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에 숨결 새기는 예술제본가 백순덕씨… 가죽·비단 등으로 활자의 감동을 두배로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잇따르는 의문의 죽음이 발생하는 곳은 교회 안의 어두침침한 고서가다. 이 서가 깊숙이 숨겨져 있는 책 한권이 바로 죽음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오랜 세월의 때가 절어 있는 낡은 가죽 표지와 누렇게 변색된 양피지 종이에 필사된 활자들이 순탄치 않은 이 책의 운명을 암시해주는 이 고서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희극편이다. 웃음이 죄악으로 간주되던 중세 시대에 금서가 된 이 책을 읽는 수도사를 징벌하기 위해 손가락에 침을 묻혀 넘기는 부분마다 누군가 독약을 묻혀놓은 것이었다.
비단 이 영화뿐 아니라 많은 영화에서 두꺼운 가죽 장정의 오래된 책들은 신기하며 비밀스러운 세계를 열어보이는 문으로 등장한다. 한장 한장 손으로 바느질과 풀칠을 해 조심스럽게 표지를 입힌 이런 책에는 기계적 공정을 통해 대량생산되는 책보다 많은 숨결이 들어가 있는 만큼 많은 사연과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다. 이처럼 책의 거죽을 아름답고 견고하게 만드는 예술제본은 책에 단순한 심미적 모양새 이상의 생명력과 품격을 불어넣는다.
책의 앞장과 뒷장에 예술혼을…
신비로운 고서가 등장하는 영화의 배경이 그렇듯 예술제본 하면 라틴어 활자가 새겨진 중세나 근대 유럽을 떠올리게 되지만 한글을 담고 있는 예술제본도 없지 않다. 5월12일까지 서울 도산공원 뒤 아티그램 갤러리에서 열리는 ‘앞장과 뒷장(Recto-Verso)전’에서는 염소가죽이나 아름다운 비단으로 제본된 한국 책을 만날 수 있다. 이 전시는 국내 유일의 예술제본가인 백순덕(39)씨가 한국에서 활동한 지 4년 만에 처음으로 여는 개인전이다. 백씨는 프랑스 파리의 예술제본장정학교 유카드(UCAD)에서 공부한 뒤 프랑스 정부가 인정하는 한국 최초의 를리외르(예술제본장정가) 자격을 따고 돌아와 99년 홍익대 앞에 작업실 렉토-베르소를 열었다. “저도 파리에 가기 전까지는 예술제본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어요” 백씨가 예술제본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어쩌면 우연, 어쩌면 필연이다. “대학 졸업하고 2년 반 동안 고 제정구 선생이 만든 부천의 ‘보금자리’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출판사에 들어갔어요. 1년 정도 일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이 침체되고 고민도 쌓였지요. 결국 뭔가 새로 시작해보자는 생각에서 무작정 파리로 떠났어요.” 단지 프랑스어를 전공했고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91년 샤를드골 공항에 내렸던 백씨는 출판 관련 학과와 학교를 기웃거리다 유카드를 소개받았다. 그림에는 도통 소질이 없었지만 절의 판각을 맵시 있게 만들어내는 목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무언가 뚝딱뚝딱 만들기를 좋아하던 그였다. “유카드의 작업실에 들어가니 중세시대에 발을 딛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너무나 비현실적인 황홀함이라고 할까요? 빨려들어가듯 공부를 시작했지요.” 그러나 듣도 보도 못한 예술제본이라는 걸 배운다는 그에게 한국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던지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먹고살 수 있는 걸 배워와야지, 그딴 걸 왜 하냐, 언제 철들래, 거의 뭐 학대 수준으로 구박을 받았죠.” 생활고에 쪼들리고 미래가 불안했지만 공부하는 만큼은 더없이 행복한 유학 시절을 보냈다고 백씨는 회고한다. 앤티크숍을 연상시킬 정도로 고풍스런 작업기구들이 널려 있는 그의 작업실 분위기는 백씨가 느꼈다는 행복의 빛깔을 가늠케 한다. “하다못해 제본할 책 한권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웬만한 프랑스 사람들은 대물려 받은 책 몇권씩은 갖고 있으니까 현지 학생이라면 집에서 한권 가져오면 그만인데 저는 돈도 없고, 어떻게 옛날 책을 구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파리 근교 벼룩시장까지 발이 부르트도록 무작정 다 뒤지고 다녔지요.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나온 셰익스피어 전집이나 19세기 말의 낭만주의 소설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란 말도 못하죠” 종이 표지의 단순함을 넘는 재료들
7년간의 유학생활을 접고 백씨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98년 말. 하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가 진행되던 때라 먹고살 길은 더욱 막막했다. 그는 무작정 출판사 문을 두드렸다. 그래서 처음 받게 된 일이 문학과지성사의 ‘깊이 읽기’ 시리즈 예술제본 제작. 새로운 시리즈 출간 때 출판사에서 해당작가에게 기념으로 선물하는 장정본 제작이 그의 몫이다. 그 이후 기독교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필사한 성경 제본도 간간이 하고 있다. 우피, 양피, 염소, 가오리, 뱀가죽 비단, 종이, 밀겨 등 책표지의 재료는 종이 표지만 보아온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책 한권을 제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달 정도. 책 표지를 뜯어내고 내지를 한장 한장 분리해 며칠 동안 압축하고, 다시 한땀 한땀 꿰맨다. 표지를 다 씌운 뒤 제목으로 쓰이는 금박글자도 찍는 게 아니라 일일이 손으로 새기는 것이다. “다 만들고 나면 정이 듬뿍 들어서 사실 고객한테 내줄 땐 자식 시집보내는 것처럼 아깝고 서운하기도 해요. 그래도 나 때문에 이 책이 100년 이상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흐뭇하게 보낼 수 있죠.”
지금까지 한국에 들어와 30여권의 책을 제본한 백씨가 제본작업보다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작업실에서의 제본교육이다. 현재 일주일에 한번씩 그에게 지도를 받는 수강생은 23명이나 된다. 그가 이번 전시를 추진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귀국 직후부터 미래에 대한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허덕일 때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그의 작업실 문을 두드린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이만큼의 발전을 함께 축하하기 위해서다. 제본 주문 증가는 더딘 데 비해 제본을 직접 배워보려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현상이다. “애서가나 전문가들은 여전히 예술제본에 대한 무관심한 반면, 일반인들의 관심은 꽤 높은 편이에요.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책 사랑은 감격스럽지만, 제본을 보존과 복원이라는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너무 장식적인 것에만 관심이 치중되지 않는가 하는 우려도 듭니다.” 제본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국내에서 재료를 구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만 해도 예술제본가들이 몇백명 되기 때문에 제본용 가죽이나 비단을 구하기가 쉬운데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나 일본 재료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는 게 아쉽죠. 비경제적이기도 하고.”
제본 작업도 중요하지만 백씨의 10년 프로젝트는 국내에 예술제본학교를 세워서 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예술제본가를 양성하는 것이다. “제본문화는 그 사회의 책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제본은 책을 사치스럽게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간직할 만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거든요. 예술제본이 늘어나고 소장본 전문 출판사도 생기면 작게나마 도서문화에도 바람직한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나만의 특별한 책을 갖고 싶은가
헌책방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요즘 바스러질 듯 노랗게 빛바랜 종이에서 퀴퀴한 시간의 냄새가 묻어나는 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한번쯤 이런 냄새와 함께 책을 읽어본 사람은 기억할 것이다. 그때 낡은 책꽂이에서 꺼내 읽었던 <난장이를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무진기행>의 알싸한 충격이 지금 보기 좋은 활자체로 다시 읽는 같은 작품의 감동보다 훨씬 강렬하다는 것을. 책도 다 읽고 나면 다 쓴 클리넥스통이나 화장품통처럼 버리는 소모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짜릿한 감동을 선사한 내 인생의 책을 이 세상에 단 한권뿐일 특별한 책으로 만들어 보관하는 것도 멋진 일일 듯하다. (전시문의 02-326-1145)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예술제본은 책의 심미적 기능과 함께 생명력과 품격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백순덕씨가 작업하고 있는 모습. (박승화 기자)
신비로운 고서가 등장하는 영화의 배경이 그렇듯 예술제본 하면 라틴어 활자가 새겨진 중세나 근대 유럽을 떠올리게 되지만 한글을 담고 있는 예술제본도 없지 않다. 5월12일까지 서울 도산공원 뒤 아티그램 갤러리에서 열리는 ‘앞장과 뒷장(Recto-Verso)전’에서는 염소가죽이나 아름다운 비단으로 제본된 한국 책을 만날 수 있다. 이 전시는 국내 유일의 예술제본가인 백순덕(39)씨가 한국에서 활동한 지 4년 만에 처음으로 여는 개인전이다. 백씨는 프랑스 파리의 예술제본장정학교 유카드(UCAD)에서 공부한 뒤 프랑스 정부가 인정하는 한국 최초의 를리외르(예술제본장정가) 자격을 따고 돌아와 99년 홍익대 앞에 작업실 렉토-베르소를 열었다. “저도 파리에 가기 전까지는 예술제본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어요” 백씨가 예술제본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어쩌면 우연, 어쩌면 필연이다. “대학 졸업하고 2년 반 동안 고 제정구 선생이 만든 부천의 ‘보금자리’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출판사에 들어갔어요. 1년 정도 일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이 침체되고 고민도 쌓였지요. 결국 뭔가 새로 시작해보자는 생각에서 무작정 파리로 떠났어요.” 단지 프랑스어를 전공했고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91년 샤를드골 공항에 내렸던 백씨는 출판 관련 학과와 학교를 기웃거리다 유카드를 소개받았다. 그림에는 도통 소질이 없었지만 절의 판각을 맵시 있게 만들어내는 목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무언가 뚝딱뚝딱 만들기를 좋아하던 그였다. “유카드의 작업실에 들어가니 중세시대에 발을 딛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너무나 비현실적인 황홀함이라고 할까요? 빨려들어가듯 공부를 시작했지요.” 그러나 듣도 보도 못한 예술제본이라는 걸 배운다는 그에게 한국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던지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먹고살 수 있는 걸 배워와야지, 그딴 걸 왜 하냐, 언제 철들래, 거의 뭐 학대 수준으로 구박을 받았죠.” 생활고에 쪼들리고 미래가 불안했지만 공부하는 만큼은 더없이 행복한 유학 시절을 보냈다고 백씨는 회고한다. 앤티크숍을 연상시킬 정도로 고풍스런 작업기구들이 널려 있는 그의 작업실 분위기는 백씨가 느꼈다는 행복의 빛깔을 가늠케 한다. “하다못해 제본할 책 한권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웬만한 프랑스 사람들은 대물려 받은 책 몇권씩은 갖고 있으니까 현지 학생이라면 집에서 한권 가져오면 그만인데 저는 돈도 없고, 어떻게 옛날 책을 구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파리 근교 벼룩시장까지 발이 부르트도록 무작정 다 뒤지고 다녔지요.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나온 셰익스피어 전집이나 19세기 말의 낭만주의 소설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란 말도 못하죠” 종이 표지의 단순함을 넘는 재료들

사진/ 국내 유일의 예술제본가로 활약하는 백순덕씨. 그는 한권을 제본하는 데 한달을 투자한다. (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