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그땐 기운도 좋았어”…왕년의 포크가수 3인방, 왕년의 소녀들과 만나다
자정이 지난 늦은 밤, 불꺼진 양재동 주택가 한가운데 환하게 붉을 밝힌 집이 있다. 집에서는 CCR의 <코튼 필스>, 클리프 리처드의 <영 원스> 등 60년대 팝음악이 어쿠스틱 기타 화음을 타고 흘러나온다. 트윈폴리오의 송창식(55), 윤형주(55)씨와 함께 ‘입맞춤’에 한창인 김세환(54)씨 집 거실이다. 오는 26, 27일 공연을 앞두고 이들은 이삼일에 한번씩 밤 11시에 이곳에 모인다. 오후 2시가 넘어 하루를 시작하는 송씨가 97년부터 매일 해온 미사리 공연을 끝내고 이곳에 도착하는 시간에 연습을 시작한다. 평소의 윤씨나 김씨 같으면 이미 잠자리에 들 시간이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없다.
주간에는 다방, 야간에는 싸롱
“창식이는 자신의 룰을 깨는 걸 아주 싫어해요. 새벽까지 일하고 아침에 잠드는 게 오랫 습관이기도 하고요. 어쩌겠어요? 우리가 맞춰야지.” 사업 때문에 몸이 둘이라도 모자랄 지경으로 바쁜 생활을 하는 윤형주씨 목소리에는 불만도 아쉬움도 없다. “다들 철학도, 생활도, 음악 스타일도 달라진 지 한참돼서 같이 모이는 게 사실 적지 않은 희생인데 막상 만나서 화음을 맞추면 힘들고 귀찮은 과정이 다 덮어져요.”
70년대 중반 이후 오랫동안 각자의 길을 걸어온 이들의 지금 얼굴을 보면 ‘정말 그때 같이 어울린 게 맞아?’라는 생각이 들 만큼 분위기가 각각 다르다. CM송 제작업체를 비롯해 3개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윤형주씨에게는 성공한 사업가의 중후함이, 미사리 공연을 빼고는 다른 활동을 접은 채 지내고 있는 송창식씨에게는 고집스런 은둔자의 고요함이 느껴진다. 꾸준히 음악을 하면서도, 사진과 산악자전거,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으로 분주한 김세환씨는 여전히 세상이 궁금해서 못견디겠다는 듯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소년의 눈빛이다. 그러나 셋 가운데 하나가 기타줄을 튕기기 시작하면 연주는 멈추지 않고 서너 곡 이상 이어진다. “키를 좀 낮추라”거나 “다음 곡으로 이걸 하지” 따위의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제 30년이 지났지만 ‘주다야싸’ 시절, 날마다 함께 먹고 자다시피 하면서 맞춘 호흡은 ‘각인효과’처럼 이들의 머릿속에, 손 끝에 또렷이 남아 있나 보다. 김세환씨가 ‘주다야싸’ 이야기를 꺼내자 너나 할 것 없이 ‘주간에는 다방, 야간에는 싸롱’의 20대 시절을 풀어놓는 모습이 영락없이 허구한 날 몰려다니면서 부모 속 썩이는 ‘딴따라’ 청년들이다. “야, 멕시코 싸롱 미스 신 기억나냐? 얼굴 예쁘장한 애, 맨날 너 따라다녔잖아” 윤씨의 기억을 송씨가 정정한다. “미스 신이 아니고 미스 최야. 지금은 미세스 최가 됐겠지만.”, “참 그땐 기운도 좋았어. 형주 형 ‘0시에 다이얼’진행할 때 조선호텔 나이트클럽, 아니 그때는 고고 클럽이었지, 거기 통금 직전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잖아. 질리지도 않고 새벽 네시까지 춤추고 놀았어.”, “생맥주가 비싸니까 소주 몇병 품에 넣고 들어가서는 테이블 밑에서 돌리고 그랬지.” “밤새고 술마신 다음 청진동에서 해장국 먹고 집에 가서 눈붙였다가 오후에 일어나면 또 만나는 거야. 매일이었지. 매일.” 머리 깎인 데 한이 맺혀… 자다가도 트윈폴리오만 나오면 번개처럼 달려나와 텔레비전 앞에 앉을 정도로 열성팬이었다가 ‘형’들에게 발굴돼 성보다방에서 데뷔한 김세환씨의 ‘시다바리’시절 이야기도 나왔다. “시험공부하다가도 라면 끓여오라면 총알처럼 달려와서 라면 끓였잖아. 정말 그때는 코 찔찔 흘리는 까마득한 후배라고 생각했지, 나중에 아들(윤씨와 김씨의 아들은 중학교 1년 선후배다) 학교 콩쿠르에 나란히 학부모 심사위원으로 앉게 될 줄 알았나?”,“그때 형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학생에게 쪽지 전해주라고 해서 쭐레쭐레 갔다가 같이 있는 줄 몰랐던 남자한테 맞을 뻔한 거 기억 안나? 그래도 그때는 형들하고 같은 무대에서 노래한다는 사실이 꿈같기만 했어.”, “희은이는 어땠게? 경기여고 행사 때 초대받아갔을 때 그 몸빼 같은 교복입고 앞에서 설치는 애가 있는데 여간내기가 아니야. 쬐끄만 게 당돌하게 '선배님, 반주 좀 해주실래요?'척 부탁하고는 <스칼렛 레터>, <도나도나>를 불렀는데 깜짝 놀랐잖아. 그러더니 재수시절 업소로 찾아와서 '몸이라도 팔아야 할 처지'라고 매달려 노래를 시작하게 됐지.” “그때는 술마시면서 곡도 많이 만들었잖아요. 들어보고 다른 사람이 '나 주라'고 하면 선뜻 곡도 주고, 녹음 때 와서 기타 화음도 넣어주고 그랬지. 지금처럼 곡값·세션값 같은 건 생각도 안했어.” 발표하는 곡 수보다 금지곡 수가 많던 당시라 어려움은 없었는지 물었더니 ‘금지곡’의 대가 송창식씨의 대답은 의외로 덤덤하다. “어려울 게 뭐 있어. 머리 좀 짧게 자르면 되고, 금지곡 되면 다른 노래하면 되는데. 기분은 나빴지. 왜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을 대통령이 깡패처럼 자기 맘에 안 든다고 해라, 마라 해. 그래도 많이 불편하기는 했지?” 김세환씨가 맑은 얼굴을 짖궂게 찡그린다. “아유, 그때는 말도 못했어. 이 중에 내가 머리도 가장 많이 깎였어. 한번은 방송하는 중에 머리 깎고 오라는 얘기도 듣고. 조동진씨는 그때 한이 맺혀서 지금도 머리를 기르고 다니잖아요.” 이들은 얼마 전 동료가수 이정선·서유석·남궁옥분씨 등과 함께 <프렌즈>라는 음반을 발표했다. 송씨는 <사랑이야>를, 윤씨는 <사랑스런 그대>를, 김세환씨는 <비>를 노래했다. 85년 음반 <하나의 결이 되어>를 녹음한 이후 스튜디오에 함께 들어간 건 처음이다. 그동안 윤형주씨는 복음성가 음반을 6집까지 냈고 올해 7집을 준비하고 있다. 2000년 리메이크 음반을 발표한 김세환씨는 신곡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송창식씨는 87년 <참새의 하루>를 발표한 이후 음반 작업을 일체 접었다. 송씨는 “별 다른 홍보도 안했는데 5만장이 팔렸다”며 “요즘 30-40대를 겨냥한 음반이 그 정도 나가면 대박이라던데 고맙더라”고 이야기하는 김씨에게 “5만장 팔려고 음반내냐”고 면박을 준다. “마지막 앨범이 20만장 나갔어요. 다시 내더라도 그 정도 팔리기 어려울 텐데 요즘 젊은 가수들은 20만장도 실패라고 이야기한다면서. 그 생각하면 내 목표가 왜소해져서 신경질이 나요.” 그가 새 음반을 녹음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오랫동안 음악계와 떨어져서 혼자 작업하다 보니 갭이 심해졌어요. 그러다 보니 세션할 사람을 찾을 수가 없는 거야. 이전 독집들도 그런 문제 때문에 실은 NG상태로 냈는데 더 이상 그런 식으로는 음반을 내고 싶지 않아요. 이런저런 문제가 해결되면 그때는 다시 낼 수 있겠지.” 일본 포크가수도 함께 하는 공연
99년, 30년 만에 한 무대에 섰던 이들의 합동공연도 올해로 세번째다. 2000년 함께 한 양희은씨와 이번 공연도 함께할 생각이었지만 양씨가 데뷔 30년 공연을 준비하는 바람에 다시 셋이 모였다. 대신 올해는 일본의 포크가수 모리야마 료코가 합류한다. 이들과 같은 해 데뷔한 여성가수인 료코는 지금까지 56장의 음반을 발표한 일본의 대표적 포크가수로 지난 해 낸 새 음반도 대중적인 사랑을 얻었다. 데뷔한 지 10년도 못 돼 원로취급 받으며 홍보비가 없어 음반 내는 게 힘들어지는 우리와 비교하면 부러운 일본의 현실이다.
“형주 형이 다시 모여서 공연하자고 제의했을 때는 별로 내키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예매도 지지부진해서 괜히 시작했나 보다, 망신살만 뻗치는 거 아닌가 걱정도 많이 했고요. 그런데 현장에서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는 사람들이 이렇게 목말라했구나 놀랐습니다.”, “거기 온 여자들은 40,50대 소녀들이더라고. 삶의 무게 때문에 잊고 산 20대를 만난 표정이었어요. 공연장을 대학 캠퍼스(경희대 평화의 전당)로 잡은 데는 현실의 피로함을 잠시 잊고 산책도 하면서 젊었을 적으로 돌아가보자는 이유도 있어요.” 30년 만의 공연에 대한 김씨와 윤씨의 감회다. 송씨는 예의 도인 같은 표정이다. “감회는 무슨 감회, 우리가 사는 수십년의 시간 중에 한 순간일 뿐인데….”(문의:02-561-4712)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70년대 중반 이후 오랫동안 각자의 길을 걸어온 이들의 지금 얼굴을 보면 ‘정말 그때 같이 어울린 게 맞아?’라는 생각이 들 만큼 분위기가 각각 다르다. CM송 제작업체를 비롯해 3개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윤형주씨에게는 성공한 사업가의 중후함이, 미사리 공연을 빼고는 다른 활동을 접은 채 지내고 있는 송창식씨에게는 고집스런 은둔자의 고요함이 느껴진다. 꾸준히 음악을 하면서도, 사진과 산악자전거,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으로 분주한 김세환씨는 여전히 세상이 궁금해서 못견디겠다는 듯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소년의 눈빛이다. 그러나 셋 가운데 하나가 기타줄을 튕기기 시작하면 연주는 멈추지 않고 서너 곡 이상 이어진다. “키를 좀 낮추라”거나 “다음 곡으로 이걸 하지” 따위의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제 30년이 지났지만 ‘주다야싸’ 시절, 날마다 함께 먹고 자다시피 하면서 맞춘 호흡은 ‘각인효과’처럼 이들의 머릿속에, 손 끝에 또렷이 남아 있나 보다. 김세환씨가 ‘주다야싸’ 이야기를 꺼내자 너나 할 것 없이 ‘주간에는 다방, 야간에는 싸롱’의 20대 시절을 풀어놓는 모습이 영락없이 허구한 날 몰려다니면서 부모 속 썩이는 ‘딴따라’ 청년들이다. “야, 멕시코 싸롱 미스 신 기억나냐? 얼굴 예쁘장한 애, 맨날 너 따라다녔잖아” 윤씨의 기억을 송씨가 정정한다. “미스 신이 아니고 미스 최야. 지금은 미세스 최가 됐겠지만.”, “참 그땐 기운도 좋았어. 형주 형 ‘0시에 다이얼’진행할 때 조선호텔 나이트클럽, 아니 그때는 고고 클럽이었지, 거기 통금 직전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잖아. 질리지도 않고 새벽 네시까지 춤추고 놀았어.”, “생맥주가 비싸니까 소주 몇병 품에 넣고 들어가서는 테이블 밑에서 돌리고 그랬지.” “밤새고 술마신 다음 청진동에서 해장국 먹고 집에 가서 눈붙였다가 오후에 일어나면 또 만나는 거야. 매일이었지. 매일.” 머리 깎인 데 한이 맺혀… 자다가도 트윈폴리오만 나오면 번개처럼 달려나와 텔레비전 앞에 앉을 정도로 열성팬이었다가 ‘형’들에게 발굴돼 성보다방에서 데뷔한 김세환씨의 ‘시다바리’시절 이야기도 나왔다. “시험공부하다가도 라면 끓여오라면 총알처럼 달려와서 라면 끓였잖아. 정말 그때는 코 찔찔 흘리는 까마득한 후배라고 생각했지, 나중에 아들(윤씨와 김씨의 아들은 중학교 1년 선후배다) 학교 콩쿠르에 나란히 학부모 심사위원으로 앉게 될 줄 알았나?”,“그때 형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학생에게 쪽지 전해주라고 해서 쭐레쭐레 갔다가 같이 있는 줄 몰랐던 남자한테 맞을 뻔한 거 기억 안나? 그래도 그때는 형들하고 같은 무대에서 노래한다는 사실이 꿈같기만 했어.”, “희은이는 어땠게? 경기여고 행사 때 초대받아갔을 때 그 몸빼 같은 교복입고 앞에서 설치는 애가 있는데 여간내기가 아니야. 쬐끄만 게 당돌하게 '선배님, 반주 좀 해주실래요?'척 부탁하고는 <스칼렛 레터>, <도나도나>를 불렀는데 깜짝 놀랐잖아. 그러더니 재수시절 업소로 찾아와서 '몸이라도 팔아야 할 처지'라고 매달려 노래를 시작하게 됐지.” “그때는 술마시면서 곡도 많이 만들었잖아요. 들어보고 다른 사람이 '나 주라'고 하면 선뜻 곡도 주고, 녹음 때 와서 기타 화음도 넣어주고 그랬지. 지금처럼 곡값·세션값 같은 건 생각도 안했어.” 발표하는 곡 수보다 금지곡 수가 많던 당시라 어려움은 없었는지 물었더니 ‘금지곡’의 대가 송창식씨의 대답은 의외로 덤덤하다. “어려울 게 뭐 있어. 머리 좀 짧게 자르면 되고, 금지곡 되면 다른 노래하면 되는데. 기분은 나빴지. 왜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을 대통령이 깡패처럼 자기 맘에 안 든다고 해라, 마라 해. 그래도 많이 불편하기는 했지?” 김세환씨가 맑은 얼굴을 짖궂게 찡그린다. “아유, 그때는 말도 못했어. 이 중에 내가 머리도 가장 많이 깎였어. 한번은 방송하는 중에 머리 깎고 오라는 얘기도 듣고. 조동진씨는 그때 한이 맺혀서 지금도 머리를 기르고 다니잖아요.” 이들은 얼마 전 동료가수 이정선·서유석·남궁옥분씨 등과 함께 <프렌즈>라는 음반을 발표했다. 송씨는 <사랑이야>를, 윤씨는 <사랑스런 그대>를, 김세환씨는 <비>를 노래했다. 85년 음반 <하나의 결이 되어>를 녹음한 이후 스튜디오에 함께 들어간 건 처음이다. 그동안 윤형주씨는 복음성가 음반을 6집까지 냈고 올해 7집을 준비하고 있다. 2000년 리메이크 음반을 발표한 김세환씨는 신곡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송창식씨는 87년 <참새의 하루>를 발표한 이후 음반 작업을 일체 접었다. 송씨는 “별 다른 홍보도 안했는데 5만장이 팔렸다”며 “요즘 30-40대를 겨냥한 음반이 그 정도 나가면 대박이라던데 고맙더라”고 이야기하는 김씨에게 “5만장 팔려고 음반내냐”고 면박을 준다. “마지막 앨범이 20만장 나갔어요. 다시 내더라도 그 정도 팔리기 어려울 텐데 요즘 젊은 가수들은 20만장도 실패라고 이야기한다면서. 그 생각하면 내 목표가 왜소해져서 신경질이 나요.” 그가 새 음반을 녹음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오랫동안 음악계와 떨어져서 혼자 작업하다 보니 갭이 심해졌어요. 그러다 보니 세션할 사람을 찾을 수가 없는 거야. 이전 독집들도 그런 문제 때문에 실은 NG상태로 냈는데 더 이상 그런 식으로는 음반을 내고 싶지 않아요. 이런저런 문제가 해결되면 그때는 다시 낼 수 있겠지.” 일본 포크가수도 함께 하는 공연

사진/ 85년 <하나의 결이 되어> 녹음실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