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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몸으로 부대껴 가슴에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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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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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 식스틴>뿐 아니라 <빵과 장미> <칼라송> 등의 시나리오를 쓴 켄 로치의 ‘영화적 동지’ 폴 레버티는 생생한 경험담을 글로 풀어내왔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사회주의 정권을 거꾸러뜨리는 미국의 ‘대리전쟁’을 2년 동안 현장에서 지켜본 느낌을 <칼라송>에 절절히 담아낸 것처럼, <빵과 장미>도 머리뿐 아니라 ‘몸’을 통해서 나왔다. 그는 <칼라송>을 완성할 무렵, 할리우드 근처의 부촌 비벌리힐스에서 낯선 이민자의 표정을 한 청소부 무리와 마주쳤다. 이튿날 한 라디오 방송에서 청소부들의 운동단체가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합류한 뒤 수년간 함께한 체험을 <빵과 장미>에 쏟아냈다.

그렇다고 <빵과 장미>가 구호로 넘쳐나는 교조적인 영화는 절대로 아니다. 켄 로치의 영화가 늘 그랬듯이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 또는 정의의 아름다움이 따뜻한 유머와 들뜨지 않는 디테일을 타고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스페인 내전에서 좌파연합 안의 갈등과 충돌을 섬세하게 다룬 <랜드 앤 프리덤>처럼 내부에서 조금씩 갈라진 균열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드러내는 솜씨와, 실직자의 웃지 못할 일상을 코믹하게 재현해가는 <레이닝 스톤>의 따뜻한 시선이 부족함 없이 녹아 있다. 교훈과 감동을 강요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는 적어도 켄 로치식 좌파 영화와는 맞지 않는다.

<빵과 장미>의 마야(파일러 파딜라)가 멕시코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밀입국해 들어오는 과정은 스릴러적이다. 자칫 인신매매당할 뻔한 마야의 불안스런 눈빛은 언니 로사(엘피디아 카릴로)가 일하는 청소용역회사에 취직하면서 안정된다. 하지만 마야의 우여곡절은 지금부터다. 중간관리자는 미국인이 아니건만 마야를 취직시켜준 반대급부로 한달치 급료를 가로챈다. 게다가 그는 해고를 입에 달고 다니며 대다수가 밀입국자인 청소부 위에 군림한다. 보험 혜택 따위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마야를 비롯한 청소부들이 눈뜨는 건 그들의 처지가 어떤 것인지 담담히 일러주는 노동운동가 샘(에이드리언 브로디)을 만나면서부터다. “82년 청소부의 시간당 임금은 8.5달러였고 의료보험·치과보험 모두 가입이 되어 있다. 99년 청소부의 시간당 임금은 5.75달러에 아무런 보험혜택도 없다. 그들은 최빈곤층에게서 20년 동안 수천억원을 가로채갔다.”

샘과 마야는 이들이 일하는 고층건물에 사는 변호사·펀드매니저 등 고소득자들의 체면을 구기는 방식으로 유쾌한 공격을 시작한다. 그들이 윤택하고 여유로운 삶을 뜻하는 ‘장미’에 둘러싸여 온화한 눈빛을 지을 때, 그 품위를 빛내주는 청소부들은 생존조건인 ‘빵’조차 제대로 지켜낼 수 없음을 ‘폭로’하면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샘과 마야의 사랑이다. 지식인과 노동자의 이 결합은 이상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게 그려진다. 부조리를 향해 힘겹게 주먹을 쥐어보이며 성숙해가는 과정처럼, 사랑도 다른 사람과 자신을 알아가는 소통의 배움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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