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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이 그물망, 게임 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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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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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게임 사전심의 등급제 시행 논란… 업계 자정운동 실효 없자 공권력 동원

문화관광부(문광부)와 영상물등급위윈회(등급위)가 6월1일부터 시행하기로 한 ‘온라인게임 사전심의 등급제’를 불과 보름 남짓 앞두고 정보통신부(정통부)와 산하 온라인게임산업협의회(온산협)가 딴지를 걸고 나서면서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문광부는 지난 3월 말 온라인게임의 사회적인 폐해가 도를 넘었다며 6월부터 사전심의를 통해 이용 가능한 연령을 규정해주는 등급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문광부는 “온라인게임 내의 아이템이 수백만원을 호가하며 현금으로 거래되고 있고, 이에 따라 온라인게임과 관련된 폭력사건이 지난 한해 동안 3500건이 넘게 보고되는 등 온라인게임의 폐해가 극심해졌다”며 “적절한 등급분류 기준을 마련해 폭력성과 선정성이 과도한 게임들은 ‘18살 이용가’ 등급을 매겨 청소년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등급위는 지난 5월6일 공청회를 열고 △캐릭터 표현 △선정성 △폭력성 △사행성 △대사와 언어 등을 중심으로 한 심사평가 기준안을 발표했다.

‘18살 이용가’에 정통부 반대 의견


이에 정통부는 4월18일 ‘건전한 온라인게임 산업육성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온라인게임에 대해 공권력에 의한 사전심의 등 규제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내놓았으며, 정통부 산하 (사)한국첨단게임산업협회 산하의 사단법인인 온라인게임산업협의회(회장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는 마침 등급위의 공청회가 열리던 5월6일 ‘사전심의는 어불성설. 업계 자율심의가 바람직’이라는 거친 제목의 보도자료를 기자들에게 돌리고 “게임의 사회적 역기능은 게임 자체보다는 사용자들의 상호작용에 기인한다”며 “공권력에 의한 규제보다는 업체의 자율심의에 맡겨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온산협은 5월16일 이와 관련한 공청회를 열기로 했으나 등급위의 평가 기준안이 발표되고 난 뒤로 연기했다.

온라인게임 업체들이 ‘사전심의 등급제’에 극렬히 반대하는 까닭은 간단하다. 등급위가 “정정당당한 대결상황이 아닌 캐릭터 살해(피케이)가 일어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진 게임은 18살 이용가가 될 것”이라고 못박아, 현재 서비스되고 있는 게임의 대부분이 18살 이용가 등급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온라인게임의 게이머 중 청소년이 차지하는 비율은 40∼50%에 이르기 때문에 18살 이용가 판정을 받을 경우 50% 가까운 매출 감소를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한 게임 내 아이템 판매행위 등도 규제될 수밖에 없어 은근히 이런 아이템 매매를 방치하면서 게임의 인기를 유지해온 업체들은 격심한 매출 감소를 감수해야 한다. 대표적인 온라인게임 <리니지>는 등급제가 발표되고 난 뒤 부랴부랴 게이머들의 자체 자정운동인 ‘하나되기’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정통부의 등급제 반대는 좀더 깊은 이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통부는 “지금까지 온라인게임은 정통부 산하 정보통신윤리위원회(윤리위)의 사후심의를 받아왔으며 사후심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동안 윤리위가 온라인게임의 여러 사회적 부작용에도 제대로 된 규제안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윤리위는 그동안 인터넷콘텐츠의 사용연령 제한을 주장하는 인터넷 내용 등급제를 주장해왔는데, 유독 온라인게임에서만 등급제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렇게 정통부가 논리 오류를 범하면서 온라인게임 등급제를 반대하는 것은 온라인게임에 대한 자기 부처의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로 보인다(상자기사 참조).

온라인게임은 게이머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직접 조종하고 게임 속에서 현실 사회처럼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에 게이머들이 가장 크게 자신의 아바타에 감정을 이입하는 장르다. 이런 ‘또 다른’ 사회 속에서 자신의 캐릭터가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하거나 비난받을 경우 게이머들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른 어떤 장르의 게임보다 온라인게임의 사회적 폐해가 큰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온라인게임에 어떤 규제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게이머와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온라인게임들이 모두 ‘비공식적인’ 전체 이용가 등급을 받아 서비스하는 것 자체가 표현의 자유를 막고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성인에게는 그에 걸맞은 내용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청소년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내용의 서비스를 공급해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다.

몇몇 전문가들은 온라인게임업체들이 등급제 반대에 거품을 물 때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제조물책임법(PL법)이 오는 7월부터 시행되기 때문이다. PL법은 물건을 만들거나 판매한 기업이 그 물건의 결함 때문에 신체·재산상 손해를 입은 소비자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한 법이다. 이 법에 따르면 소비자가 제품을 잘못 쓰지 않았다는 점만 증명하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한 게이머가 <리니지>를 하다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손해배상소송을 내면 <리니지>의 서비스사인 엔씨소프트는 소비자가 게임을 잘못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경우 꼼짝없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등급위의 한 위원은 “현재 온갖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온라인게임에서 등급이라는 최소한의 규제장치마저 없으면 온라인게임들은 무더기 소송으로 공멸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게임업체들 ‘PL법’에 발목 잡혀

물론 등급제가 가장 좋은 대안은 아니다. 등급제 자체가 표현의 자유를 막고 있다는 목소리 또한 높다. 등급위가 자의적인 등급 판정으로 아예 등급보류 판정을 내릴 경우 영화에서의 경우와 똑같이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 가능성이 높다. 과도한 규제가 이제 겨우 세계 일류 수준으로 성장한 온라임게임 산업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 또한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온라인게임의 사회적 폐해는 이제 ‘게임산업 발전’이라는 ‘산업적 논리’나 ‘게임업체의 자율성 보장’ 등의 논리로 눈감을 수 있는 정도를 뛰어넘어 커다란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됐다. 게임의 아이템을 구하기 위해 성매매를 하는 일도 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다.

문광부와 등급위는 정통부의 딴지에도 불구하고 등급제를 강행한다는 방침이다. 것은 폭넓은 의견수렴을 통해 제대로 된 심의기준을 마련하는 것과 자의적인 등급 분류의 위험성에 감시의 눈을 돌리는 것이 남은 과제이다.

이형섭 기자/ 한겨레 문화부 sub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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