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감이 느껴지는 직설적 문장들
대체 뭘 본 거지? 1960년대부터 60여 년간 이탈리아 나폴리 가난한 동네 출신 두 여자의 우정이 큰 줄기인데, ‘마라맛’ 사건이 쉴 틈 없이 이어진다. 사람이 쉽게 죽는 동네다. 일하다 죽고, 병으로 죽고, 패싸움하다가 죽는 곳이다. 이 동네 구두수선공 딸 릴라는 “못된 애”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을 단 하나도 하지 않는데 다들 릴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세 살 때 혼자 글을 떼고, 큰 눈을 가늘게 뜨는 것만으로도 수학 문제를 척척 푸는 아이다. 그 뛰어난 머리로 마음만 먹으면 사람 마음을 할퀼 수 있다. 시청 수위의 딸 레누는 사랑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이다. 그런데도 릴라 때문에 항상 2등이다.우정이 싹튼 때는 릴라가 레누의 가장 소중한 인형을 지하창고로 던져버린 날이다. 둘은 인형을 찾아 벌레가 우글거리는 지하창고로 내려가고, 온동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고리대금업자 돈 아킬레를 찾아가기도 한다. 천부적인 재능에도 집안 형편 탓에 초등학교만 졸업한 릴라와 대학을 나와 신분 사다리를 오르다 작가로 성공하는 레누의 인생 이야기는 ‘나’라는 ‘인형’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빛 사이에 어두운 구석과 폭발 직전의 억눌린 감정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결혼, 외도, 이혼 등 막장드라마 뺨치는 난리가 난다. 휘몰아치는 사건들보다 더 역동적인 건 인물의 내면세계다. 레누는 릴라를 경외하지만 때로 “릴라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레누만 중학교에 가자, 릴라는 홀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해 레누에게 보여준다. 누가 진짜 1등인지. 그런 릴라에게 레누는 자신만 상급학교에 가게 됐다고 상기시킨다. 릴라는 레누가 어린 시절부터 사랑한 남자와 연인이 돼 야반도주한다. 우정은 질투와 증오, 연민, 동경으로 시시각각 색깔이 바뀐다. 어쩌면 반드시 사랑 안에는 증오가 있다. 어머니의 사랑도 그렇다. 레누의 어머니는 딸에게 모진데 죽기 직전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한 단 한 명의 자식이 레누였다고 말한다. 이 폭풍우 치는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문장들을 읽으면 해방감이 느껴진다. 100% 완벽한 사랑에 대한 이상은 사람의 숨통을 죈다. 엘레나 페란테는 감정도 사람도 카테고리로 나누지 않는다. 작가가 된 레누에게 한 독자가 외설스러운 소설이라고 비판하자 레누는 이렇게 답했다. “인간의 경험은 어떤 것이라도 솔직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특히 차마 이야기할 수 없고 우리 자신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일일수록 그렇다.” 
2020년 나폴리 4부작은 <나의 눈부신 친구>라는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HBO제공
딸을 창밖으로 던져버린 아버지
“나의 눈부신 친구가 되어줘. 남자 중에서도 여자 중에서도 최고가 되어줘. 그렇지 않다면 사는 의미가 없을 거야.” 릴라는 레누에게 이렇게 말한다. 공부를 중단하고 16살에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릴라에게 레누는 대리 자아다. 레누에게 릴라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자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다. 릴라가 없는 레누는 레누가 아니고, 레누가 없는 릴라는 릴라가 아니다. 레누는 자신이 릴라를 흉내 내고 있다는 걸 안다. 자기 글을 평가할 때도 기준은 ‘릴라라면 어떻게 쓸까’이다. 어디까지가 레누일까? 가난한 레누는 대학에 가면서 상류층 사람들을 만나고 명문가 집안의 아들과 결혼한다. 그들 속에서 레누는 이물감을 느낀다. 돈으로도 지식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종류다. 몸에 깊게 밴, 태도의 차이가 있다. 레누는 매 순간 긴장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하고 음식을 소리 내어 씹는다. 나폴리 고향을 삭제한 레누는 레누가 아니다. 어디까지가 레누일까? 릴라가 중학교에 보내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하자, 아버지는 “딸을 공부시켜 뭐 하냐”며 릴라를 창밖으로 던져버린다. 릴라는 팔이 부러진다. 동네에서 잘사는 축에 들던 남자와 결혼하는데 이 남자는 모든 면에서 자신을 압도하는 릴라를 두들겨 팬다. 명문가 집안 자제이자 학자인 레누의 남편 피에트로는 이성적이고 예의 바른 사람이지만 레누의 의견을 들어보려 하지 않는다. “피에트로는 내가 제대로 교육을 받았음에도 나에게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를 바랐다.” 릴라와 레누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보며 자랐다. “남성중심적인 사회 분위기에 동화되기 위해서 의식을 남성화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처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레누) 레누는 사랑받기 위해 애인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한다. 자기보다 그가 얼마나 더 많이 아는지 말이다. 성추행을 일삼고 임금을 떼먹기 일쑤인 햄공장 사장에게 따지러 가기 전에 릴라는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다 생각한다. 인식하지도 못한 채 남자들을 구슬리는 방식으로 행동해왔다고, 수치스럽다고, 이제는 홀로 맞서 싸우겠다고. 레누와 릴라 안에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데 자신의 일부가 돼버린 것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들과는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 
HBO제공
바람 잘 날 없는 시대, 입체적 등장인물
두 여자는 이탈리아의 격동기를 뚫고 살아나간다. 전후 혼란, 68혁명,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대립까지 바람 잘 날 없는 시대다. 고리대금업자, 공산당원, 파시스트, 허위의식에 가득 찬 지식인 등 수많은 인물이 나오는데 모두가 한 낱말로 요약할 수 없도록 입체적이다. 그래서 마을 상권을 장악하고 뒤에 마약까지 끌어들이는 악당까지 쉽게 미워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들이 한때 사랑에 순정을 바친 청년이었다는 걸 아니까. 그들조차 레누와 릴라의 일부로 스며들었다는 걸 아니까. 소설은 노인이 된 릴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시작한다. 릴라는 자신의 형체를 지워버리기로 결심했다. 레누는 릴라에게 형태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빛나던 릴라는 릴라이고 싶은 적이 없었다. 그림자였던 레누는 항상 레누였다. 릴라가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레누는 사라진 릴라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레누의 마음은 뭘까? 릴라가 그리워서? 떠나버린 릴라를 향한 원망? 릴라와 겨루기? 아마 그 모두일 것이다. 그 모두를 아우르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손 놓을 수 없는 게 사랑이겠지. 네가 있기에 내가 되는 것이 인간이겠지. 김소민 자유기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