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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낭만적인, 환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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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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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유>와 <오버 더 레인보우>, 완성도와 화제성 갖춘 청춘멜로의 바람

고운 순정만화체의 <와니와 준하>도, 부조리한 현실에 똑같이 적응하지 못하는 여고생과 학원강사의 애틋한 사랑 <버스, 정류장>도 멜로 바람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흥행 부진으로 대중의 시야에서 슬쩍 사라졌다. 그래서일까, 결혼이란 제도에 불순하게 항거하는 로맨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인기가 돋보인다. 4월26일 개봉해 10일 동안 서울 20만명, 전국 60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전국 300만을 돌파한 <집으로…>의 돌풍에 가리워지기는 했지만 무시할 만한 수는 아니다. 여기에 높은 완성도와 화제성을 갖춘 청춘멜로가 그 뒤를 이으면서 멜로 장르가 모처럼 하나의 블록을 형성할 조짐이다.

키스 장면 하나 없이도 뿌듯한 쾌감

<후아유>(Who Are You·5월24일 개봉, 감독 최호)는 달콤쌉싸름하다. 긴 여정 끝에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는 사랑의 우여곡절이 달콤하지만, 그 뿌리를 젊음이란 현실의 땅에 깊이 내리고 있어 가볍지 않다. 감각적이고 현란한 영상이 눈과 귀를 사로잡으려 달려드는 한편으로, ‘당신은 누구?’라는 뜻의 제목처럼 미래에 대한 의구심, 자기 정체성에 대한 회의가 넘실대는 20대의 불안한 내면 속으로 자꾸자꾸 파고든다. 애초 이 영화는 소통이 단절된 현대인의 상실감을 피시통신이라는 익명의 대화로 대체하고, 그 결실로 사랑을 꽃피우는 90년대식 멜로 <접속>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기획됐다. 게임과 자신을 대리하는 가상인물 아바타가 수놓는 인터넷, 잠시도 몸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휴대전화 등 한층 강화된 네트워크의 시대가 또다시 전면에 나설 밖에. 네트워크에서의 만남은 고도로 입체화했지만 이런 가상의 만남은 여전히 ‘얼마나 진실한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게임기획자 형태(조승우)와 수족관 다이버 인주(이나영)가 맺는 관계의 운명은 가상과 현실로 갈라진 만남의 분리를 어떻게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형태는 다니던 대기업을 접고 게임 제작에 몰두하며 화끈한 대박을 꿈꾸는 벤처 청년이다. 형태의 사무실이 있는 63빌딩 내 수족관은 사고로 수영선수의 꿈이 꺾인 인주의 일터기도 하다. 이들이 마주치는 건 63빌딩이 아니라 채팅게임 ‘후아유’에서다. ID ‘별이’로 ‘후아유’의 테스트 참가자가 된 인주는 게임의 이모저모를 매섭게 질타하고, 형태는 자신의 게임을 아프게 지적하는 별이에게 눈길을 쏟는다. 게임에 대한 인터뷰를 핑계로 인주를 찾아간 형태는 점점 그에게 관심을 갖지만, 정작 인주는 형태를 게임으로 떼돈이나 벌려고 하는 속물로 여긴다. ‘멜로’라는 아바타로 위장해 인주의 게임파트너가 된 형태는 더욱 그에게 빠지고, 인주는 자신에게 공감해주는 게임 속 파트너 ‘멜로’에게 숨겨온 속내를 열기 시작한다. 현실과 가상에서의 관계가 아주 딴판인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가상이 훌쩍 앞서가면서 만든 긴 거리를 힘겨운 현실이 추월해야 하는 만남이다.

깊은 밤, 위태로운 경보음을 내며 구급차가 질주한다. 인주는 그런 구급차에 실려간 적이 있다. “인생은 사고야. 조심해 친구, 내 인생이, 사랑이, 인격이 불안해”라고 나직히 읊조리는 인주의 모습은 포장된 감상이 아니다. 형태도 다를 게 없다. 자꾸 말라가는 회사 자금에다 흔들리는 동료들까지 모든 게 불안하다. 인생을 건 도박이 언제 깨진 쪽박으로 변할지 모른다. 이런 그들에게 사랑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본능적인 욕망의 충족? 흔들리는 자신에 대한 투사물? 굳건한 의지의 동반자? <후아유>는 그 모든 전제조건이라고 할 깊은 소통이야말로 사랑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말한다. 시대의 공기가 발랄하고 가벼울수록 더 더욱. 키스 장면 하나 없이도 뿌듯한 쾌감을 안겨주는 <후아유>의 매력은 여기서 나온다. 그게 아니라도, 네트워크의 가상공간이 얼마나 우리 현실과 한몸이 돼 있는지 실감하게 해주는 영화는 멜로 장르 밖에서 아직 없었다.

기억상실과 미스터리의 사랑

<후아유>보다 한주 앞서 개봉하는 <오버 더 레인보우>(감독 안진우)는 ‘정통’ 또는 ‘전통’의 방식을 따라간 예쁜 청춘멜로다. 소중한 만큼 더욱 비밀스레 10년 가까이 가슴 한켠에 지켜온 깊은 사랑이 결국 이뤄진다는 운명적인 로맨스다. 가상공간이 <후아유>의 키워드라면 여기선 기억이다.

방송국 기상 캐스터 진수(이정재)는 굵직한 빗줄기 속에 차를 세워놓고 누군가를 오래도록 기다린다. 프리지어꽃 한다발을 초조하게 응시하던 그의 시선을 비껴 한 여자가 스쳐 지나간다. 마침내 포기한 듯 차를 출발시킨 진수에게 불현듯 커다란 트럭이 달려든다. 수수께끼 같은 상황이 벌어진 뒤, 진수의 몸은 말짱하게 회복됐지만 머리에서 이상징후가 나타났다. 너무나 사랑했다는 그녀가 누군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부분 기억상실증이다.

기억상실증 환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게 IMMR 현상이라고 한다. 어느 한 장면이 스냅사진처럼 자꾸 떠오르는 것으로, 중요한 기억을 복구하려는 무의식의 작용이다. 창가의 환한 빛 속에 서 있는 얼굴 없는 여인이 진수에게 나타나는 IMMR 현상이다. 진수는 대학시절의 사진 동아리 ‘메모리즈’ 친구들을 통해 강박처럼 나타나는 그녀를 찾는 여행을 시작한다. 진수를 주로 돕는 건 지하철 분실물 관리소에서 일하는 연희(장진영)다. 진수와 절친한 대학 친구의 연인인 연희는 과거의 살풋한 기억들을 하나씩 되살리는데, 이들은 조금씩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간다. 진수의 사고, ‘기억들’이라는 이름의 동아리, 연희의 일터 모두 기억과 관련된 것들이다.

기억상실증이란 도구로 관계의 희미한 미스터리를 유지하며 만날 듯 만나지 않는 묘미와, 과거의 그림자 속으로 막 사라지려는 젊은 시절의 기억을 유쾌하게 떠올리며 향수를 자극하는 솜씨가 <오버 더 레인보우>의 감칠맛이다. 본론은 멜로 특유의 판타지다. 진수는 어쩌면 저렇게 깊고 오래가는 사랑을 간직할 수 있을까 하고 감탄하게 하며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소망의 씨를 거부감 없이 심어준다.

로맨스를 통한 전복적 발언, 가상과 현실이 겹쳐진 현실을 사는 젊음의 고민, 지연된 만남을 통해 완벽한 사랑을 꿈꾸게 하는 판타지 등 메뉴에서 어떤 걸 집어도 인상적인 게 요즘의 멜로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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