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은 없다, 다른 색깔의 사랑일 뿐…최근 영화·드라마 등에서 욕망에 당당한 여성들
영화·소설·드라마는 대개가 허구다. 이 상상력의 덩어리는 현실의 감성을 정교하게 반영할수록 힘을 얻는 특이체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생활의 매우 작은 한 조각을 현실의 속도감에 가깝게 재현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그토록 많은 이들이 빠져들 수 없다. 불륜이라는 ‘음습한’ 소재에 다가선 요즈음 작품들이 예사롭지 않다. 제도로서의 결혼을 지키려 하기보다 그 안에 부조리한 모습으로 갇혀 사는 인간에게 더 연민어린 애정을 보낸다. 그 순간 불륜은 가정을 파괴하는 불온한 범법행위가 되기 전에 인간의 본성을 배반하지 않는 ‘또 하나의 사랑법’으로 탈바꿈한다. 제도에 집착하는 사랑이나 인간이야말로 어리석은 게 아니냐고까지 한다. 놀랍게도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극장에 가도, 텔레비전을 켜도, 소설책을 집어들어도 자기 욕망에 당당한 여성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그곳에 애처롭게 눈물 흘리며 남자의 ‘처분’만 기다리는 여성 캐릭터는 더 이상 없다. 현실 한켠에 분명히 존재하나 웅크리고 있던 여성들이 허구를 빌려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걸까, 아니면 현실에 뿌리가 닿지 않은 판타지일 뿐일까. 판타지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이들 작품의 구체성이, 사실감이 너무 뛰어나다.
#1-결혼 전
“네가 결혼한다면, 그건 일종의 범죄가 아닐까? 처녀여야 한다는 소리 따위가 아냐. 네가, 너 같은 스타일이 결혼하면 신랑 하나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난, 자신 있어!” “?” “절대로 (외도를) 들키지 않을 자신! 근데 나랑 정말 결혼할 생각이 없어?” “없어. 이거 하난 분명해. 너나 나나 열두살 이후 끊임없이 누군가를 좋아했어. 그리고 사랑해왔어. 그런데 그 감성이, 그 감각이 결혼하는 걸로 땡 하고 끝날 거 같아? 웃기는 얘기지.”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4월26일 개봉, 감독 유하)에서 결혼을 웃기는 짓으로 확신하는 대학강사 준영(감우성)과, 결혼의 안정감도 쉼없는 사랑도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연희(엄정화)가 짧게 나누는 대화다. 준영은 자신의 신념대로 연희와의 사랑이 결혼으로 ‘끝장’나는 걸 거부한다. 결혼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여기는 연희는 준영 대신 맞선으로 만난 의사의 청혼을 계산 끝에 받아들인다. 연희의 계산된 행동은 계속 된다. 의사와의 결혼식 전에 준영과 먼저 ‘신혼여행’을 떠나고 이를 증거로 남길 기념사진까지 잔뜩 찍는다. 결혼 뒤에는 준영을 만나 집 구할 돈을 꿔줘가며 그를 독립시킨다. 그러고는 두집 살림을 시작한다. 준영의 자취방을 신혼집처럼 꾸미고, 이웃에게는 방긋방긋 웃으며 주말부부라고 속이면서. 이제 연희는 둘 사이의 관계에서 주체를 넘어 주인이 됐다. 신혼 아닌 신혼집에 불쑥 찾아가 잠시 부부 사이로 변신하는 순간의 선택권은 전적으로 연희의 몫이니까. 준영은 숨겨진 애인 노릇을 하는 게 그리 못마땅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희에게 남편의 전화가 걸려오면 숨죽여 있어야 한다든가, 언제 올지 모르는 연희가 남긴 체취를 며칠씩 홀로 감당해야 하는 데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그만 오라고 소리도 쳐보고 투정도 부려본다. 한동안 연희의 발길이 끊기기도 한다. 하지만 준영과 연희는 이런 식의 사랑도 지속 가능하다는 걸 조금씩 확인해간다. “결혼에 대해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남자와, 결혼제도의 질서에 철저히 충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완벽하게 이용하고 위반해버리는 여자의 기묘한 사랑이야기를 통해 결혼제도가 갖는 허위의식을 드러내고자” 하는 영화의 기획의도는 내 이웃의 평범한 남자·여자로 잘 변신한 감우성·엄정화의 연기에 힘입어 논쟁의 씨를 제대로 뿌린다. #2-결혼 뒤
“나와 결혼하려고 들면 사회에서 생매장시키겠다고 협박한 놈(아버지)이나, 그렇다고 나를 선뜻 포기하고 도망간 놈이나 똑같아.”
<위기의 남자>(MBC 월·화 밤 9시55분, 이관희 연출, 이선미·김기호 극본)에서 연지(배종옥)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겁하긴 마찬가지”라며 동주(김영철)를 매섭게 몰아붙인다. 동주의 사랑을 잃고 해외에서 그림에 몰두하다 10년 만에 화려하게 귀국한 연지와 유부남 동주는 불과 두번째 만남에서 잠자리를 같이했다. 아내 금희(황신혜)와 세 아이들이 눈에 밟혀 아무 일도 없는 것으로 해달라는 동주에게 연주는 “비겁하다”는 말 이외에 할 말이 없다. 마음을 수습하고 또다시 외국으로 나가려는 연주 앞에 동주가 나타나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관계를 갖는다.
지난 4월16일 4회까지 방송한 이야기를 이렇게 줄이면 통속극의 면모를 딱 갖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여러 군데 있다. 아예 처음부터 혼외정사를 갖게 하고 시작하는 ‘대담성’이 불륜 드라마로 화제를 뿌린 <애인>이나 <푸른 안개>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여성 캐릭터가 도드라져 보인다. 연지에게서 불륜에 대한 죄책감의 그늘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자기 감정에 솔직한 것이 진짜 무엇인지 먼저 따진다. 여기서 나온 확신과 행동 사이에는 망설임의 틈이 없다. 금희는 남편이 옛 연인과 외도 중이라는 걸 확신하는 순간 분노하지만, 쉽게 무너져내리지 않는다. 전업주부에서 일을 하는 직장인으로 막 변신한 참인데다가 젊고 매력적인 직장 상사 준하(신성우)가 다가서는 중이다. 드라마가 4회를 지나면서 금희가 새로운 사랑의 주체로 스스로 나설지, 그렇다면 그게 어떤 모습일지 궁금증을 더한다.
건설회사 중견 간부에서 안식처이자 도피처로 귀농을 택한 동주가 위태롭게 자기의 삶과 사랑을 개척해나가는 모습을 통해 ‘위기의 남자’를 보여준다는 게 드라마의 출발이다. 하지만 “주부 역시 과거처럼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만은 않고 나름대로 자기 자신을 찾기 원한다”는 연출자의 말이 무색하지 않게 연지와 금희의 캐릭터는 동주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3-결혼 너머
“단지 아내와 남편이라는 한줄에 매달린 마리오네뜨 인형의 관계, 지구의 반대편에서 서로 대롱거리며 줄이 끊어지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벗어나기 힘든 ‘관계’만 남은 것 같았다.”
올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권지예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부부는 공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완벽에 가깝게 분리돼 있다. 그럼에도 부부라는 형식적 관계를 청산할 생각이 없는 그들은 서로에게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존중해주는 방식이 현명한 길이라고 깨달은 듯하다. 남편대로, 아내대로 제3자와 사랑에 빠지고, 상대방이 혼외정사를 하고 있다는 걸 문득 알게 된 뒤에도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첫 작품집 <꿈꾸는 마리오네뜨>(창작과비평사 펴냄)의 표제작에서 아내는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남편을 그리워하다 낯선 사내에게 몸을 기대고 만다. 아내는 죄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임신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초조해하면서 프랑스 남편을 찾아가 2년 만에 관계를 ‘재개’한다. 그곳에서 아내는 남편에게도 정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순간 복수심에 불타기도 하지만 곧 차분해진다. 아이가 있는 서울로 되돌아오는 길에서 아내는 오히려 더 성숙해진 느낌을 남긴다.
이상문학상을 받은 <뱀장어 스튜>는 이 같은 구도를 더욱 ‘쿨’하게 발전시킨다. “인생이란 화려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장엄하지도 않으며, 다만 뱀장어의 몸부림과 같은 격정을 조용히 끓여내는 것”과 같다는 걸 잘 아는 아내는 파리에 있는 남편과 서울에 있는 정부를 동시에 사랑하면서 그들 각자를, 스스로를 존중한다. 그곳에 불륜은 없다. 삶을 조용히 지탱해주는 색깔 다른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꿈꾸는 마리오네뜨>에서 아내가 비행기에서 만난 속물스런 젊은 여자는 이를 천박하다 싶을 만큼 단순화하지만 명쾌하게 말한다. “언니, 남편도 훈련시키기 나름이라고요. …오랜 만에 보니까 더 정도 나고 볼 때마다 새맛인 거 있죠? 남편도 나도 서로 간섭 안해요. 서로의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선을 추구하자는 게 우리 부부의 모토예요.”
권지예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결혼이란 제도를 수긍하면서 동시에 결혼 저 너머에 살고 있는 이들이다. 여성작가의 손에서 나오기는 마찬가지지만 여느 ‘불륜소설’과 다른 점이다. 상대방의 한눈팔기에 상처받지 않는 여성, 결혼을 포기하지도 않고 결혼 안에 갇히지도 않은 여성, 그들이 갑자기 쏟아져나와 스크린과 소설과 텔레비전을 뒤덮기 시작했다. 이건 현실과 무관한 우연의 일치일까?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난, 자신 있어!” “?” “절대로 (외도를) 들키지 않을 자신! 근데 나랑 정말 결혼할 생각이 없어?” “없어. 이거 하난 분명해. 너나 나나 열두살 이후 끊임없이 누군가를 좋아했어. 그리고 사랑해왔어. 그런데 그 감성이, 그 감각이 결혼하는 걸로 땡 하고 끝날 거 같아? 웃기는 얘기지.”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4월26일 개봉, 감독 유하)에서 결혼을 웃기는 짓으로 확신하는 대학강사 준영(감우성)과, 결혼의 안정감도 쉼없는 사랑도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연희(엄정화)가 짧게 나누는 대화다. 준영은 자신의 신념대로 연희와의 사랑이 결혼으로 ‘끝장’나는 걸 거부한다. 결혼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여기는 연희는 준영 대신 맞선으로 만난 의사의 청혼을 계산 끝에 받아들인다. 연희의 계산된 행동은 계속 된다. 의사와의 결혼식 전에 준영과 먼저 ‘신혼여행’을 떠나고 이를 증거로 남길 기념사진까지 잔뜩 찍는다. 결혼 뒤에는 준영을 만나 집 구할 돈을 꿔줘가며 그를 독립시킨다. 그러고는 두집 살림을 시작한다. 준영의 자취방을 신혼집처럼 꾸미고, 이웃에게는 방긋방긋 웃으며 주말부부라고 속이면서. 이제 연희는 둘 사이의 관계에서 주체를 넘어 주인이 됐다. 신혼 아닌 신혼집에 불쑥 찾아가 잠시 부부 사이로 변신하는 순간의 선택권은 전적으로 연희의 몫이니까. 준영은 숨겨진 애인 노릇을 하는 게 그리 못마땅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희에게 남편의 전화가 걸려오면 숨죽여 있어야 한다든가, 언제 올지 모르는 연희가 남긴 체취를 며칠씩 홀로 감당해야 하는 데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그만 오라고 소리도 쳐보고 투정도 부려본다. 한동안 연희의 발길이 끊기기도 한다. 하지만 준영과 연희는 이런 식의 사랑도 지속 가능하다는 걸 조금씩 확인해간다. “결혼에 대해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남자와, 결혼제도의 질서에 철저히 충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완벽하게 이용하고 위반해버리는 여자의 기묘한 사랑이야기를 통해 결혼제도가 갖는 허위의식을 드러내고자” 하는 영화의 기획의도는 내 이웃의 평범한 남자·여자로 잘 변신한 감우성·엄정화의 연기에 힘입어 논쟁의 씨를 제대로 뿌린다. #2-결혼 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