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어쩌다 새파랗게 젊은 편집자에게 나를 설명한다. 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이인데도 꼬치꼬치 캐물었다.
20대에 대학에 못 간 나(김태환, 1935년생)는 그 벌충으로 책을 읽었다. 30대에 대학에 진학해서는 앞선 머리 좋은 이들을 따라잡으려고 책을 봤다. 필요가 태도를 결정지은 것이다. 40~50대에 교사생활 하면서는 독서다운 독서를 못했고, 퇴직 뒤 60대에 독서 인생의 절정기를 맞았다. 젊어서는 속도를 중시했는데 급히 읽는 책이 체하는 듯해 지금은 음미하며 읽는다. ‘노인’과 ‘속도’는 어울리지 않는 옷으로, 나는 정독파다. 그렇더라도 하루 24시간은 짧아 촌음을 아껴 버스에서도, 노처가 병원 진료를 받는 시간에도 옆에서 책을 꺼내든다.
요즘 읽는, 김해자 시인을 좋아한다. 미싱사, 노동운동가, 미술치료사 등을 하다가 시골로 가 농사꾼, 책 읽는 사람, 놉 파는 사람으로 사는 그는 학벌이든 재능이든 젠체할 만한 부류에 든다. 그런데 어쩌자고 하찮은 사람들만 가까이하는지 모르겠다. ‘시가 뭐꼬’ 하는 경북 칠곡 할매들의 시나 고르고, 그걸 조감하기보다 벌레의 눈으로 본다. 그러니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라는 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의 책 <당신을 사랑합니다> 역시 무지렁이들 세상으로, 김해자는 업신여김을 당하기 딱 좋은 이들의 이웃이 되겠다고 한다. 그가 있어 세상은 덜 차가우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시절 내겐 병이 있었다. 책 수집하는 병. 리어카째로도 사서 2만 권쯤 모았는데, 체계랄 것도 없었다. 한적(한문으로 쓴 책)은 <대동운부군옥> 한 질뿐, 거의 개화 이후 것이었고 월북 작가 저서가 많았다. 그 책들은 나를 떠나 새 임자를 만났는데, 바로 범우사 윤형두 대표다. 그 뒤로 책을 안 사겠다고 다짐했건만, 지금도 2천 권쯤 소장하고 그중 바둑책이 100권쯤 된다. 바둑기사 기타니 미노루와 우칭위안의 호화판 기보도 있다. 또 애장본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인>, 정지용의 <문학독본>, 노천명의 <창변>, 홍난파의 <음악만필> 등이 있다. 딱하다, 내 이런 수집벽 탓에 젊은 아내가 많이 울었다.
나이 먹으면서 재독(再讀)을 즐긴다. 처음 읽은 기억이 닳았을뿐더러 의미의 재발견이 있기 때문이다. 김남천의 <오디>는 몇 번 읽었는지 모른다. 눈이 푸지게 내리는 술맛 나는 날, 소녀 기생이 그 옛날 선생을 만나 오디 따던 기억과 함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이태준의 <석양>도 60~70년 전에 읽은 걸 또 읽는다. 임화는 시 한 대문(이야기나 글의 특정한 부분) 때문에 좋아졌는데, 김윤식의 700쪽 넘는 <임화 연구>도 그를 넘어서기에는 힘이 한참 부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 유명 작가들은 젊고 총명한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며 노년을 부끄러워했다. 내게 그런 부끄러움은 사치다. 6·25 때 중2였던 나는 사촌형들이 보던 <사회과학사전>을 지붕 추녀에 감췄는데 경찰이 잡으러 왔다. 마침 집을 비워서 목숨을 건졌다. 장가갈 때 시골 공의인 장인어른도 나더러 “명 붙은 데가 없다”고 말할 만큼 약골이었던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기적이다. 여생은 그저 피천득 선생 말대로 ‘졸리 올드맨’(好好翁)이면 좋겠다.
늙으면 밥이 똥이 되지 않고 돌이 된다던데 남의 일이 아니다. 갈 때 되면 곡기 끊고 지내다 편히 마지막 숨을 쉬고 싶다. 그런데도 오늘 나는 여전히 책을 사고 아직도 읽어야 할 책을 수북이 쌓아두고 있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