 이어 “그랬쥬?”의 ‘충청도 소녀’ 장나라와 ‘어설픈 백마 탄 왕자’ 장혁(SBS의 <명랑소녀 성공기>)이 열띤 시선을 받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 관심은 ‘여선생과 제자’인 김하늘과 김재원에 옮겨붙었다. <로망스>의 시청률이 20% 중반대로 치솟으면서 지난해부터 이렇다 할 히트작을 배출하지 못해 ‘드라마왕국’의 체면을 구겨온 문화방송은 모처럼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로망스> 인터넷 게시판도 접속자 폭주로 서버가 다운되는 사태를 빚을 만큼 연일 시끌벅적하다.

로맨틱 코미디로 사회적 논란 비켜가

4월28일 첫 선을 보인 16부작 수·목 미니시리즈 <로망스>는 ‘여선생과 고교 3년생의 로맨스’란 기존 틀거리 때문에 방송 전부터 예의주시의 대상이 돼왔다. 오죽하면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에서 사제간 사랑의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제작진에게 문의하며 “앞으로 두고보겠다”는 고견을 전했을까.


그러나 우려와 기대를 배반하고 드라마의 초반부는 ‘유쾌·상쾌·통쾌’한 햇빛전략 아래 문제작답지 않은 무난한 노선을 걸었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웃음장치를 동원한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으로 남녀 주인공의 만남과 사랑을 풀어간 것이다.

벚꽃축제가 한창인 경남 진해를 배경으로 서울에서 놀러온 여교사 채원(김하늘)과 고교생 관우(김재원)가 처음 만난다. 이들은 선생과 학생이란 신분을 속인 채 배가 끊긴 섬에서 낭만적인 하룻밤을 보내고(키스까지 진도가 나간다), 한동안 연락이 끊겨 애태우다가 서울에서 재회한다. 진해에서 살던 관우가 집안이 몰락하면서 서울로 이사해 전학을 온 곳이 다름 아닌 채원의 학교였다. “채원씨”, “관우씨”를 외치며 해후를 반가워하는 것도 잠시, “선생님”과 “관우야”로 호칭을 바꿔야 하는 사이임을 알고 이들은 본격적인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극적인 기본설정말고도 이 드라마가 단박에 시청자를 사로잡은 배경은 일단 매력적으로 구현된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에 있을 것이다. 요즘 대중문화계에서 가장 뜨는 명랑여성의 계보를 잇는 덜렁이 여선생과 아름답고 의젓한 ‘꽃미남’ 계열의 연하남 제자는 신선하면서도 친근한 동시에 동경심도 유발하고 있다. 학교 옥상에서 몰래 담배 피우며 투덜거리는 호방한 여선생(정경순)을 비롯해 양념처럼 자리잡은 주변인물도 충분히 흥미롭다. 비록 우연이 남발되는 관계 설정과 따로 노는 것 같은 산만한 구성은 흠이지만.

그들은 진정 금단의 열매를 맛봤나

어쨌든 <로망스>는 극적인 재미를 잘 살리고 있는 드라마인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러나 진보보다 보수에 더 가깝다는 시청자의 평균시선을 외면하지 못하는 지상파 드라마의 한계 때문일까. 개인적 진실을 외면한 채 고정관념의 잣대로 재단된 사회적 금기에 대해 문제의식을 설핏 보이면서도 과감하게 메스를 들이대는 데는 머뭇거린다. 이 드라마는 언뜻 매혹적이나 치명적인 금단의 열매를 맛본 남녀의 사랑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공식을 따른 선남선녀의 운명적인 로맨스에 치우쳐 있다.

사랑이란 게 깊어질수록 힘겨움이 쌓이듯 일사천리로 밝게 이어지던 이 드라마의 러브스토리도 중반부에 진입하면서 무거워졌다. 관우가 학교에서 채원에게 강제로 키스하는 6회의 장면은 진지한 분위기 때문인지 1회의 키스신과 달리 제법 거센 도덕성 논란도 일으켰다. 많은 화제와 논쟁거리를 낳았음에도 이 드라마엔 금지된 사랑의 파격과 아릿함은 없다. 예기치 못한 삶의 항로에 흔들리는 인간의 연약한 속살을 통렬하게 들춰내기보다는 ‘우리 이대로 사랑하게 해주세요’라고 울부짖는 기존 드라마의 신파 공식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인이 된 뒤 결혼에 골인하는 무난한 해피엔드로 금기를 봉합한 남선생과 여제자의 러브스토리인 문화방송의 99년작 <사랑해 당신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로망스>는 화제작일지 몰라도 문제작은 아니다.

조재원 l 스포츠서울 기자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