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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성인만화, 봄바람 살랑~ 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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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4-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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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절 대표하는 걸작 복원부터 시작…서서히 기지개켜는 성인만화

우리에게도 성인만화잡지가 3권이나 출판되던 시절이 있었다. <투엔티세븐> <빅점프> <미스터 블루>에 성인 순정만화잡지인 <마인> <화이트> <나인>까지 보태면 모두 6종이었다. 스포츠신문에 실린 성인만화를 고급스러운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성인만화 전성시대가 오는 것처럼 생각되던 1997년, 만화계가 그토록 반대했지만 정부가 강행한 청소년보호법에 의해 성인만화는 시장에서 강제퇴출되고 말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 우리는 성인만화를 쉽게 볼 수 없었다.

지난 2001년, 전반적인 출판만화 시장의 불황은 구매력 있는 성인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출판시장의 불황은 일반 단행본 출판사들을 만화시장에 뛰어들게 하기도 했다. 만화전문 출판사처럼 물량을 쏟아내기가 불가능한 단행본 출판사들은 한 작품을 통한 마케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몇몇 히트작이 등장했다. 자연스럽게 서점에서 팔리는 만화에 관심이 모아졌다. 서점에서 팔리는 만화는 크게 어린이 기획만화와 성인만화로 나눌 수 있다. 아직 좋던 시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성인만화 붐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장편 서사만화의 부흥


성인만화의 호시절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현세의 <남벌>과 이두호의 <임꺽정>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작품은 모두 장편으로 이루어졌고, 이야기의 재미를 강조한 창작극화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무래도 성인들은 호흡이 짧은 옴니버스보다 장편 극화를 선호한다.

2002년 4월, 비록 복간된 것이기는 하지만 어른들이 볼 만한 역사극화 2편이 출판되었다. <매주만화>와 <스포츠조선>에 연재한 <객주>와 <임꺽정>은 각각 1992년, 1995년 단행본으로 출판해 성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두 작품은 ‘뚝심의 만화’라고 하는 이두호의 섬세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선이 어떻게 만화적 재미를 만들어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갓이나 한복자락이 보여주는 선이나 기와집, 초가집, 관청에서 대갓집, 거리의 객주에서 산채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조선의 풍광은 사실감을 더해주며, 개성이 넘치는 인물들은 원작의 이야기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여기에 더해 수백년의 시공을 거슬러올라가 만화 속으로 바로 들어온 듯한 수많은 인물들은 이두호 만화의 가장 큰 장점이다. 다양한 조연들의 개성은 주인공 천봉삼(<객주>), 임꺽정(<임꺽정>)의 드라마틱한 삶이 여러 권의 만화를 한 달음에 읽게 한다. <객주>가 10권(바다출판사), <임꺽정>이 32권(자음과 모음)이니 며칠 밤을 샐 작정을 해야 한다.

두 작품이 남성 주인공을 내세운 남성적 이야기를 다룬 만화라면 방학기의 <꽃점이>는 여성 주인공을 등장시킨 보기 드문 역사극화다. 2002년 4월 현재 모두 13권(도서출판 채널)이 출판된 <꽃점이>는 바리데기 설화에 그 바탕을 둔 작가의 걸작 <바리데기>를 새롭게 그려 <소포츠조선>에 연재한 작품이다. 조선시대에 가장 천한 계급인 무녀와 소몰이 총각의 사랑이야기와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흥미롭다.

유명 작가 중심으로 출간

사진/ <타짜>
70년대 <사랑의 낙서>와 80년대 <발바리의 추억>으로 유명한 강철수의 대표작들도 2002년을 맞이해 속속 재출간되고 있다. 2001년 10월과 11월 <미아리 보고서>와 <시인수첩>을 워밍업삼아 출판하더니, 2002년에는 장편극화인 <팔불출>을 연이어 새롭게 출판하고 있다. <팔불출>은 <사랑의 낙서>에서 보여준 강철수 특유의 치밀한 드로잉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발바리의 추억> 이후 작품에서 보이는 간결한 스타일이 아니라 섬세한 극화 스타일은 고우영이 <임꺽정> <일지매>에서 보여준 바로 그 선의 맛이다. 바보나 바보가 아닌 것 같은 주인공 팔불출을 내세운 서사도 강철수의 다른 만화보다 짜임새가 있다.

역사극화가 주로 예전의 작품을 다시 찍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면 여러 성인만화 중 가장 꾸준히 사랑을 받는 만화는 허영만·김세영 콤비의 <타짜>다. <스포츠조선>에 연재되는 이 작품은 무려 3부 9권까지 출판될 정도로 성인들 사이에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일명 ‘타짜’라고 하는 노름 기술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예전작 <48+1>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일본 작가 중에서 우리나라 성인들에게 오랫동안 지속적인 사랑을 받는 작가는 우라사와 나오키다. 그는 최근 <몬스터>와 <20세기 소년>을 연재하였는데, <몬스터>는 18권 마지막 권의 출간을 앞두고 팬들을 설레게 한다. 현재 8권까지 출간한 <20세기 소년>은 20세기풍 모험만화로 30대들의 코드에 가장 적절한 작품이다.

일간신문이나 스포츠신문에 연재한 짧은 한 바닥 만화도 성인들을 위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 단행본 출판이 활발하다. 홍승우의 육아가족만화인 <비빔툰>은 2001년 10월 출간한 뒤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30대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궁상스럽지만 밉지 않은 유머를 담아낸 정연식의 <또디>도 2002년 4월에 출판되었다.

추억을 노려라

2001년에서 2002년에 출간된 복간만화들은 대부분 성인들의 추억을 노린 작품들이다. 첫 선두주자는 바다출판사의 명랑만화 시리즈. 길창덕 <꺼벙이>, 신문수 <도깨비 감투>, 윤승운 <두심이 표류기>, 이진주 <달려라 하니>는 어린이 만화지만 어린이에게 팔리기보다는 어른들에게 팔리고 있다. 70∼80년대 유년시절을 보낸 성인들은 바다출판사의 명랑만화 시리즈로 자신의 추억을 복원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이와 비슷한 기획으로 출판한 작품이 2002년 G&S에서 3권으로 복각한 <로보트태권V>다. 1976년 당시 원작을 만화로 옮긴 이 작품은 <로보트태권V> 시리즈 중 두번째 ‘우주작전편’이다. 역시 로봇물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로보트태권V>를 본 어른들이 주독자층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 1년여 동안 만화시장 최고의 히트 아이템이던 지난 시절 히트작의 복간도 청소년이 아니라 성인을 겨냥하고 있다. <드래곤볼> <슬램덩크 완전판>은 그 만화에 열광하며 청소년 시절을 보낸 성인 남성 독자들을 겨냥하고 있으며, <베르사이유의 장미> <올훼스의 창> <나의 지구를 지켜줘>는 성인 여성 독자를 겨냥하고 있다. 마리모 라가와의 <아기와 나>가 가장 최근에 합류한 작품이다.

근래 만화의 출판경향을 되짚어보면 여러모로 오랜 시간 심의와 규제의 틈에서 숨죽여온 성인만화의 새로운 시작을 읽어낼 수 있다. 만화는 연령을 넘어서 모든 계층이 함께 즐기는 매체다. 어린이·청소년·성인들이 자신에게 맞는 만화를 볼 수 있을 때, 침체의 늪에 빠진 한국 출판만화 시장의 활성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주로 추억의 힘에 기대거나 아니면 예전의 걸작을 새롭게 출판하는 정도지만, 성인만화 시장이 더욱 넓어진다면 도전적인 신작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박인하 l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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