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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외국인 책벌레는 모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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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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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부 책은 한권도 없는 이상한 영어 헌책방 ‘애비 책다락방’의 김은희씨

사진/ 문을 연 지 2년이 돼가는 애비 책다락방의 김은희씨. 헌책방 아이디어는 남편인 미국인 피터 맥네븐에게서 나온 것이다. (김종수 기자)
관광특구 이태원에도 보도 블록 교체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애비 책다락방’ (Abbey’s Book Nook)으로 가는 길은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이슬람 사원 쪽으로 꽤 땀을 나게 하는 오르막길을 가다 보면 세탁소가 나온다. 드라이 클리닝 냄새를 풍기며 겨울양복이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 옆으로 점집 간판이 보이고, 쌀가게도 문을 열었다. 그 다음이 애비의 책방이다. 맹자 엄마였다면 ‘글하기에’ 그다지 좋은 장소가 아니라고 짐을 꾸렸을지도 모른다.

“미군부대 손님 하나도 없어요”

“어휴, 저 아래쪽은 집세가 장난이 아니에요. 그나마 여기도 다행이지요.” 서점주인 김은희(31)씨는 혀를 내두른다. 열두평 남짓한 서점을 둘러보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 과연 이곳이 교보에도 없는 책, 외국에서도 구하다 찾지 못한 책이 있는 서점, 과학소설 마니아가 ‘너무 좋고 값싼’책을 구했다고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는, 정녕 그 서점이란 말인가! 나는 셰익스피어·하디·예이츠와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들과 가게 밖으로 슬리퍼를 끌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함께 바라보았다.


국제적이긴 하지만 책과는 거리가 먼 곳 아닌가요? 왜 하필 이태원인가요? “맨 처음에는 미군부대가 옆에 있으니 고정적인 수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완전히 잘못 짚었다는 것이다.“거기서 오는 손님들은 하나도 없어요. 처음엔 쟤네들 어쩜 저렇게 책을 안 읽을 수 있을까 하고 혀를 찼지요.” 우연히 부대 안의 도서관을 보러갔다가 그쪽 사람들은 단념했단다. 공짜 새책을 두고 헌책을 누가 돈주고 사겠는가? 그럼, 주된 고객층은? “외국인 영어교사들이지요. 90%예요. 나머지는 사업차 온 사람이나 그 가족, 또 유학생 출신, 외국서 살다온 사람들, 교수나 작가 분들도 꽤 오시고요.”

이 서점은 세살짜리 딸의 이름인 애비를 따서 지은 것이다. 문을 연 지 2년이 되어간다. 헌책방 아이디어는 그의 남편 피터 맥네븐(36)씨에게서 나온 것이다. 미국 아이다호 출신으로 한국에 와서 영어를 가르치던 남편은 평소에도 소문난 책벌레였다. 책을 손에 달고 살고 싶었지만 외서수입 코너는 책값이 너무 비쌌다. 한번 산 책을 친구들과 순번을 정해 마르고 닳도록 돌려보았지만 갈증을 풀기에는 턱도 없었다. 고민하던 차에 아예 직접 책방을 차리기로 한 것이다.

서울 산업대 교환교수로 일하는 남편은 강의 때문에 서점에 없었다. 그 틈을 타서 김은희씨는 자기가 사장임을 강조했다. “책에 관한 한 남편이 독재자니 경영상으로는 마땅히 내가 사장”이라는 말이다. “남편은 가게로 들어오는 책이 자기 손을 거치지 않고 서가로 직행하는 것을 참질 못해요.”

미국인 남편과의 만남

문을 열 때 미국에서 전부 2만8천여권을 들여왔는데 그 중 3분의 1이 남편책이었다. 김은희씨는 학교에 다니던 시절 지도교수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처녀 적에 <한겨레21>의 열렬한 독자인 그는 남편이 자신의 평소 기준치에 어느 정도 부합했다고 한다. 더구나 친구들까지 “넌 아무래도 얼굴을 좀 깎아야 시집갈 수 있지 않겠니?”라고들 하는데 피터는 그의 얼굴을 그대로 “아름답다”고 한 첫 남자였다. 바로 이 사람이구나 싶어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영어 중고책을 국내에서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처음엔 정말 틈나면 미국 가서 책을 사와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너무나 비현실적인 계획이었다. ‘비행기표·체류비·운송비 등등 책값을 도저히 건질 자신이 없어서’ 미국에 가기 보다, 일을 마치고 귀국하는 외국인들에게서 책을 되사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산 가격의 3분의 1을 쳐준다. 그 중에는 “한번 밖에 안 읽었다”면서 값을 더 달라는 사람도 있다. 그때마다 ‘영세업자’인 그는 안타깝다.

취급하는 책 중에는 초판본이나 희귀본도 더러 있다. 1810년에 나온 책들을 그냥 권당 2천원에 판 적도 있다. 굳이 헌책이 더 좋은 까닭이 있는가? “사람의 향기가 묻어나는 것이지요. 책에 줄을 그은 것이나 이름 적힌 것을 보노라면 타임머신 타고 그 시대로 올라가는 것 같아요.”

중고책이 주는 편안함에 젖어 얘기를 하다 보니 손님이 전혀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아채었다.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 물었다. 돈벌이는 되세요? “그냥 가게 세 내고 먹고살기 바쁘지요. 돈벌려고 한 일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평일 오후는 손님이 거의 없어요. 주로 주말에 몰리지요.” 그는 남의 이야기하듯 태평이다. 모든 서점 주인들이 그렇듯 이곳에도 단골이 있다. 하지만 모든 단골들이 언제나 책 파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중 한 단골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선생인데 그에게 이곳은 아예 친구를 기다리는 장소가 되었다. “들어오자마자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뭔가 부스럭부스럭하는 거예요. 가보니 책을 옆에 산처럼 쌓아두고 삶은 달걀을 까먹고 있더라고요. 주스 마시고 빵도 먹고….” 그렇게 5시간 정도 있다가 친구에게 전화를 받고서야 나가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들러서 두세 시간씩 책을 보는 손님도 있다. 바쁠 때는 무슨 책이 어디 있는지 아예 그 손님한테 묻는 게 빠르다. 남편은 그런 손님에게도 늘 “비 나이스!” 하라고 신신당부한다. 어쨌든 서점에는 사람이 있는 게 보기 좋은 게 사실이다. 책은 사람의 숨결을 쏘일 때 진정한 가치를 발하기 때문이다.

‘영어공부’맹신하는 한국엄마 고객들도

마침내 손님이 한명 왔다. 단골인가 보다. 주인은 근황을 묻고 커피를 권한다. 계절만 겨우 맞춰 입은 옷에 커다란 배낭을 멘 그 외국인은 오래 걸리지 않고 두세권의 책을 뽑아 계산을 하고는 나간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외모에서 나타나나요? “아니에요.” 그는 ‘노는 애들’ 중에도 책 읽는 사람은 꼭 읽는다고 한다. 혓바닥에 피어싱을 하든 배꼽에 뭐를 달든 책을 읽는다는 말이다. 손님 중에는 후줄그레하게 차려입었는데 5개 국어를 구사하면서 평생을 학문에 바친 지성인으로 판명된 이도 있다.또 이 손님은 시간 떼우려고 왔구나 했는데 수십만원어치를 사간 적도 있단다. 그때마다 주인은 “죽을 죄를 졌습니다”를 마음속으로 되뇌인다.

“사람은 겉만 보고 평가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저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번번이 실수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나 논픽션 유나 고전을 읽는 고급독자와 시드니 셸던 유의 책만 집는 독자들의 구별은 거의 정확하다고 자부한다.

외국인들이 많이 모이니 우연히 토론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가 그는 애국지사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역사교과서 문제로 한국과 일본이 대립하고 있을 때 일본인 작가가 책방에 들렀다. 이런저런 얘기 도중 그 일본인이 “한국 사람들은 왜 남의 나라 일에 참견하느냐, 위안부 문제도 우리가 전에 다 배상하지 않았느냐, 더 이상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등 한국인은 정말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단다. 듣고 있던 김은희씨는 “일본은 독일의 태도에서 배우는 게 없느냐? 과거 없는 미래는 있을 수 없다”며 격분하여 다시는 ‘내 가게’에 오지 말라고 내쫓아버렸다. ‘영어가 딸렸지만’ 끝까지 해내고 말았다. “별별 사람을 다 만나요.” 관광특구에서 그는 외교사절 노릇도 당당히 하고 있었다.

그의 서점 손님 중에는 영어교육에 열심인 한국의 엄마들도 있다. “애들을 데리고 많이 오시지요.” 아들이 영어 웅변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우리 아이는 토익점수가 얼마다고 자랑하는 엄마 중에는 헌책이 아닌 다른 일에 더 관심이 많다. 아이 미국유학 보내려는 데 어쩌면 좋으냐는 유학상담에서, 싸게 개인 레슨하게 사람을 소개해달라는 등등 여러 가지다. 그때마다 그는 모든 법석보다 ‘한권의 책’이 더 나은 효과를 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영어가 아이의 운명을 바꿔놓는다고 믿는 부모들이 저지른 일에 기가 막힌다.

“와, 영어 잘하게 한다고 혀 자른다는 말 들었어요. 어이없는 맹신이지요, 맹신!” 낮잠에서 깨어나 엄마 품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엄마 까까”를 계속 왼다. 동네 유아원에 다니는 애비는 한국말을 훨씬 더 잘한다. 김은희씨는 그게 당연하다고 믿는다. “그래, 좀 있다 사줄게. 기다려.”

영어책방이라면서 ‘한번 만에 끝나는 영어회화’ 교재 한권 없는 서점. 그렇지만 이태원 외진 골목에 들어앉은 이 구닥다리 애비 책다락방은 기괴한 영어열풍이 불어닥친 이 땅에 외로이 떠 있는 ‘정상적인 외국어 학습’의 섬과 같은 곳이 아닐까?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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