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도, 자기 자신과도 타협할 수 없었던 화가 장승업의 일대기 <취화선>
내로라 하는 권세가들이 예약해놓은 그림들이 잔뜩 밀려 있는데도 오원 장승업(최민식)은 한달 넘게 술을 껴안고 방안을 뒹굴 뿐이다. 한 제자가 조심스레 그림 재촉을 하자 장승업이 눈을 부라리며 내뱉는다. “꼴려야 그리지 이놈아!”
조선시대 화가 오원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취화선>은 임권택 감독의 소망이 담긴 자화상 같다. 임 감독은 “왕이 불러 그림을 청해도 자기가 싫으면 궁궐을 뛰쳐나온 자유인”으로, “세속적인 가치를 초개같이 버리고 치열한 장인정신으로 살아낸 환쟁이”로 장승업을 평가한다. 장인정신으로 충만한 자유인, 이건 뛰어난 예술가들의 공통된 초상이다. 임 감독의 눈은 거기에 닿아 있다.
자학으로 가득찬 무의식
장승업의 주된 이미지는 고통이다. 부대끼는 맘을 달래려 밤새 술 퍼먹다 취기로 그린 그림은 술병을 들고 춤추며 서 있는 원숭이다. “그림은 역시 학문 속에서 우러나오는 품격”이라며 추사 김정희를 들어 자신의 그림을 깎아내리는 ‘먹물’들의 공세가 괴롭다. 사대부들을 가리켜 “지놈들 보고 싶은 것만 내 그림에서 볼 뿐”이라고 퍼붓는다. 이것보다 더 평생을 괴롭히는 건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증이다. 술에 취해 중국풍의 그림체를 따라하는 자신의 처지를 장승업은 원숭이로 표출했다. 꽃과 새, 산수, 인물 등 ‘우아한’ 그림만 그리며 당대의 인기 화가로 떠올랐지만 정작 그의 무의식은 이처럼 자학으로 가득 차 있다. <취화선>은 좀더 욕심을 부린다. 천주교에 대한 병인박해(1866), 개화파의 3일천하(1884), 동학농민운동(1894)의 주변에 늘 장승업을 세워놓는다. 낡은 세상을 뒤집으려는 이들 곁에 놓아두고 어떻게 하나 지켜본다. 이런 대목들에서는 임 감독과 함께 각본을 쓴 도올 김용옥의 손길이 물씬 풍긴다. 하지만 장승업은 주변을 겉돌 뿐이다. 장승업이 생래적으로 가까이한 건 여자다. 그는 역관 이응헌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 딸 소운(손예진)을 만나 첫사랑을 느끼고, 몰락한 양반 출신 기생 매향(유호정)과 만나고 헤어짐을 되풀이하며, 닳고 닳은 기생 진홍(김여진)과 질펀하게 살기도 한다. 그가 정성을 드린 것은 오로지 그림과 술과 여자다. 장승업의 쉼없는 방랑기를 화면의 호흡으로 따라붙으려 했을까.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은 특유의 롱테이크(길게 찍기)를 없애다시피 하며 화면을 숨가쁘게 넘겨간다. 덕분에 이야기 전개는 속도감을 얻었다. 칸은 임권택을 선택할 것인가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칸영화제는 임권택 감독을 ‘뒤늦게’ 발견했다. 2000년 <춘향뎐>을 처음으로 초청했지만 화려한 붉은 카펫을 밟아볼 기회만 줬다. 올해 칸은 <취화선>으로 다시 한번 임권택 감독을 불렀다. 이제 <취화선>에 대한 국내의 기대는 흥행 여부보다 수상 여부로 모아지고 있다. <춘향뎐>이 탐미스런 영상과 판소리가 어울리는 미학에 집중했다면, <취화선>은 여전히 아름다운 영상 미학에다 격변하는 시대와도, 자기 자신과도 타협할 수 없었던 예술가의 집념을 추가했다. 동아시아에서 <취화선>과 중국 지아장커의 <미지의 즐거움> 2편만 경쟁부문에 나섰다는 ‘아시아적 희귀성’에다가, 칸은 노장을 예우해왔다는 관례 아닌 관례를 보면 수상 가능성은 <춘향뎐>보다 높아보인다. 그러나 작품 안으로 들어가면 ‘기세’는 한풀 꺾인다. 고통과 좌절을 드러내기 위해 허공을 향해 괴성을 질러대는 장승업의 모습이나, 떠도는 그의 발길을 따라 너무나 아름답게 잡아낸 자연의 풍경은 너무 직설적이어서 껄끄럽다. 또 장승업의 정신적 지주인 개화파 김병문(안성기)이 동학농민운동을 가리켜 “실패할 수밖에 없어, 더 힘을 길러야 해”라고 일갈하는 식으로 시대를 배치한 짜임새는 역사교과서처럼 어딘가 허전하다. 그래서일까, 직유법이 아닌 은유법의 미덕이 유난히 아쉽다. 5월10일 개봉.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장승업의 주된 이미지는 고통이다. 부대끼는 맘을 달래려 밤새 술 퍼먹다 취기로 그린 그림은 술병을 들고 춤추며 서 있는 원숭이다. “그림은 역시 학문 속에서 우러나오는 품격”이라며 추사 김정희를 들어 자신의 그림을 깎아내리는 ‘먹물’들의 공세가 괴롭다. 사대부들을 가리켜 “지놈들 보고 싶은 것만 내 그림에서 볼 뿐”이라고 퍼붓는다. 이것보다 더 평생을 괴롭히는 건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증이다. 술에 취해 중국풍의 그림체를 따라하는 자신의 처지를 장승업은 원숭이로 표출했다. 꽃과 새, 산수, 인물 등 ‘우아한’ 그림만 그리며 당대의 인기 화가로 떠올랐지만 정작 그의 무의식은 이처럼 자학으로 가득 차 있다. <취화선>은 좀더 욕심을 부린다. 천주교에 대한 병인박해(1866), 개화파의 3일천하(1884), 동학농민운동(1894)의 주변에 늘 장승업을 세워놓는다. 낡은 세상을 뒤집으려는 이들 곁에 놓아두고 어떻게 하나 지켜본다. 이런 대목들에서는 임 감독과 함께 각본을 쓴 도올 김용옥의 손길이 물씬 풍긴다. 하지만 장승업은 주변을 겉돌 뿐이다. 장승업이 생래적으로 가까이한 건 여자다. 그는 역관 이응헌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 딸 소운(손예진)을 만나 첫사랑을 느끼고, 몰락한 양반 출신 기생 매향(유호정)과 만나고 헤어짐을 되풀이하며, 닳고 닳은 기생 진홍(김여진)과 질펀하게 살기도 한다. 그가 정성을 드린 것은 오로지 그림과 술과 여자다. 장승업의 쉼없는 방랑기를 화면의 호흡으로 따라붙으려 했을까.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은 특유의 롱테이크(길게 찍기)를 없애다시피 하며 화면을 숨가쁘게 넘겨간다. 덕분에 이야기 전개는 속도감을 얻었다. 칸은 임권택을 선택할 것인가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칸영화제는 임권택 감독을 ‘뒤늦게’ 발견했다. 2000년 <춘향뎐>을 처음으로 초청했지만 화려한 붉은 카펫을 밟아볼 기회만 줬다. 올해 칸은 <취화선>으로 다시 한번 임권택 감독을 불렀다. 이제 <취화선>에 대한 국내의 기대는 흥행 여부보다 수상 여부로 모아지고 있다. <춘향뎐>이 탐미스런 영상과 판소리가 어울리는 미학에 집중했다면, <취화선>은 여전히 아름다운 영상 미학에다 격변하는 시대와도, 자기 자신과도 타협할 수 없었던 예술가의 집념을 추가했다. 동아시아에서 <취화선>과 중국 지아장커의 <미지의 즐거움> 2편만 경쟁부문에 나섰다는 ‘아시아적 희귀성’에다가, 칸은 노장을 예우해왔다는 관례 아닌 관례를 보면 수상 가능성은 <춘향뎐>보다 높아보인다. 그러나 작품 안으로 들어가면 ‘기세’는 한풀 꺾인다. 고통과 좌절을 드러내기 위해 허공을 향해 괴성을 질러대는 장승업의 모습이나, 떠도는 그의 발길을 따라 너무나 아름답게 잡아낸 자연의 풍경은 너무 직설적이어서 껄끄럽다. 또 장승업의 정신적 지주인 개화파 김병문(안성기)이 동학농민운동을 가리켜 “실패할 수밖에 없어, 더 힘을 길러야 해”라고 일갈하는 식으로 시대를 배치한 짜임새는 역사교과서처럼 어딘가 허전하다. 그래서일까, 직유법이 아닌 은유법의 미덕이 유난히 아쉽다. 5월10일 개봉.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