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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유쾌한 웃음, 섹시한 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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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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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무게를 한방에 날려버릴 성인용 단행본 명랑만화 3편

명랑만화는 성인물이나 아동물처럼 독자들의 연령대를 등급짓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명랑만화라면 1970년대 소년중앙의 연재물이나 <짱구는 못 말려> 같은 아동물이 떠오를 정도로 성인 독자층들과 명랑만화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만큼 성인용 명랑만화의 층은 매우 얇다. 최근 나온 단행본 만화 가운데 성인들이 즐길 만한 완성도 있는 명랑만화들이 눈길을 끈다.

사소한 것들에서 웃음이 묻어난다

사진/ 정연식 <또디-또디 동네 사람들>.
정연식씨가 두 번째로 묶어낸 <또디-또디 동네 사람들>(문학과 지성사 펴냄)은 스포츠 신문에서 연재하던 한 바닥 만화 시리즈다. 전편에서는 또디라는 강아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 반면 이번에는 또디의 주인인 이팔육과 그의 친구 천진한, 그리고 그들의 아내와 주변 사람들이 무대의 정면에 나선다. 주인공인 만화가 이팔육은 지은이 정씨가 직접 겪은 에피소드와 일상이 녹아 있을 법한 인물이다. 천진한은 길 가다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부닥치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지은이는 소시민들이 겪는 자질구레한 일상을 한 바닥 지면에 오롯이 담아내 따뜻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가진 것 없이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세번씩 웃겨준다는 약속으로 결혼에 골인한 이팔육은 아내가 기분 전환으로 머리모양을 바꾸고 왔을 때 돈걱정부터 하는 소심한 위인이다. 부부싸움 하면서 호기를 부려 전자제품을 들었다가도 금방 양말이나 수건 같은 ‘깨지지 않는’ 물건이나 던지고 만다. 그런가 하면 펑크 난 유명작가의 사인회에 대리 참석 하고는 자신이 유명작가가 된 양 흐뭇해져 거리에서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또디>가 전하는 웃음은 박장대소가 아니라 킬킬거리는 웃음이다. 이팔육과 천진한이 부딪치는 고민과 이들이 벌이는 신경전은 심각한 것이 아니다. 고작해야 음식이나 작은 돈, 금연 따위의 문제로 주변의 눈치를 보고 시치미를 떼는 식이다. 이 만화의 소재들이 하찮아 보일 수 있지만 매일매일의 삶에서 선택과 갈등의 기로는 아주 작은 문제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이 만화가 주는 즐거움은 통쾌함이 아니라 따뜻한 위안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천하무적 홍대리>나 <비빔툰>과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 그 자리에서 살아보지 않으면 “뭐 이런 걸 가지고 호들갑이야?” 할 수 있지만 월급쟁이나 결혼 초년의 부부라면 이 만화를 통해 비슷한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고 씩 웃게 되는 것이다.

당당하게 즐기는 게 죄란 말인가

사진/ 장차현실 <색녀열전>.
여성주의적 만화를 그려온 장차현실씨의 <색녀열전>(이프 펴냄)은 페미니즘 계간지 <이프>의 창간과 함께 5년 동안 연재돼온 만화를 묶은 책이다. 섹스를 소재로 한 짧은 만화 가운데 인기를 모은 작품으로 양영순씨의 <누들누드>가 있다. 두 작품은 노골적인 성을 민담형식으로 풀어간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누들누드>가 소재의 엽기성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색녀열전>은 남성주의적 성에 대한 통념을 깨는 데 초점을 두었다.

흔히 옛 여성의 성에 대한 관념은 은장도로 상징되는 정조·수절의 민담이나 설화로 전해져 온다. 그러나 노골적인 ‘남녀상열지사’를 기술한 고려시대 가사나 이 책의 각 장에서 이어지는 <진도아리랑>의 노랫말에서 드러나듯 옛날에도 일반 서민들은 성에 대한 관심과 표현을 감추거나 죄악시하지 않았다.

지은이는 목소리를 높여 여성에게 억압된 성을 비판하지 않는다.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사랑스러운 에피소드를 통해 ‘색을 밝히는 여자가 뭐 나쁜가’ 하는 식으로 유쾌하게 풀어간다. 성기나 섹스에 대한 금기 사이에서 호기심을 숨기지 않는 여성들은 은근슬쩍 남정네를 농락하기도 하고, 잠자리에서 “귀이개로 귓속을 긁는 건 귓속의 가려움을 그치게 하고자 함”이라고 자신의 ‘헌신성(?)’을 강조하는 남편에게 “숫돌에 칼을 가는 사람이 도리어 숫돌을 위해 간다고 말하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요?” 하고 당차게 받아친다. 순진한(그러나 당연하게도 성에 대한 관심이 많은 나이의) 세 자매를 농락하기 위해 접근했다가 피골이 상접해져서 돌아간 남정네 에피소드는 ‘당하는 여성’이 아니라 ‘당당하게 즐기는 여성’을 보여준다.

만화의 배경은 투기·정절 같은 고전에서 소재를 빌려오지만 만화의 메시지는 21세기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한 것들이다. 남성이 성에 대한 은어를 사용해 대화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분위기에 따끔하게 일침을 놓거나, 성에서 여성의 소극성을 여전히 미덕으로 삼는 상당수 남성들의 위선을 보기좋게 까발린다. 책의 제목에서 ‘색녀’의 색은 통상적인 색(色)이 아니라 찾을 색(索)이다. 밝히는 여자인 동시에 생각하는 여자란 뜻이다.

여덟살 꼬마 눈에 비친 이상한 세상

사진/ 키노 <마팔다>.
‘열다섯 살 이상이 보는 여덟 살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마팔다>(아트나인 펴냄)는 남미뿐 아니라 유럽·아시아 등 30개국에서 번역되어 크게 사랑받은 4컷 만화. 60년대 풍자·유머 만화로 이름을 날린 아르헨티나 만화가 키노의 대표작이다.

만 6살 유치원생인 마팔다는 수프를 지독하게 싫어한다는 점에서는 여느 또래들과 같지만 레이스 달린 원피스나 인형을 가지고 놀기보다는 베트남전이나 인플레이션, 핵전쟁에 대한 걱정이 더 많은 아이다. 친구와 체스를 두면서 말을 배치할 때 “우리 아빠가 폰(가장 약한 병졸)들이 (킹이나 퀸 앞의) 첫줄이랬어” 하고 주장하는 친구에게 “너희 아빠 사회주의자구나”라고 응수하고, 멍하니 친구들과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뭐 하니?” 묻는 엄마에게 “정치놀이”라고 대답한다. 지구본을 보면서 분쟁지역과 제국주의 국가들을 응징하는 것이 마팔다의 취미생활이다.

작가는 60년에 아르헨티나와 전 세계의 어수선한 정치상황을 배경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폭력성과 아르헨티나 정부의 무능함을 날카롭게 꼬집으면서도 아이의 천진함으로 보는 이의 어깨를 가볍게 흔든다. 그려진 지 40년 가까이 된 작품이지만, 풍자는 사라지고 선동만 남은 최근 우리의 정치만화 흐름 속에서 이 만화가 가진 촌철살인의 매력은 더욱 빛을 발한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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