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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배설의 쾌감, 화장실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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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9-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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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 소변, 침, 정액, 방귀. 직장에서 일하고 동료들과 어울릴 때는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시침떼고 모른 척하는 게 정상인 소재들이 90년대 중반 이후 코미디영화가 가장 사랑하는 메뉴다. 개봉을 앞둔 <무서운 영화>말고도 개봉중인 <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린>에서 짐 캐리는 옆집 마당에 엉덩이를 까고 대변을 보며, 누워서 뱉은 왕가래침에 얼굴이 범벅이 된다.

아무리 막가는 영화라도 금기시하던 소재들이 화장실 낙서에서 스크린으로 올라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은 역시 <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린>의 짐 캐리와 이 영화의 감독인 패럴리 형제다. 짐 캐리가 소변이 담긴 맥주를 마시고 똥벼락을 맞으며 좌충우돌한 <덤 앤 더머>는 1994년 제작돼 전세계적으로 3억달러를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화장실 유머’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패럴리 형제는 <킹핀>(1996)에서도 약지손가락에 챔피언 반지까지 새긴 우스꽝스런 의수를 하고 다니는 모자란 주인공을 동원해 외설스럽고 장애인을 서슴없이 조롱하는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겼지만 여전히 평단에서는 싸늘한 외면을 받았다.

화장실 유머에 ‘무식한’ 관객뿐 아니라 평론가들까지 ‘참신하다’는 개전의 정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역시 패럴리 형제의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1998) 때부터다. 이때도 영화에서 가장 강렬했던 장면은 벤 스틸러의 바지 지퍼에 낀 고환과 카메론 디아즈의 앞머리를 헤어젤 대신 세운 정액이었지만 스릴러적 기법과 깔끔한 로맨틱코미디의 외피를 둘러 저능아들의 카니발에 그친 전편들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거나 적어도 평단의 유보를 이끌어냈다.

화장실 유머를 문화비평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린 영화는 지난해 개봉한 <오스틴 파워>다.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라는 미국의 유명한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뜬 코미디언 마이크 마이어스가 북치고 장구친 이 영화는 여주인공 이름을 ‘섹스를 잘하는’(shagwell)으로 짓고 성기를 가리키는 속어의 퍼레이드가 벌어지는 등 외설의 수위가 높아졌지만 해체된 가족제도의 풍자, 90년대 시대정신의 조롱이라는 그럴싸한 평을 들었다.

이 밖에도 넘치는 성적 에너지로 안절부절하는 10대들의 성장담(?)인 <아메리칸 파이>(1999)와 귀여운 초등학생들의 입에서 ‘니 엄마와 붙어먹을 놈’이라는 욕이 동요부르듯 튀어나오는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2000) 등 화장실 유머는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오스틴 파워>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읽은 적이 있는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90년대 말부터 시작된 화장실 유머의 만개를 일종의 사회적인 ‘퇴행현상’으로 본다. 배설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즐거워하는 것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배변을 대견한 업적으로 생각하고 화장실 물을 내릴 때 이 ‘업적’과의 결별을 슬퍼하거나 자랑스러워 하는 항문기로의 퇴행”과 유사한 감정상태라는 것이다. 맥주로 착각해 정액이나 소변을 마시는 장면이 이런 영화들에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것은 좋은 예다. 맥주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소변을 상징한다. 심씨는 “아직 엄격주의의 외투를 벗지 못한 80년대만 해도 <스타워즈>나 <인디아나 존스> 등에서 나타나듯 아버지와 경쟁하고 극복하려는 오이디푸스 시기에 속했다. 피터팬 신드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때만 해도 자아를 통제하고 자극하는 초자아가 존재했다. 그러나 화장실 유머엔 초자아가 부재한다”고 설명하면서 “화장실 유머 영화는 이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무책임한 부모들로부터 초자아 대신 물질적 풍요만을 물려받은 90년대 아이들이 과잉 배설욕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는 것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발전이나 승화의 욕구 못지않게 사람의 무의식에는 퇴행의 욕구가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화장실 유머를 즐기는 자신의 정신건강을 의심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영화란 판타지이고 화장실 유머는 왕자나 공주가 되고 싶은 욕망에 가려져 있는 우리 안의 위반과 배설의 욕망을 대리 성취해주는 또다른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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