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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거리의 10대를 보듬은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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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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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 좌파 감독 켄 로치의 따뜻한 숨결 드러낸 <스위트 식스틴>

사진/ 유럽을 대표하는 좌파 감독 켄 로치. 그는 고 해상도의 현실을 스크린에 옮기고 있다. (씨네21 이혜정 기자)
영국뿐 아니라 유럽을 대표하는 좌파 감독인 켄 로치는 예순여섯의 나이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노작을 내놓는 작가이다. 5월25일 국내에서 개봉한 <빵과 장미>(2000년작)에서 미국 환경미화원 노동자들의 삶에 카메라를 깊이 들이댄 그는 신작 <스위트 식스틴>에서 그가 너무도 잘 아는 영토,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항구도시 글래스고로 돌아왔다.

학교에서 내몰려 범죄의 소굴로

그가 올해 제55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가져온 <스위트 식스틴>은 달콤하기보다는 씁쓸함이 지배적인 거친 세상에 내몰린 10대들 이야기다. 제작일지가 제시하는 통계에 따르면 스코틀랜드에서는 한해 동안 4만명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내몰린다. 가정과 학교의 ‘보호감찰’을 받는 10대 아이들은 1만1천명에 지나지 않는다. 교문 밖에서 이들을 기다리는 건 실업, 가난, 가정폭력, 마약 그리고 온갖 범죄의 유혹이다. 이들은 자신을 지킬 어떤 작은 지붕이나 발판도 마련하지 못한 채 롤러코스트에 탄 것처럼 거친 세상에 내동댕이쳐진다. 기성의 가치관과 자신의 신념이 부닥치며 적절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하기도 전에 당장 목숨이 걸린 싸움이 코앞에서 벌어진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리암(마틴 컴스턴)은 열다섯이다. 곧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는다. 엄마 진(미셸 콜터)은 마약 딜러인 남자친구 스탄(개리 매코맥) 덕분에 감옥에 들어가 있다. 엄마는 리암이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기 전에 석방될 것이다. 태어나 지금까지 한번도 순탄한 가정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그이지만, 엄마가 석방되고 열여섯이 되면 뭔가 달라지길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밑바닥에 붙잡아매어 놓으려는 인연 또한 만만치 않다. 엄마의 남자친구 스탄이나, 양아치의 마인드를 고이 간직한 채 노년에 이른 할아버지 랩(토미 매키) 같은 인물이 그 질긴 넝쿨들이다. 가령 랩과 스탄은 엄마 면회 가는 리암을 통해 마약을 감옥에 넣어 팔아먹으려 한다.

리암은 단짝 핀볼(윌리엄 루아네)과 함께 스탄의 마약을 빼돌려 팔아먹는다. 소년가장을 자임하고 나선 리암이 불알 두쪽뿐인 그의 처지에서 저지를 수 있는 일이란 범죄말곤 찾아볼 수 없다. 눈부시게 사랑스러운 그의 누이 챈텔(앤마리 풀터)이 그를 다잡아주는 이 세상의 유일한 끈이다. 그러나 그 끈은 롤러코스트에 올라탄 10대들의 질주에 제동을 걸기엔 너무도 미약하다. 점점 간이 커진 리암과 핀볼은 갈수록 심각한 범죄의 구렁에 빠져든다. 엄마는 석방됐지만 쫓기는 신세가 된 리암은 막상 열여섯 생일을 맞지만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그는 이제 막연히 혼자 걸어가야 한다는 걸 느낀다.

갈 곳 없는 그들을 어찌할 건가

영화의 색조는 차가운 푸른빛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의 느낌은, 낯선 도시의 버스에서 내린 뒤 ‘어디로 가야 하지?’ 할 때의 막막함이 지배한다. 그러나 차가운 푸른빛으로 덮어씌우더라도 10대의 풋풋함은 숨기기 어렵다. 리암과 핀볼은 심각한 범죄를 저지를 때조차 귀엽고 애틋하다. 막막한 절망 속에서 아이로니컬하게도 어떤 홀가분함이 느껴지게 하는 작품이다.

<스위트…>는 영국 영화임에도 영어 자막을 붙였다. 글래스고 지방의 사투리는 다른 영국인들조차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지독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얼마나 글래스고라는 현장에 밀착해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연기경력이 전혀 없는 비전문배우인 마틴 컴스턴(리암)과 윌리엄 루아네(핀볼)의 자연스럽고 생동감 넘치는 연기는 영화의 사실성을 더하는 데 일조했다.

켄 로치는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사회’에 관한 거의 모든 담론이 외면당하는 오늘까지 ‘개전의 정’을 전혀 보이지 않는 자타가 공인하는 좌파 감독이다. 그럼에도 그가 건재할 수 있는 건, 그가 영화를 통해 이념을 선전하거나 누구를 선동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그는 스크린에 옮겨진 현실의 해상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칼라송>(1996), <내 이름은 조>(1998), <빵과 장미>에 이어 <스위트…>에서 네 번째 그와 함께 호흡을 맞춘 글래스고 출신의 인권변호사이자 작가인 폴 레버티는 켄 로치 이상으로 작품을 만들기 전 광범한 조사활동을 중시한다. 예를 들면 <빵과 장미>를 만들기 위해 레버티는 미국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삶의 조건과 노동환경에 관한 자료를 폭넓게 수집했다.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로치는 영국(과 동시대 세계)의 10대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누려야 마땅하다”는 생각에서 <스위트 식스틴>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칸에서 마련한 공식 기자회견 내내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은 사실주의의 거장은,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주 조금 도와줄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를 일깨우고 제기하는 데 조금 기여할 수는 있겠지만, 정말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국 정치운동이다. 영화는 거기에 아주 작은 기여를 할 뿐이다.”

칸=이상수 기자/ 한겨레 문화부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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