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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민속음악은 오지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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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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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민속음악의 선두주자 치프턴스…최근 발표한 베스트 앨범이 보여준 ‘세계화’

“한국인의 취향에는 이 나라 음악이 잘 맞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종종 있지요. ‘이 나라’의 후보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나라는 이탈리아와 아일랜드인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우 ‘반도 근성’과 ‘다혈질’이 공통점으로 제시됩니다. 반면 아일랜드를 거론할 때는 이 나라가 앵글로색슨족과 이들이 세운 대영제국에 의해 시달렸고 현재도 분단까지는 아니더라도 에이레 섬의 일부가 대영제국의 영토에 포함되어 있다는 역사적 사실이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즉, 한국이 대일본제국에 시달렸다는 사실이나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다는 점 등등.

아일랜드 민속악기가 주류

하지만 이런 생각에 근거는 별로 없습니다. 간혹은 전문가를 자처하는 분들까지 말씀하셔서 저를 당혹스럽게 할 때가 있지만 그건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이 있을 때 유사성을 찾고 싶은 마음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정작 이탈리아 사람이나 아일랜드 사람이 이런 말을 들으면 어리둥절할 것이니 이런 생각은 그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사실 이런 생각이야 ‘팝’에 가까워진 음악을 들을 때나 드는 생각이고 막상 그 나라의 민속 음악을 들으면 깨끗이 사라집니다. 오늘 들어볼 아일랜드의 민속 음악(Irish folk music)은 한국의 민속 음악과는 번지수가 전혀 다릅니다. 한국에서 통상 ‘포크’라고 부르는 ‘통기타 가요’와도 영 다른 것은 물론입니다.


아일랜드가 민속 음악의 강국이라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그래서 아일랜드의 포크 음악인이야 무수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존재는 치프턴스(The Chieftains)라는 그룹이라는 점에는 이론이 없습니다. ‘퍼브’(pub)라고 불리는 선술집에서 연주되는 아일랜드 포크 음악을 우아하고 품위 있는 공연장으로 옮겨놓은 장본인이 이들입니다.

이들이 결성된 시점은 1963년으로 거슬러올라가니 비틀스나 롤링스톤스와 비슷하게 경력을 시작한 셈입니다. 단, 이들은 처음에는 전업적 음악인으로 활동할 생각이 없이 ‘부업’으로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그렇지만 1975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배리 린든>의 사운드트랙에 라는 곡이 수록되면서, 이들의 음악은 영국은 물론 미국 시장에서도 높은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한해에 하나꼴로 앨범을 발표하는 다작 활동을 통해 1980년대 이후에도 대중성과 평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일랜드의 록 음악인 밴 모리슨과 함께 작업한 1988년작 , 그리고 믹 재거, 마크 노플러, 라이 쿠더 등이 대거 참여한 1995년 작품 등은 ‘월드 뮤직의 명반’이자 ‘팝 음악과 월드 뮤직의 크로스오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이들은 권위와 명성에 빛나는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전통 민속 레코딩’ 부문이나 ‘최우수 월드 뮤직 앨범’(Best World Music Album) 부문에서 거의 단골손님처럼 상을 받았습니다.

치프턴스의 핵심 인물은 패디 몰로니이고, 핵심 악기 역시 그가 연주하는 윌리언 파이프입니다. 본래 백파이프는 아일랜드보다는 스코틀랜드가 더 유명하죠. 이번에 여왕 모후 장례식 때 빨간 옷에 까만 모자 쓴 병정들 같은 군악대가 불어젖히는 파이프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윌리언 파이프라는 말은 윌리언이 갈릭어로 ‘팔꿈치’를 뜻한다는 말을 부연해야 할 것입니다. 원뿔형의 지관(指管)을 가지고 있어서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대략 두 옥타브의 음역, 세 종류의 드론(drone)을 낼 수 있습니다. 드론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지속적으로 우-웅거리면서 울리는 소리’라고밖에 표현을 못하겠습니다. 백파이프의 경우에는 저음인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윌리언 파이프 소리는 ‘빽빽 불어젖히다’는 표현에 어울릴 정도로 소리가 크고 우렁차면서도 묘한 애조와 향수를 자극합니다. 또한 레귤레이터라고 부르는 세개의 조(調, key)를 가진 지관이 있는데 이것들은 부가적 파이프로서 이를 이용해서 화음도 낼 수 있습니다.

재편집 대신 ‘피처링’ 선택

사진/ 아일랜드 음악에 애조 띤 향수를 불어넣는 전통악기 윌리언 파이프
그 외에도 치프턴스는 아일랜드의 민속 악기들을 많이 사용합니다. 6개의 구멍이 나 있고 입으로 부는 ‘호루라기’인 틴 휘슬, 바이올린을 말하지만 악기에 대한 해석이 좀 다른 피들, 프레임을 가진 북의 일종인 보우란, 조그만 아코디언은 콘쎄르니타, 그리고 플루트 등이 이들이 사용하는 악기입니다. 음반을 보시면 각 연주자의 이름을 알 수 있으니 그건 생략합니다. 그동안 악기를 다루는 멤버들은 몇 차례 변동이 있었지만 이런 악기편성의 근간은 유지되었습니다. 가끔은 팝이나 록의 악기들을 도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때도 이들 특유의 아일랜드 색(色)이 훼손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다가 글이 ‘월드 뮤직 강의: 아일랜드편’식으로 되어 버렸군요. 죄송합니다. 이들이 이번에 그룹 결성 40주년을 맞이하여 이라는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30주년이나 40주년이면 ‘베스트 음반’을 재포장해서 발매하는 것이 보통이라는 점은 요즘 한국 대중음악계를 돌아봐도 느낄 수 있는 현실입니다. 사실 그동안 치프턴스의 이름으로 발매된 음반들 중 ‘Best’, ‘Greatest’라는 제목을 가진 재편집음반은 매우 많습니다. 서너 차례 음반사를 이적한 사실도 이런 ‘여러 종의 베스트 음반’을 낳은 요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베스트 음반을 발매한다면 ‘지겹다’, ‘속보인다’는 반응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창작곡 중심이라기보다는 ‘전래민요’를 재해석하여 연주하는 일이 많은 이들에게는 선택의 폭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점도 작용합니다. 물론 이제서야 한국의 대중에게 소개하는 마당이라면 이런 말은 불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택한 전략(?)은 과거에 녹음한 음원들을 재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팝과 록의 유명 아티스트들을 초대, 그쪽 말로 피처링(featuring)해서 재녹음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몇몇 트랙은 재수록한 것도 있고 라이브 공연을 레코딩한 것이나 영화 사운드트랙으로부터 커트한 것도 있습니다. 이런 예외를 제외하고 ‘피처링 아티스트’의 면면을 보면 꽤 화려합니다. 눈부시게 삐까번쩍한 것이 아니라 은은하게 반짝입니다. 지기 말리(밥 말리의 아들), 아트 가펑클, 다이아나 크럴, 조니 미첼, 엘비스 코스텔로, 롤링 스톤스, 린다 론슈태드, 스팅 등등. ‘토종’ 음악인인 코어스, 밴 모리슨, 시너드 오코너도 물론 나왔습니다.

중국 민속 음악과 ‘퓨전’하기도

사진/ 결성 40주년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 스팅(앞줄 오른족)과 함께 선 치프턴스.
그래서 이 음반의 시작은 ‘아일랜드 포크 음반’을 예상한 사람에게는 의외로 레게 뮤지션인 밥 말리의 곡인 [Redemption Song]으로 시작하고, 그 다음에도 아트 가펑클이 예의 그 천상의 보컬로 다이애너 크럴과 듀엣을 합니다. 캣 스티븐스의 노래로 유명한 [Morning Has Broken]입니다. 코어스는 [I Know My Love]를 특유의 말괄량이 정서로 노래합니다. 여기까지는 ‘편곡만 아일랜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이전 레코딩을 재수록한 시너드 오코너의 [Foggy Dew] 이후로 분위기는 본격적으로 아일랜드 섬 깊숙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조니 미첼, 스팅, 엘비스 코스텔로 등의 대가급마저도 일부러 아일랜드풍으로 노래부르려고 애쓰는 것 같습니다.

어, 그런데 후반부에 가면 이색적인 트랙도 있습니다. 린다 론슈태드, 로스 로보스와 함께한 [Guadalupe]는 ‘아일랜드’라기보다는 ‘멕시코’나 ‘텍사스’를 떠올리게 하고, [Full of Joy]에서는 중국어로 밴드 멤버를 소개하는 멘트에 이어 아일랜드 민요를 중국의 민속 음악과 ‘퓨전’해서 들려줍니다. 이런 것에 비하면 신시내티 팝스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Chasing the Fox] 같은 곡은 시시하게 들립니다. 그러니까 이제 월드 뮤직이란 ‘세계의 오지에 남아 있는 이국적 음악’이 아닌 게 확실합니다. 그건 지구촌 ‘속’의 지방 음악(local music in global village)입니다.

그래서 치프턴스의 음반을 듣다가 저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름 아니라 김민기, 정태춘, 김두수처럼 ‘contemporary Korean folk’라는 영어 표현에 어울리는 분들의 음악도 빨리 세계시장에 진출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을 갖게 됩니다. 정 안 되면 이분들의 음악활동 40주년에는 국내에서라도 이렇게 성대한 축제를 베풀어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현준 l 음악평론가 http://homey.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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