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잔혹상만 고발하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현대사의 생생한 교육현장 돼야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지금은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단장되어 시민들이 여가를 즐기고, 많은 학생들이 현장학습을 위해 찾아오는 곳이지만, 우리나라 감옥의 큰형님 격인 서대문형무소가 자리잡은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은 까딱하면 조선왕조의 도읍이 들어섰을 곳이기도 하다.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러 다닐 때 이곳이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이라 탐을 냈지만, 3천명의 홀아비가 탄식할 곳이라 다른 곳으로 정했다는 그럴듯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3천명의 홀아비가 탄식하는 곳’
그 땅이 무학대사의 전설처럼 3천명의 홀아비가 탄식하는 곳으로 변한 것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는 과정에서 그곳에 1908년 10월 경성감옥을 신축하였기 때문이다. 원래 대한제국 시기에 감옥을 관장하는 부서는 전옥서(典獄署·뒤에 감옥서로 개칭)였고, 전옥서가 관리하는 한성감옥- 흔히 종로감옥이라 불렀다- 은 현재의 영풍문고 부근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일제가 경성감옥을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5만원을 들여 대대적으로 신축한 것은 일제의 침략이 의병들의 거센 저항에 봉착한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제는 경성감옥을 비롯해서 전국에 8개의 감옥을 새로 세우면서, 종래 수감인원 300여명에 지나지 않던 감옥의 규모를 경성감옥 500여명을 비롯하여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넓힌 것이다. 실제로 1908년의 수감자 수는 2천여명으로 급격히 늘어났고, 이듬해에는 6천명을 넘어섰으며, 18년에는 1만1천여명, 3ㆍ1운동이 일어난 19년에는 1만5천명을 넘어섰다. 일제는 이렇게 급증하는 수감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12년에 마포형무소를 신축하는 등 전국에 모두 28개의 형무소를 새로 지었다.
의병전쟁의 초기에 일제는 생포된 의병들을 현장에서 즉결처형하는 등 학살을 일삼다가 국제적인 비난여론과 한국인들의 고조되는 반일감정을 고려하여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이들을 처벌하도록 감옥을 증설했다. 1908∼10년에 수감자가 급증한 것은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는 의병운동의 고조와 이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그 뒤 수감자가 계속 늘어난 것은 일제의 지배 아래서 종래 태형 등의 체벌이나, 유형 등 추방형 위주의 전통적인 처벌방식이 징역·금고·구류 등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는 자유형 방식으로 일정하게 변모해간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의병전쟁을 탄압하기 위해 세운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으로 그 이름이 바뀌면서 87년 11월 서울구치소가 의왕시 청계산 기슭으로 이전할 때까지 약 80년간 한국의 대표적 교도소로 기능해왔다. 이 일대에는 92년 서대문독립공원이 조성되었고, 98년에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문을 열어 많은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보안과 청사건물을 새롭게 단장한 역사관의 1층 ‘추모의 장’에는 영상실·안내실이, 2층 ‘역사의 장’에는 민족저항실·형무소역사실·옥중생활실이, 지하 1층 ‘체험의 장’에는 임시구금실과 고문실 등이 있어 일제의 각종 고문 모습과 형구들을 문헌과 고증을 통해 재현하고 있다.
해방 뒤에도 한국의 대표적 교도소
한국적인 분위기에서 당연한 것이지만,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일제 통치의 잔혹상을 고발하고 있다. 서대문 감옥을 거친 애국지사가 4만여명이고, 또 이강년(李康秊)·허위(許爲· 이인영(李麟榮) 등의 의병장, 강우규(姜宇奎)·송학선(宋學先) 등 의열투쟁을 한 열사들, 유관순(柳寬順) 등 3ㆍ1운동의 선봉에 선 투사들, 김동삼(金東三) 등 독립군 지도자들 등 모두 400여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옥사하거나 처형되었으니 일제 통치의 잔혹함을 고발하는 데에 서대문형무소보다 더 적절한 현장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필자도 학기마다 학생들과 함께 답사하는 곳이지만,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이 역사관은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첫째, 서대문형무소는 일제 강점기뿐 아니라 해방 뒤에도 한국의 대표적 교도소였다. 진보당의 조봉암(曺奉岩), <민족일보>의 조용수(趙鏞壽) 등 많은 민주인사들이 독재정권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한 곳이 바로 서대문형무소의 사형장이었다. 75년 인혁당 조작간첩사건의 피의자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지 만 하루 만에 사법살인을 당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87년 서울구치소가 이전할 때까지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투옥된 사람들 중 다수가 재판을 받기 위해 거쳐간 곳도 바로 여기다. 스산한 지하실에 전시된 각종 고문도구와 방식은 불과 10여년 전까지 이 땅에서 ‘고문기술자’라는 희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 정교하고 악랄한 방식으로 ‘진화’를 거듭하면서 이용되었다. 엄혹한 일제 강점기에는 징역을 오래 살았다 해도 17∼18년을 넘은 분을 찾기 힘든데, 대한민국 정부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최대 45년까지 가둬두었다.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지 않은 부분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심한 부분이 사법분야이고, 사법분야에서도 처벌체계와 행형분야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서대문형무소 80년의 역사에서 앞의 전반부만을 보여줄 뿐이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일제의 만행에 대한 고발현장일 뿐 아니라 독재의 만행에 대한 생생한 교육현장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충분히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역사관에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은 관계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약간의 준비만 거쳐 당장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일제 강점기 감옥의 성격을 ‘항일애국지사’들을 탄압하는 기능에만 초점을 맞출 뿐, 일제가 수형자 일반에 대한 처벌과 통제를 통해 조선의 전체 대중들을 통제·훈육·교화하려 하였는지를 보여주지 못한다.
중세의 감옥과 뚜렷이 구별되는 근대의 감옥이 보여주는 특징은 감옥이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일반대중의 복종을 끌어내고, 규율을 부여하는 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라는 점이다. 이른바 ‘비생산적인 집단’을 통제하고 복종을 잘하면서도 생산적인 노동력을 키워내는 문제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핵심적 과제로 등장했다. 봉건제가 붕괴하면서 자본가나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국가기구의 주된 관심사의 하나는 근대적인 노동규율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랑자와 빈민층을 근면하고 복종적이면서 근대적인 인간으로 개조하는 일이었다. 지속적인 감시·통제·훈련·교육을 통해 인간을 통제하는 근대적 지배양식은 국가가 통제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을 전적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관리하는 감옥을 통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더 ‘잘’ 처벌하기 위한 진화의 과정
국가의 이런 의도는 근대감옥의 건축양식과 감옥 내에서의 생활통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감옥의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형자에게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과 함께 언제나 중앙의 감시탑에 의해 감시받는다는 느낌이 들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가 벤담이 한편으로는 의회제도의 개혁을 주창한 정치적 자유 확대의 옹호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근대감옥의 건축양식을 주창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근대의 양면성을 잘 보여준다. 모든 수형자들은 서로 차단된 채 고립되어 있고 중앙의 감시탑에서는 한눈에 모든 수형자들을 돌아볼 수 있는 방사형 구조는 약간의 변형을 거쳐 서대문형무소가 1915년 증축할 때 그대로 본떠서 지금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푸코가 감옥을 관대함이 없는 학교이자 더 엄격한 병영에 비유한 것처럼 감옥에서의 일과생활은 인체시계와는 상관없는 세세한 시간규정의 대상이 된다. 뿐만 아니라 감방 내에서 수형자의 위치와 동작 역시 정확한 감시와 확인의 편의를 위해, 그리고 수형자들이 일상적으로 통제를 받는다는 느낌을 거듭 확인하기 위해 표준화된 동작을 따라하도록 되어 있다.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도입된 근대의 감옥제도에 반영된 처벌방식의 변화는 인도적인 차원의 진전이라는 면과 함께 처벌의 합리화·고도화를 담고 있다. 즉 보다 ‘덜’ 처벌하기 위해 처벌방식을 개선한 것이 아니라 더 ‘잘’ 처벌하기 위해 방식을 바꾼 것이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일제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만행뿐 아니라 이런 근대국가권력의 시민통제 방식까지 보여줄 수 있다면 더욱 생생한 역사의 교육현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역사관이 ‘일제’ 총독부뿐 아니라 ‘모든’ 국가권력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시민통제의 방식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까?
교정사(矯正史)나 행형사(行刑史) 관련자료를 보다 보면 일제나 해방 뒤 한국정부는 각각 감옥이 야만에서 문명으로 변모해가는 단선적 진화의 길을 밟은 것처럼 내세운다. 즉 일제는 조선왕조의 야만적인 감옥제도를 자신들이 근대적인 것으로 바꾸었다고 주장하고, 한국정부는 일제시대의 야만적인 행형제도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개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잘’ 처벌하기 위해 일제가 도입한 근대적 행형제도가 역사의 진보일 수만은 없는 것도 물론이지만, 불행히도 일제 강점기의 행형제도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크게 개선되었다는 주장도 5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친 감옥의 실태를 살펴보면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행형제도를 포함한 법률체계 전반은 특히 일본제국주의 잔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감옥과 죄수에 대한 기본관점은 물론이고, 행형관례와 예규에서도 누진처우제·등급에 따라 밥의 크기를 다르게 틀로 찍어주는 ‘가다밥’, 교회(敎誨) 기능, 각종 벌칙, 구타와 고문에서부터 강제전향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사회로까지 확대되는 보호관찰제와 예방구금제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잔재는 단순히 잔재로서가 아니라 분단이라는 현실에 맞춰 비상한 ‘진화’를 거듭했다.
‘중죄인’이승만의 옥중생활
필자는 1999년부터 2000년 9월 비전향 장기수 대부분이 북송될 때까지 이 분들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때 들은 50년대, 60년대 한국감옥의 현실은 이 분들이 감옥 내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특별사동에서 생활한 분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필자가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직접 듣거나 회고록을 통해 알고 있는 30∼40년대 일제 강점기 감옥의 현실보다 더 배고프고, 더 춥고, 더 힘들고, 훨씬 더 끔찍했다. 천황제 가족국가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적 관점에서 온 사회를 획일적으로 규제하려는 데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비국민’(非國民)들을 암적인 존재로 보고 말살과 영구격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나, 한국의 독재정권이 비전향 사상범들을 대한 태도나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지만, 잔혹성은 인정하기는 싫지만 한국정부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수형자들에게 일제 강점기보다 더 열악한 처우를 해준 반공독재정권의 첫 수장인 이승만의 경력이다. 이승만은 고종황제의 폐위를 꾀한 대역죄인에다 무기소지 탈옥미수를 범한 중죄인 중 중죄인으로 서대문형무소의 전신인 한성감옥에서 만 22∼28살에 이르는 1899년 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을 복역했다.
물론 이승만이 처음 투옥되었을 당시 한성감옥의 처지는 매우 열악했다. 이승만에 뒤이어 1902년에 한성감옥에 투옥된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김형섭(金亨燮)은 다다미 다섯장 정도의 좁은 감옥에 50명- 원칙적으로는 15명을 수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의 사람을 빼곡히 가두어 수감자들이 “마치 바구니 속에 서로 겹쳐 밀치락달치락하는 미꾸라지들 같다”고 자신의 회고록에 묘사했다. 그는 감방 안의 공기는 후덥지근한데다 땀냄새와 대소변의 악취가 겹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면서 빈대와 이 등 온갖 해충이 들끓던 감옥을 진저리를 치며 회고했다. 김형섭에 따르면 두 손에 칼을 차고 있어 빈대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있어 2∼3일이 지나면 아예 통증도 느낄 수 없고, 빈대가 빨아먹은 피 때문에 옷이 빨갛게 물들었다고 한다. 1899년에 간행된 한 잡지가 생지옥과 같은 감옥의 실태를 고발하면서 “우리나라도 차차 개명에 진보하려면 먼저 백성을 사랑할 것이요, 백성을 사랑하려면 먼저 옥정(獄政)을 바르게 하는 것이 제일 급무”라고 주장한 것을 보면 당시의 열악한 감옥의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이승만도 초기에는 이런 감옥의 현실 속에서 무척 고생을 했지만, 그의 옥중생활은 1900년 2월 김영선(金英善)이라는 개명 관료가 한성감옥의 서장으로 부임해오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김영선은 당시의 교도행정 전반의 개선에 큰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승만에게는 믿기 힘들 정도의 특혜를 주었다. 최근에 간행된 유영익(柳永益) 교수의 <젊은 날의 이승만 - 한성감옥생활과 옥중잡기 연구>에 의하면 김영선은 이승만에게 좋은 감방을 배정하고 옥중에서의 독서는 물론 신문논설의 집필과 저술, 그리고 심지어 옥중학당과 서적실의 개설과 운영을 허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영선은 이승만의 글쓰는 작업에 대해 일종의 보상금까지 지급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승만이 남긴 <옥중잡기>를 보면 그는 옥중에서 엄청난 양의 책을 읽었을 뿐 아니라 10여권의 책을 번역 내지 저술하고 80여편의 신문ㆍ잡지 논설을 집필, 기고하였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에게 한성감옥은 여러모로 유익한 ‘대학 이상의 대학’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이승만이 옥중에서 이런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는 아주 다행한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일제도 펜과 종이만은 빼앗지 않았다
이승만이 집권한 1950년대에 수감자의 70% 이상이 좌익수였다고 한다. 옥중에서 ‘대학 이상의 대학’을 다닌 이승만은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하게 좌익수들을 처우했다가는 그들 역시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두려워한 것일까?
1천여명의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감옥에 처넣은 독재자는 살인자로서가 아니라 12ㆍ12쿠데타와 관련하여 잠시 감옥 구경을 하고 나왔다. 그러고서는 기자들에게 하는 말이 “교도소란 데가 갈 데가 못 되니 여러분은 가지 마시오”란다. 그가 감옥에 잠시 머문 90년대 중반은 비전향 장기수들에 의하면 수인들에 대한 처우가 크게 좋아져 생지옥 같은 50년대, 60년대에 비하면 감옥이 아니라 호텔방이 된 때였다. 그는 이 호텔에서도 가장 고급스러운 호텔방에 있다 나왔지만 감옥은 갈 데가 못 되는 곳이라고 했다.
김남주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외적의 앞잡이이고 수천 동포의/ 학살자일 때 양심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전선이다 무덤이다 감옥이다”라고 절규했다. 그의 수많은 옥중시들은 우유팩을 펴서 마련한 종이에 나뭇가지나 못조각, 손톱으로 꾹꾹 눌러 쓴 것이라 한다. 어느 사람에게는 갈 데가 못 되는 곳이고 또 어떤 시인에게는 있어야 할 곳이던 감옥에서 김남주는 이렇게 깨닫는다. “아, 그랬었구나/ 로마를 약탈한 민족들도/ 약탈에 저항한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기는 했으되/ 펜과 종이는 약탈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보에티우스 같은 이는 감옥에서/ <철학의 위안>을 쓰게 되었구나”라고. 캄캄한 중세 암흑기에도 감옥에는 불이 켜져 있어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을 쓰고,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썼다. 전제군주 차르체제하의 러시아에서도 시인과 소설가에게서 펜과 종이만은 빼앗아가지 않아 체르니셰프스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고, 일제 강점기에도 일제가 우리 말 우리 성까지 빼앗아갔지만, 감옥에서 펜과 종이만은 빼앗아가지 않아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썼고, 홍명희는 <임꺽정>을 썼다. 그래서 김남주는 “펜도 없고 종이도 없는 자유대한에서 그 감옥에서 살기보다는” 차라리 고대의 노예로, 중세 농노로, 일제치하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절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감옥을 보면 사회가 보이는 법이다. 이런 기막힌 소망을 지닌 김남주 시인을 우리는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까? 독재치하에서는 바깥도 감옥이었다는 말로?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사진/ 98년부터 새롭게 단장한 서대문독립공원 내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그러나 이 역사관은 한국에서의 감옥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한겨레21)

사진/ 30년대 서대문형무소 전경.

사진/ 서대문형무소의 전신인 한성감옥에서 5년7개월간 복역한 이승만(왼쪽)은 자유롭게 집필활동을 했다. 그러나 시인 김남주는 독립된 나라에서 펜과 종이의 자유를 절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