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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섹스, 폭력, 그리고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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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4-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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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진정한 우상은 리얼리티”…불꽃같은 저항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파졸리니

4월26일 개막하는 제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그리고 오는 5월3∼9일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파졸리니 특별전>에서 우리는 암흑의 시대에 맞서 격렬하게 싸운 순수한 예술가의 영혼과 만날 수 있다. 시인이자 소설가, 영화 이론가이자 영화 감독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1922∼1975)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나라 이탈리아가 배출한 20세기의 ‘르네상스 맨’이었다. 그는 39살의 나이에 첫 장편영화 <아카토네>(1961)를 만들었고, 그 뒤 평생 동안 문학의 세계(시)와 거리의 세계(현실)를 영화를 통해 결합하려 애썼다. 언젠가 파졸리니는 “사람들은 내가 세명의 우상(그리스도·마르크스·프로이트)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말은 판에 박힌 말이다. 사실 나의 진정한 우상은 리얼리티다. 만약 내가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영화감독으로 불린다면, 그것은 내가 단어라는 상징을 통해 리얼리티를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리얼리티를 표현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파졸리니는 평생 리얼리티를 자신의 화두로 삼았고, 거기에 ‘시적’이라는 아름다운 기호를 새겨넣었다.

생의 삼부작…원시 세계에 대한 열망

사진/ 살해당한 파졸리니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솔 바스의 미술작품. 그의 죽음 뒤에는 네어파시즘의 음험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번 ‘특별전’에서 상영하는 작품들은 주로 그의 후기작들로 섹슈얼리티에 대한 즐거운 상상과 권력의 정치학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영화들이다. 파졸리니 본인이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테오레마>는 마르크시즘·기독교·동성애주의를 결합한 대담한 영화로 ‘만약 선하고 성스러운 인간이 부르주아 가정에 나타난다면, 그래서 가족과 관계를 맺고, 그리고 그들을 떠난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단순한 ‘정리’를 바탕으로 우화·종교적인 테마, 성적인 터부(근친상간적인 성행위와 동성애)를 결합해 부르주아 가정의 붕괴를 그려낸다. 성에 대한 파졸리니의 상상은 ‘생의 삼부작’이라고 하는 세편의 영화, <데카메론> <켄터베리 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더 분명하게 표현된다. 이 세편은 모두 중세적인 이야기에 근거한 영화로 벌거벗은 남녀의 자유분방한 섹스를 통해 날 것의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특히 <천일야화>를 재구성한 <아라비안 나이트>는 신화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정서가 가득 묻어 있는 신비스럽고도 에로틱한 영화다. 거의 인류학적인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이 영화와 고대 그리스 비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메데아>에서 우리는 또한 제3세계에 대한 파졸리니의 관심을 읽을 수 있다. 파졸리니는 <외디푸스 왕> <돼지우리>등의 작품에서 현대 문명의 소비주의와 물질주의를 비판하며 태곳적이고 원시적인 세계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표현했다. 그는 70년대 서구의 신자본주의에 절망했고, 그에 저항하는 유일한 동맹자로 제3세계를 바라보았다. 이런 태도가 <아라비안 나이트>와 <메데아>에서 엿보인다. 성경의 ‘마태복음’을 충실히 재현한 <마태복음>은 영혼의 구원과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파졸리니의 사고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매우 사실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면서 인간의 얼굴과 표정에 종교적이면서도 성스러운 특징을 부여하고 있다.


가장 충격적인 작품은 아무래도 파졸리니의 유작 <살로, 소돔의 120일>일 것이다. 무솔리니 치하의 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사드 후작의 소설을 개작한 이 영화는 착취자와 피착취자 간의 관계를 사디즘과 권력정치학의 유사성을 통해 이끌어내었다. 그는 무고한 희생자들을 결코 인간화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해만큼이나 많은 적대자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파졸리니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려는 것은 권력집단이 자행한 폭력과 그것에 의해 난자당한 인간의 고결한 정신이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한 논란스런 반응은 파졸리니의 죽음과 더불어 진행되었다. 파졸리니는 1975년 11월2일, 로마 근교의 오스티아 해안에서 10대 소년 펠로시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이 엽기적인 살인은 곧바로 그가 3주 전 완성한 충격적인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했다. 예술가의 잔혹한 시체와 그가 남긴 유작은 ‘삶-작품’의 기묘한 공모관계를 만들어냈고, 그의 죽음은 사디즘과 파시즘을 결합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거대한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이유야 어떻든 격렬한 스캔들은 예술가의 뛰어난 재능을 손쉽게 덮어버릴 수 있었다. 서울에서 단독상영하는 마르코 툴리오 지오르다나의 <누가 파졸리니를 죽였나>라는 영화는 당시 이탈리아 정세를 바탕으로 파졸리니의 죽음에 숨어 있는 권력집단의 공모관계를 파헤치고 있다. 파졸리니는 살해되기 일주일 전 신문을 통해 당시 이탈리아 지배계급과 매스미디어의 범죄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했다. 파졸리니는 이탈리아에 새롭게 출현한 네오파시즘(신자본주의)을 겨냥해 홀로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에 당시 이탈리아 지배권력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진술은 단지 추측에 불과한 게 아니다.

베일에 싸인 죽음

<살로, 소돔의 120일>은 그가 죽은 뒤 개봉되었다. 사디즘과 파시즘을 연결한 이 영화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은 동성애공포증세를 보였고, 파졸리니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는 “불결한 동성애를 원치 않았기에 그를 죽였다”고 말한 살인자 펠로시가 일종의 영웅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1976년 장 폴 사르트르가 ‘파졸리니를 재판에 회부하지 말라’는 탄원서를 법정에 제출할 정도로 파졸리니 죽음에 대한 논란은 다시 이탈리아를 뒤흔든 정치 스캔들이었다. 비판자들과 달리 파졸리니를 추앙한 사람들은 그를 순교자로 여기기도 했다. 그들은 파졸리니가 살해되던 날 입은 피투성이 재킷을 마치 성의(聖衣)처럼 전시했다. 파졸리니는 죽기 전 순교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그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동일시했고 그 때문에 괴로워했다. ‘성자의 날’에 거리에서 생을 마감한 파졸리니의 죽음은 그래서 순교의 기호이자 파시즘의 폭압과 싸운 한 인간의 ‘이미지’였다.

파졸리니는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삶과 영화는 파스빈더의 그것처럼 강렬하면서도 눈부시다. 그는 생전에 “예술작품은 신비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치료한다”고 말했다. 폭력적인 이미지와 성적인 상상이 가득한 그의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영혼의 치유와 구원의 메시지에 접할 수 있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파졸리니는 한 마디로 신념이 존재하지 않던 1970년대라는 암흑의 시기에 불꽃처럼 저항하던 시대의 선각자였다.

김성욱 l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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