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열광 이면에 숨은 스포츠의 실체 파헤친 계간지 여름호들
마이클 조던은 두번이나 은퇴한 농구계로 되돌아갔다. 질퍽거린다는 이미지가 끼어들 틈 없는 화려한 복귀였다. 농구에 대한 애절한 사랑의 결실이라고 봐야 할까? 원용진(서강대 신문방송학) 교수는 “조던은 스포츠 시스템을 위한 스타일 뿐 결코 운동을 사랑하는 스포츠맨과는 거리가 있다”며 “조던은 스포츠 시스템의 필요에 의해 야구와 골프를 거쳐 농구에 복귀했을 뿐”이라고 해석한다. 원 교수는 스포츠 시스템과 스포츠 그 자체를 구별한다. 스포츠 시스템은 조던과 같은 스포츠 스타, 스타와 계약을 맺고 관객을 끌어모으는 구단, 구단에게서 중계권을 구매해 스타의 활약상을 보여주며 사람을 끄는 대중매체, 대중매체에 비용을 지불하고 광고시간을 구매하는 광고주, 스포츠를 통해 비즈니스를 도모하고 자본을 끌어대는 스포츠 마케팅 등으로 구성된다. 조던이 농구에서 은퇴하고 입문한 야구나 골프에서 성공을 거뒀다면, 농구에서 톡톡히 재미를 보던 식의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하며 안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던 자신도, 조던을 대신할 스타를 찾지 못한 농구 시스템도 모두 ‘대안’을 찾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조던의 복귀는 “흐트러진 농구 시스템의 재정비”이며 그 결과 “프로농구 시스템은 활기를 찾았고, NBA 구단, 나이키, 그리고 여러 방송사들은 예전의 호황을 누리는” 효과를 보게 되었다.
스포츠 시스템에 복무하는 스타들
현대 스포츠를 단순히 몸을 이용한 놀이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건 순진한 착각이다. 스포츠에는 자본과 정치, 그리고 계급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또 이에 반응하는 수용자의 능동성 또는 수동성도 역학관계의 한 변수로 작용한다. 계간지 <당대비평>과 <문학과사회>가 여름호 특집으로 넓게는 스포츠, 좁게는 월드컵에 대한 ‘해부’를 시도했다. <문학과사회>는 ‘열광의 배후: 스포츠의 사회학’이란 주제로 ‘현대 스포츠의 특성과 수용자의 자발성’(정준영·문화비평가), ‘스포츠는-대중매체에 업힌 채-살아 있다’(원용진), ‘한국 스포츠는 진화하는가(김찬호 연세대 강사)’ 등 세편의 글을 실었다. <당대비평>은 ‘월드컵에의 열광: 동원의 공학과 자발적 참여 사이에서’라는 주제로 ‘박정희 시대 축구와 민족주의’(황병주 한양대 강사), ‘노동계급, 축구, 국민 정체성’(이영석 광주대 외국어학부 교수), ‘유니언잭 아래의 흑인’(레스 백 런던대 강사), ‘붉은 악마와 서포터즈 문화’(이동연 문화연대 사무차장·문화비평가) 등 네편의 글을 실었다.
정준영씨의 글은 총론 격이다. 그는 현대 스포츠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으로 체제와의 긴밀한 통합을 꼽는다. 이는 세계적 수준, 각 국가 수준, 지역 수준 등으로 조직화된 스포츠 기구가 서로 위계를 이루며 사회의 다른 부문과 발을 맞춤으로써 가능하게 됐다. 국가간 시합을 통해 드러나는 민족주의 논리는 사회 갈등을 거짓으로 해소하고 허위의 통합을 형성하며, 대중매체와 결합한 보는 스포츠로서의 기능은 상업화의 첨단을 달린다. 스포츠 내부로 좀더 들어가보면, 운동선수들은 이제 즐거움의 추구가 아니라 육체로부터 최대의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 자기 파괴적인 연습에 매달린다. 최대의 생산성을 발휘하도록 담금질당하는 노동자들의 처지와 마찬가지이다. 성공 이데올로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일부 프로선수들의 엄청난 연봉은 다수의 하층계급 청소년들에게 일종의 신기루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스포츠 수용자들의 자발성은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할까? 정씨는 “축구가 개인기 중심의 드리블링 경기에서 팀워크를 강조하는 패스 중심의 경기로 변화한 것은 노동계급이 축구를 독자적으로 수용한 현상”이라며 긍정적인 가능성을 열어놓는다(영국의 축구가 중간계급의 후원과 관심, 그리고 노동계급의 적극적인 참여로 근대 스포츠로 성장하는 과정은 이영석 교수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붉은 악마’에 대한 ‘옹호론’을 펼치는 이동연씨의 글은 수용자의 적극적인 참여에 무척 높은 점수를 매긴다. 과거의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응원단과 구별하기 위해 영어 표기대로 명명된 서포터스는 단순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는 박수부대가 아니라 경기장에서 특정한 스타일을 표현하는 하나의 문화 주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붉은 악마’는 “하나의 기표이고, 애칭이며, 우리의 레드콤플렉스를 치유할 수 있는 유희의 언어”이다. 그의 적극적인 의미 부여는 ‘취향으로서의 축구’라는 관점에서 나온다. “미디어 자본과 스포츠 마케팅 시스템이 없이는 축구가 재생산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개인의 취향은 그러한 지배적인 장 안에서 관철되는 ‘독사’(doxa·지배적 사상)의 빗장을 풀려고 하는 ‘이견’을 생산하고자 하며, 장 안에서 자신의 특정한 입장을 취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포츠 시스템이 그리 만만한 건 아니다. 원용진 교수는 수용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능동적 주체가 되는 듯하지만, 그건 능동성이 아니라 대중매체의 논리에 수동적 주체로 걸려든 것일 뿐이라고 본다. 원 교수에 따르면, 대중매체가 현실을 재구성하고 국가와 자본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식은 숨김, 선택과 배열의 기교, 그리고 이야기 접합의 논리다. 매체는 단지 중계를 할 뿐 스포츠 내용에 어떤 치장도 하지 않음을 강조하는 숨김의 논리를 펼치지만, 재현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선택과 배열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중을 유혹하는 대중매체의 기교 “먼저 스포츠 현장이 선택과 배열에 의해 구성된다. 그리고 선택되고 배열된 스포츠 장면에 대사를 얹기 위한 선택과 배열이 구사된다. …장면구성에서의 선택과 배열은 스포츠의 웅장함과 우연성에 초점을 맞춘다. 스포츠가 자아내는 숭고미를 전달하고 그에 몰입하도록 한다. …클로즈업을 활용한다든지 시간의 진전 속도를 조절하는 슬로모션을 활용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 예이다.” 이야기 접합의 예는 IMF 경제위기 때 박세리 선수가 공익광고에 등장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박세리는 연못 근처에 떨어진 공에 맨발로 접근했고, 홀 근처로 쳐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US오픈에서 우승을 했는데, IMF 경제위기 극복과 박세리의 우승은 교차 편집되어 대중매체를 통해 전 국민에게 전송되었다. 운동권 가요였을 법한 ‘저 들에 푸르른…’의 <상록수>가 배경으로 깔렸다. 경제위기 극복과 80년대의 민주화 운동, 그리고 박세리의 골프는 그렇게 한몸이 되었다.” 이 밖에 축구와 민족주의 사이의 긴밀한 ‘접착’은 31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지는 박정희대통령컵쟁탈 아시아 축구대회와 2002 월드컵을 생생하게 비교하는 황병주씨의 글에서, 인종이나 사회 소수자 문제가 축구에서 어떻게 포섭되고 배제되는지는 레스 백의 글에서 잘 드러난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미 프로농구 불세출의 스타 마이클 조던도 스포츠 시스템의 요구를 충실히 따랐다.

사진/ 붉은 악마는 자발성에 의한 능동적 주체인가. 대중매체에 의한 수동적 주체인가. (한겨레)
정준영씨의 글은 총론 격이다. 그는 현대 스포츠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으로 체제와의 긴밀한 통합을 꼽는다. 이는 세계적 수준, 각 국가 수준, 지역 수준 등으로 조직화된 스포츠 기구가 서로 위계를 이루며 사회의 다른 부문과 발을 맞춤으로써 가능하게 됐다. 국가간 시합을 통해 드러나는 민족주의 논리는 사회 갈등을 거짓으로 해소하고 허위의 통합을 형성하며, 대중매체와 결합한 보는 스포츠로서의 기능은 상업화의 첨단을 달린다. 스포츠 내부로 좀더 들어가보면, 운동선수들은 이제 즐거움의 추구가 아니라 육체로부터 최대의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 자기 파괴적인 연습에 매달린다. 최대의 생산성을 발휘하도록 담금질당하는 노동자들의 처지와 마찬가지이다. 성공 이데올로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일부 프로선수들의 엄청난 연봉은 다수의 하층계급 청소년들에게 일종의 신기루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스포츠 수용자들의 자발성은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할까? 정씨는 “축구가 개인기 중심의 드리블링 경기에서 팀워크를 강조하는 패스 중심의 경기로 변화한 것은 노동계급이 축구를 독자적으로 수용한 현상”이라며 긍정적인 가능성을 열어놓는다(영국의 축구가 중간계급의 후원과 관심, 그리고 노동계급의 적극적인 참여로 근대 스포츠로 성장하는 과정은 이영석 교수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붉은 악마’에 대한 ‘옹호론’을 펼치는 이동연씨의 글은 수용자의 적극적인 참여에 무척 높은 점수를 매긴다. 과거의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응원단과 구별하기 위해 영어 표기대로 명명된 서포터스는 단순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는 박수부대가 아니라 경기장에서 특정한 스타일을 표현하는 하나의 문화 주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붉은 악마’는 “하나의 기표이고, 애칭이며, 우리의 레드콤플렉스를 치유할 수 있는 유희의 언어”이다. 그의 적극적인 의미 부여는 ‘취향으로서의 축구’라는 관점에서 나온다. “미디어 자본과 스포츠 마케팅 시스템이 없이는 축구가 재생산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개인의 취향은 그러한 지배적인 장 안에서 관철되는 ‘독사’(doxa·지배적 사상)의 빗장을 풀려고 하는 ‘이견’을 생산하고자 하며, 장 안에서 자신의 특정한 입장을 취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포츠 시스템이 그리 만만한 건 아니다. 원용진 교수는 수용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능동적 주체가 되는 듯하지만, 그건 능동성이 아니라 대중매체의 논리에 수동적 주체로 걸려든 것일 뿐이라고 본다. 원 교수에 따르면, 대중매체가 현실을 재구성하고 국가와 자본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식은 숨김, 선택과 배열의 기교, 그리고 이야기 접합의 논리다. 매체는 단지 중계를 할 뿐 스포츠 내용에 어떤 치장도 하지 않음을 강조하는 숨김의 논리를 펼치지만, 재현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선택과 배열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중을 유혹하는 대중매체의 기교 “먼저 스포츠 현장이 선택과 배열에 의해 구성된다. 그리고 선택되고 배열된 스포츠 장면에 대사를 얹기 위한 선택과 배열이 구사된다. …장면구성에서의 선택과 배열은 스포츠의 웅장함과 우연성에 초점을 맞춘다. 스포츠가 자아내는 숭고미를 전달하고 그에 몰입하도록 한다. …클로즈업을 활용한다든지 시간의 진전 속도를 조절하는 슬로모션을 활용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 예이다.” 이야기 접합의 예는 IMF 경제위기 때 박세리 선수가 공익광고에 등장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박세리는 연못 근처에 떨어진 공에 맨발로 접근했고, 홀 근처로 쳐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US오픈에서 우승을 했는데, IMF 경제위기 극복과 박세리의 우승은 교차 편집되어 대중매체를 통해 전 국민에게 전송되었다. 운동권 가요였을 법한 ‘저 들에 푸르른…’의 <상록수>가 배경으로 깔렸다. 경제위기 극복과 80년대의 민주화 운동, 그리고 박세리의 골프는 그렇게 한몸이 되었다.” 이 밖에 축구와 민족주의 사이의 긴밀한 ‘접착’은 31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지는 박정희대통령컵쟁탈 아시아 축구대회와 2002 월드컵을 생생하게 비교하는 황병주씨의 글에서, 인종이나 사회 소수자 문제가 축구에서 어떻게 포섭되고 배제되는지는 레스 백의 글에서 잘 드러난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