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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할리우드를 뒤흔든 ‘색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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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4-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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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티>가 한국의 과거 정치사건을 일본의 시각에서 다룬 영화라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최근의 국내 정치계를 돌아보게 하는 미국영화가 있다. 익살스런 코믹 연기로 유명한 짐 캐리가 주연한 <마제스틱>(4월26일 개봉)이다. 이 영화는 장인의 좌파 경력까지 거론하며 특정 대선후보를 향한 ‘빨간색 색깔 칠하기’ 소동을 색다른 각도에서 보게 한다. 그런데 영화의 홍보 카피는 ‘<시네마 천국> 이후, 또 하나의 감동’이다. 주인공 피터(짐 캐리)가 조그만 소도시에서 나이 지긋한 노인네와 함께 폐허가 된 극장을 감동 또는 감상적으로 복원하는 이야기가 길게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영화의 앞뒤에 중요하게 배치된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사건을 끌어오기 위한 소품이나 다름없다.

1950년대 초 할리우드는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이끄는 매카시즘, 곧 ‘빨갱이 색출 작업’의 회오리에 빠져든다. 의회에 만들어진 ‘반미국적 활동에 대한 국회 조사위원회’가 반정부적 인사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모든 일자리에서 내쫓기 시작했고, 할리우드의 영화인 역시 ‘빨갱이냐, 아니냐’는 사상검증의 대열에 서야 했다. 조사위원회 활동은 ‘단순’했다. 혐의가 있는 영화인에게 무조건적인 회개를 요구하는 동시에 동료 가운데 빨갱이가 누군지 불도록 했다. 이를 거절하면 블랙리스트에 올려 일을 못하도록 하거나 감옥으로 보냈다. 이 여파로 찰리 채플린, 오손 웰스, 존 휴스턴,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수많은 감독과 배우가 줄줄이 유럽으로 ‘망명’한 반면, 엘리아 카잔, 게리 쿠퍼, 로널드 레이건 등은 이 마녀사냥에 앞장서 출세길에 올랐다. 광풍에 맞서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한 10명은 ‘할리우드 10인’으로 불린다. 영화 <마제스틱>에서 촉망받는 시나리오 작가로 등장하는 피터는 바로 이 ‘할리우드 10인’을 염두에 둔 듯한 인물이다.

피터는 자신의 작품에 출연한 여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고, 영화사는 서둘러 또 다른 작품의 집필을 재촉하는 등 장밋빛 미래를 보장받는 듯했다. 그러나 대학 시절 흠모하던 여자를 좇아 참석한 좌파 집회의 과거와, <분노의 포도>를 넘어서는 걸작을 만들려고 탄광촌의 노동 문제를 그린 시나리오가 빌미가 돼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는 위기를 맞는다. 청문회 출석을 앞두고 조사위원회가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들어주기로 한 피터는 마음을 달래려 술을 마신 채 차를 몰다 계곡에 빠지는 사고를 당한다. 이 사고로 기억을 잃은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아들을 잃은 조그만 전몰자 마을 ‘로슨’에서 자신을 닮은 루크라는 인물로 살게 된다. 루크는 해외에 파병됐다가 실종된 인물로 마을 사람들은 그가 살아 돌아온 것으로 믿게 된다.

피터는 문 닫았던 극장 ‘마제스틱’을 재건하는 등 침체된 로슨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을 즈음, 그를 찾아낸 연방수사국(FBI)의 소환장을 받는다. 때맞춰 기억을 되찾은 피터는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가입하지도 않았던 공산당에서의 탈당을 선언할 것과 정부가 건네준 혐의자들의 명단을 낭독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들이 써준 성명서를 읽기로 결심한 피터는 로슨 마을에서 배운 교훈을 떠올리며 “좌익 집회에 참석했던 건 좇아다니던 여자를 찾아 발정난 수컷으로 갔던 것”이라며 의원들을 향해 ‘엉뚱한’ 주장을 펴기 시작한다. “빨갱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들이 대표하는 미국은 비열하고 졸렬하다. 전쟁에서 조국에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들은 자유가 보장된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였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을 지키기 위해서.”

‘미국의 시민인 한 빨갱이에게도 자유를 나눠줘야 한다’는 피터의 연설은 그를 영웅으로 만든다. 오래 따져보지 않아도 짐 캐리의 연설은 미국적 가치에 잘 들어맞는다. 게다가 50년대 당시 빨갱이 사냥에 처음으로 적극 뛰어든 제작사가 워너브러더스였고, 이 영화의 제작·배급사가 다름아닌 워너브러더스라는 점은 아이로니컬하다. 할리우드 상업영화 한편이 우리의 정치현실을 초라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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