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공동체 꿈꾸는 ‘간첩사건’ 출신 황대권, 도시생활의 낭비에 죄의식을 느끼며…
인사동 입구에서 예비 신랑신부를 기다렸다. 황대권(47)씨와 황애경(44)씨는 결혼식을 사흘 앞두고 있었다. 당연히 둘의 얼굴에는 설렘과 기대의 표정이 드러났다. 둘은 편지로 서로를 알게 되었다. 황대권씨가 감옥에 있을 때다. 그는 공안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몸이었다. 그러다가 20년형, 그리고 다시 감형 받아 1999년에 출소하였다. 그는 13년2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황애경씨의 편지는 빙벽처럼 차고 단단한 그의 독방에 온기를 더해주었을 것이다. 글로만 알다가 막상 처음 만났을 때 흔히 소설에 나옴직한 분위기는 없었을까? 자리를 정하고 차를 주문하면서 그때를 떠올렸다.
황대권씨는 그때는 별다른 감정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옥중생활, 가장 긴 방학…
“제가 감옥에 있을 때 많은 분들이 편지를 보내주셨거든요. 애경씨도 그런 분 중 한 사람으로 생각했지요. 감옥 말년 즈음해서 편지를 받았으니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는데 편지를 재미있고 아기자기하게 썼어요.” 고운 눈망울의 황애경씨에게 장래를 함께하기로 한 동기를 물었다. “개인적인 고충이라든가 그런 것은 별로 꺼리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게 제 마음에 와닿았지요.” 결혼에 대한 생각 없이 신앙인으로 살아오던 황애경씨는 저술과 번역 일을 전문적으로 해오고 있다. 황대권씨는 둘의 만남이 ‘감이 무르익어 떨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날 사람이 때가 되어 만났다’고 표현했다. 어떤 때가 만날 때인가요? “유럽 가서 공부하는데 나이가 쉰 가까이 되어 혼자 라면 끓여 먹으며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하하….” 그는 영국에서 농업생태학 공부를 하고 지난해 10월에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누군가와’ 따스한 밥상을 나눠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사실 그동안 두 사람은 이메일을 통해 ‘종교도 같고 생각도 별 다르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은 성격’에 대해 서로 굳은 믿음을 갖게 되었다. 황대권씨는 독재시절 안기부가 발표한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투옥됐다. 대학 졸업 뒤 미국으로 유학갔다가 방학을 맞아 한국에 다니러 온 첫날 그는 끌려갔다. 1980년대 중반 독재정부에게 이런 사건 조작은 아마 식은죽 먹기였을 것이다. 출소 뒤 그는 전남 영광에 가서 농사를 지었다. 어느 날 노르웨이 TV방송국에서 그의 삶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유럽에서 그의 구명활동을 위해 애써준 국제사면위원회(AI·앰네스티) 회원들이 그를 초청하고 싶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인권에 관한 강연활동을 하면서 그는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행복했지만, 그의 마음 한쪽에는 못 다 마친 공부 생각이 가득했다. “방학하던 날 바로 감옥으로 끌려와서인지 그 안에 있는 내내 저는 방학 같았어요. 나는 공부하는 학생이다, 나가면 공부를 마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늘 있었지요. 그래서 언젠가 감옥에서의 내 얘기를 쓰게 되면 책 제목은 ‘가장 긴 방학’일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영국에 머무는 동안 그는 오랜 방학 끝의 개학을 맞았고, 마침내 런던대학에서 농업생태학으로 석사를 받았다. 복학을 해서 마침내 졸업까지 한 것이다. “영국 대학의 석사과정 1년이란 게 다른 나라 2년 과정을 압축해놓은 것이라 한눈 팔 새가 없었어요. 잘 마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만.” “억울하다 생각하면 그게 더 억울하죠”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물어본 것처럼 나도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앞날이 창창한 인생의 큰몫을 강제로 빼앗긴 그 시간이 억울하지 않은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려 해도 잘 안 돼요. 만약에 정말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내 인생 억울해서 어떻게 삽니까? 그것 또한 제 인생이니까요. 억울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네가 놓인 그 자리가 네 삶인데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인생을 얘기할 것인가 하는 거죠.” 그가 감옥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그에게 ‘다른 생각’을 막아준 큰 힘이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이 그냥 온 건 아니었어요.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정도의 내적인 투쟁을 거친 다음 이루어진 평화였지요. 들어가서 처음 4∼5년은 투쟁의 시간이었습니다. 온갖 짓을 다했지요. 정말 죽음에 이르는 절망으로 고통스러웠어요.” 자신을 고문하던 수사관에게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했을 정도의 처절한 순간을 고문 수사관에 대한 연민으로 바꾸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감옥 안에서 천주교로 개종하고 나서 마음이 평화로워졌어요. 도가사상도 저에겐 큰 힘이 되었어요. 그 전에는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얻으려 아등바등하고, 내 의지대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흐르는 대로 맡겨두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때 황애경씨가 말을 이어 받았다. “저는 이해가 좀 되거든요. 전 이분께 동정심 같은 건 거의 없어요. 고생했다는 것은 알지만 행복이라는 게 편안함과 풍요로움이 아닌, 정반대의 것으로도 가능하다고 저는 믿거든요.” 사람들이 황대권씨의 삶을 두고 ‘실패’라는 말을 쓰려고 하는데 자기로서는 이상하게 느껴질 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아직까지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다른 관점으로 오히려 성공한 게 아닌가 싶은데요?” 가장 냉정한 말이 진실로 따스한 뜻을 가질 수 있음을 난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아하, 그래서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었구나. 황대권씨는 최근 생태학 관련 책을 번역해서 출간했다. <가비오따스>. 콜롬비아의 한 생태공동체에 관한 르포다. “제가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이 현실로 진행되고 있어서 아주 감동받았습니다.” 이 책 또한 자연스럽게 ‘때가 된’ 것의 결과물이라고 그는 믿는다. “학생운동할 때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심취했지요. 독재타도운동이 대학생활의 중심이었지만 미국으로 유학 가서 우리의 삶이 제3세계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뒤 제3세계 민중들이 어떻게 강대국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느냐가 제 주된 관심사가 되었지요. 사회주의 사상도 이념보다는 수단이었어요. 그런데 마르크스가 3세계를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회의와 비판의 정점에 있던 중 감옥에 갔지요. 그 뒤 생각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게 바로 공동체운동입니다. 그 생각을 정리한 게 <백척간두에 서서>(1992)이고요.” 공동체에 대한 원형적 기억 그의 삶에는 일관성이 있다. “하긴 감옥에 오래 있었으니 그렇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요, 하하하…. 그래도 사실 감옥에 있어도 변하는 사람은 많이 변해요.” 정통 마르크시스트 하던 사람이 완전히 사상을 바꾸고, 운동에 열심이던 이가 열혈 전도사가 되기도 하고, 출소 뒤 완전한 비즈니스맨으로 변한 사람도 있었다. 변화를 탓할 수는 없지만 “삶에서 추구한 게 과연 무엇이었던가”하고 물어보게 하는 경우를 꽤 많이 만났다고 한다. 황대권씨는 자신의 삶을 “무엇이 옳은 일인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중심을 두고 시대의 추이에 따라 변화를 주는 삶이었다고 자평한다. 그 가운데 생태공동주의가 있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가비오따스’를 만들어낼 작정이다. “대가족 공동체에서 살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토건업을 하셨는데 일가들이 모여 살아 식구 수만 스무명이었어요. 그래서 어린시절 기억이 아주 행복합니다. 주위에는 늘 아이들이 있었고, 아저씨, 아주머니가 계셨고, 늘 누군가가 있었지요. 한울타리 안에서 밥도 같이 먹던 그 시절이 공동체에 대한 원형적 기억으로 제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노인문제나 아동문제 같은 게 없었지요. 문제는 프라이버시였는데 특히 부부의 프라이버시가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는 저도 궁금합니다. 하하하….” 그는 현재의 도시생활이 강요하는 소비와 낭비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 가능하면 시골이나 지방으로 내려가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병중인 아버지가 계시니 움직이기가 힘들다. “보통 사람들은 제가 농사를 짓겠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끄덕하세요. 제가 무슨 취직을 할 수 있겠어요, 활동이 자유로워요, 에라, 이것저것 안 되니 시골 내려가서 농사나 짓자고 하는 것처럼 받아들이시더군요. 결론은 같을지 모르지만 과정은 전혀 다르지요.” 황애경씨에게 어디든 같이 갈 각오가 되어 있는지 물어보았다. 새 신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요! 당연하지요!” 그 옆에서 새 신랑이 묵묵한 미소를 짓는다. 이 부부가 나아갈 길 앞에 오래도록 행복 있으라. 자유기고가

사진/ 결혼을 앞둔 황애경·황대권씨가 감옥에 있을 때 재미있고 아기자기한 편지를 써준 게 인연이 되었다. (이정용 기자)
“제가 감옥에 있을 때 많은 분들이 편지를 보내주셨거든요. 애경씨도 그런 분 중 한 사람으로 생각했지요. 감옥 말년 즈음해서 편지를 받았으니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는데 편지를 재미있고 아기자기하게 썼어요.” 고운 눈망울의 황애경씨에게 장래를 함께하기로 한 동기를 물었다. “개인적인 고충이라든가 그런 것은 별로 꺼리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게 제 마음에 와닿았지요.” 결혼에 대한 생각 없이 신앙인으로 살아오던 황애경씨는 저술과 번역 일을 전문적으로 해오고 있다. 황대권씨는 둘의 만남이 ‘감이 무르익어 떨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날 사람이 때가 되어 만났다’고 표현했다. 어떤 때가 만날 때인가요? “유럽 가서 공부하는데 나이가 쉰 가까이 되어 혼자 라면 끓여 먹으며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하하….” 그는 영국에서 농업생태학 공부를 하고 지난해 10월에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누군가와’ 따스한 밥상을 나눠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사실 그동안 두 사람은 이메일을 통해 ‘종교도 같고 생각도 별 다르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은 성격’에 대해 서로 굳은 믿음을 갖게 되었다. 황대권씨는 독재시절 안기부가 발표한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투옥됐다. 대학 졸업 뒤 미국으로 유학갔다가 방학을 맞아 한국에 다니러 온 첫날 그는 끌려갔다. 1980년대 중반 독재정부에게 이런 사건 조작은 아마 식은죽 먹기였을 것이다. 출소 뒤 그는 전남 영광에 가서 농사를 지었다. 어느 날 노르웨이 TV방송국에서 그의 삶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유럽에서 그의 구명활동을 위해 애써준 국제사면위원회(AI·앰네스티) 회원들이 그를 초청하고 싶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인권에 관한 강연활동을 하면서 그는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행복했지만, 그의 마음 한쪽에는 못 다 마친 공부 생각이 가득했다. “방학하던 날 바로 감옥으로 끌려와서인지 그 안에 있는 내내 저는 방학 같았어요. 나는 공부하는 학생이다, 나가면 공부를 마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늘 있었지요. 그래서 언젠가 감옥에서의 내 얘기를 쓰게 되면 책 제목은 ‘가장 긴 방학’일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영국에 머무는 동안 그는 오랜 방학 끝의 개학을 맞았고, 마침내 런던대학에서 농업생태학으로 석사를 받았다. 복학을 해서 마침내 졸업까지 한 것이다. “영국 대학의 석사과정 1년이란 게 다른 나라 2년 과정을 압축해놓은 것이라 한눈 팔 새가 없었어요. 잘 마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만.” “억울하다 생각하면 그게 더 억울하죠”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물어본 것처럼 나도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앞날이 창창한 인생의 큰몫을 강제로 빼앗긴 그 시간이 억울하지 않은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려 해도 잘 안 돼요. 만약에 정말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내 인생 억울해서 어떻게 삽니까? 그것 또한 제 인생이니까요. 억울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네가 놓인 그 자리가 네 삶인데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인생을 얘기할 것인가 하는 거죠.” 그가 감옥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그에게 ‘다른 생각’을 막아준 큰 힘이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이 그냥 온 건 아니었어요.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정도의 내적인 투쟁을 거친 다음 이루어진 평화였지요. 들어가서 처음 4∼5년은 투쟁의 시간이었습니다. 온갖 짓을 다했지요. 정말 죽음에 이르는 절망으로 고통스러웠어요.” 자신을 고문하던 수사관에게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했을 정도의 처절한 순간을 고문 수사관에 대한 연민으로 바꾸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감옥 안에서 천주교로 개종하고 나서 마음이 평화로워졌어요. 도가사상도 저에겐 큰 힘이 되었어요. 그 전에는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얻으려 아등바등하고, 내 의지대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흐르는 대로 맡겨두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때 황애경씨가 말을 이어 받았다. “저는 이해가 좀 되거든요. 전 이분께 동정심 같은 건 거의 없어요. 고생했다는 것은 알지만 행복이라는 게 편안함과 풍요로움이 아닌, 정반대의 것으로도 가능하다고 저는 믿거든요.” 사람들이 황대권씨의 삶을 두고 ‘실패’라는 말을 쓰려고 하는데 자기로서는 이상하게 느껴질 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아직까지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다른 관점으로 오히려 성공한 게 아닌가 싶은데요?” 가장 냉정한 말이 진실로 따스한 뜻을 가질 수 있음을 난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아하, 그래서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었구나. 황대권씨는 최근 생태학 관련 책을 번역해서 출간했다. <가비오따스>. 콜롬비아의 한 생태공동체에 관한 르포다. “제가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이 현실로 진행되고 있어서 아주 감동받았습니다.” 이 책 또한 자연스럽게 ‘때가 된’ 것의 결과물이라고 그는 믿는다. “학생운동할 때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심취했지요. 독재타도운동이 대학생활의 중심이었지만 미국으로 유학 가서 우리의 삶이 제3세계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뒤 제3세계 민중들이 어떻게 강대국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느냐가 제 주된 관심사가 되었지요. 사회주의 사상도 이념보다는 수단이었어요. 그런데 마르크스가 3세계를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회의와 비판의 정점에 있던 중 감옥에 갔지요. 그 뒤 생각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게 바로 공동체운동입니다. 그 생각을 정리한 게 <백척간두에 서서>(1992)이고요.” 공동체에 대한 원형적 기억 그의 삶에는 일관성이 있다. “하긴 감옥에 오래 있었으니 그렇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요, 하하하…. 그래도 사실 감옥에 있어도 변하는 사람은 많이 변해요.” 정통 마르크시스트 하던 사람이 완전히 사상을 바꾸고, 운동에 열심이던 이가 열혈 전도사가 되기도 하고, 출소 뒤 완전한 비즈니스맨으로 변한 사람도 있었다. 변화를 탓할 수는 없지만 “삶에서 추구한 게 과연 무엇이었던가”하고 물어보게 하는 경우를 꽤 많이 만났다고 한다. 황대권씨는 자신의 삶을 “무엇이 옳은 일인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중심을 두고 시대의 추이에 따라 변화를 주는 삶이었다고 자평한다. 그 가운데 생태공동주의가 있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가비오따스’를 만들어낼 작정이다. “대가족 공동체에서 살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토건업을 하셨는데 일가들이 모여 살아 식구 수만 스무명이었어요. 그래서 어린시절 기억이 아주 행복합니다. 주위에는 늘 아이들이 있었고, 아저씨, 아주머니가 계셨고, 늘 누군가가 있었지요. 한울타리 안에서 밥도 같이 먹던 그 시절이 공동체에 대한 원형적 기억으로 제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노인문제나 아동문제 같은 게 없었지요. 문제는 프라이버시였는데 특히 부부의 프라이버시가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는 저도 궁금합니다. 하하하….” 그는 현재의 도시생활이 강요하는 소비와 낭비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 가능하면 시골이나 지방으로 내려가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병중인 아버지가 계시니 움직이기가 힘들다. “보통 사람들은 제가 농사를 짓겠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끄덕하세요. 제가 무슨 취직을 할 수 있겠어요, 활동이 자유로워요, 에라, 이것저것 안 되니 시골 내려가서 농사나 짓자고 하는 것처럼 받아들이시더군요. 결론은 같을지 모르지만 과정은 전혀 다르지요.” 황애경씨에게 어디든 같이 갈 각오가 되어 있는지 물어보았다. 새 신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요! 당연하지요!” 그 옆에서 새 신랑이 묵묵한 미소를 짓는다. 이 부부가 나아갈 길 앞에 오래도록 행복 있으라. 자유기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