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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근데… 어디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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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4-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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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정의 휴먼포엠

사적대화 70% 공적대화 30%의 커뮤니케이션, 통일동산 부동산중개업자 이미성 실장

“어디 사세요?”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이미성(38) 실장이 만나자마자 내게 던진 일성이다. 자유로를 타고 개성까지 가겠다 싶을 정도로 달리다보면 통일전망대가 보인다. 그 오른쪽에 ‘새로운 전원도시’ 통일동산이 있다. 대통령 특사가 평양을 방문한 날 나는 그곳을 방문했다. 아직은 집보다는 텅 빈 벌판이 눈에 더 들어오는 곳. 이 실장의 사무실은 거기에 있었다.


‘할아버지 복덕방’의 시대는 저물고…

사진/ "숫자에 강해야 합니다. 손님들이 땅값을 묻는데 계산기 두드리면 안 돼죠." (김종수 기자)
“그런데요. 전 아직 실장이거든요, 실장. 아직 사장이 아니에요.” 그는 자기의 신분을 오해하지 말라며 확실히 밝힌다. 비서실장, 기획실장 등등 그간 실장이란 직함은 저만치 높이 있는 자리로 멀게만 느껴지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공인중개사 사무실의 ‘실장’은 이웃과 함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실장은 전세나 월세, 각종 매물 안내를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설명해준다. 실장은 날렵하게 차를 몰아 ‘나온 집’을 보여주는 중책을 맡는다. 복덕방 할아버지한테서 불려나온 할머니가 슬리퍼를 끌고 ‘집구경’을 시켜주던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프로정신으로 무장한 실장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실장, 부동산업계에 여성 바람을 몰고 온 주인공들이다. 이 실장은 이 분야에 입문한 1년 정도. 스스로 초보라고 하지만 통일동산 이주단지 안에서는 알아주는 인물이다.

통일동산에 오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통일에 대한 열망이 큰 분들인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죠. 아무래도 집값이 신도시들보다는 싸니까 오는 거지요. 공기 좋고 조용한 것을 찾는 분들도 많아요. 또 더러는 서울에서 경제적으로 한번 실패한 분들이 밀려서 오기도 하지요. 서울에서는 원룸이 4천 정도인데 여기는 2천이나 1500만원, 싼 맛에 오는 거죠. 여기 살다가 재기해서 나가는 분들도 많아요. 거리상으로 보면 신도시 쪽보다 서울이 더 가까울 거예요. 자유로 타고 가면 아주 바로 가거든요.”

이 지역은 고도제한이 있어서 고층 아파트는 어렵다. 주위에는 군인 초소도 보인다. 이런 분위기가 시세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까요? “안 그래요. 아마 전에는 그랬을지도 몰라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분 거의 없지요.” 확실히 ‘햇볕’이 세긴 센 모양이다. 실장 일을 하려면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저도 전에는 아무것도 몰랐지요. 그냥 이쪽에서 오래 일하시는 분 옆에 있다보면 배우게 돼요.” 요즘 부동산 사무실이 많이 생기던데 수익성이 좋아서 그런 건가요? “자본 없이 시작할 수 있어서 그럴 거예요. 오픈할 때 드는 경비가 1천에서 1500만원 정도예요. 뭐 달리 쌓아놓을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말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호호호….”

전업주부이던 그가 실장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그저 우연이었다. ‘돈 있을 때’ 친구의 소개로 통일동산에 전원 주택지를 사두었는데 그게 ‘전 재산’이 되고 만 것이다. 남편의 벤처사업, 주식 등등 ‘다른 사업이 모두 안 되는 바람’에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복부인요? 버스 타고 다녀요”

그는 실장으로 일을 하자면 특별한 재주는 필요 없다 하더라도 사람 만나는 일을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는 즐겁게 일한다. 비법은 사적인 대화 70%, 공적인 대화 30%의 비율에 있다. “즉, 수다를 떤다는 말이지요. 전 만나면 우선 어디에 사느냐부터 물어요. 아예 입에 붙었어요. 어디에 살든 제 고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물어두는 것이죠. 나이나 직장, 가족관계를 물어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곳까지 온 이유가 나오거든요. 식구 수, 경제사정. 거기에 맞춰 집을 권하는 게 중요해요. 사적인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대화를 하면서 고객들이 저를 믿게 되고요.”

집을 구하러 왔다가 상담을 하고 가는 이도 있다.

“손님 중에 한분은 이혼을 생각하고 아이들과 살 집을 구하러 오셨는데 제가 그랬지요. 애들도 어린데 이사 안 와도 좋으니 이혼하지 말고 잘 생각해서 그냥 살라고. 제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남편과 싸워본 경험을 들려줄 수 있을 정도는 되거든요.”

남편은 그런 방법이 출세에 지장이 있을 거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일처리 깔끔하고 사적인 대화는 별로 하지 않는 사람도 좋겠지요. 요즘 변호사들이 부동산법을 공부해서 이 분야로 들어온다고 하는데, 법적인 지식은 낫겠지만 제 생각에는 고객의 마음을 잡는 데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거든요.” 이 실장은 이 업계에서 살아남을 덕목으로 친절을 꼽는다. “당연히 친절이지요. 이건 서비스업이에요.”

지금은 이사철이 끝났다. 대개 학기가 시작되기 전인 2월이 가장 바쁜 철이다. 가을엔 9∼11월 사이에 사람들이 많다. 부동산 가격은 계절을 많이 타는데 지난 겨울은 따스했다. “그래서 이쪽 땅값이 좀 올랐어요. 그전 겨울 같았으면 눈이 너무 와서 거의 고립되다시피 했지요. 지금은 이곳에 실내스키장이 생긴다는 소식에 한참 붐이에요. 땅을 살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을걸요. 돈을 싸들고 오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나 이 실장은 아직 땅은 잘 모른단다. 그저 근처의 빌라단지를 소개하는 정도다. 그래도 복부인들을 만나볼 기회는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얼른 보기에도 복스럽게 생겼을까? “저도 처음엔 몰랐지요. 주로 50대 분들인데 경력이 모두 한 십여년은 넘는 것 같아요. 요즘은 땅 장사로만 먹고사는 젊은이들도 꽤 있어요. 고위층 부인들 중에도 땅에 관심이 있는 분들도 있고요.” 복부인들은 으리으리한 차를 타고 다니겠네요?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버스 타요. 돈 많다고 다 낭비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공인중개사, 고난의 시험공부

사진/ '새로운 전원도시' 통일동산의 집값을 꽉 잡고 있는 이미성 실장. 요즘 '부동산가'에 여실장 파워가 뜨고 있다. (김종수 기자)
그는 내게도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복부인이 아니라 실장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단서를 붙인다. “숫자에 강해야 하거든요. 손님들이 땅값을 묻는데 계산기 두드리면 그건 안 되는 거지요.” 바로 머리에서 숫자가 튀어나와야 한다는 얘기다. 두 자리만 넘어가면 쩔쩔매는 나도 이 일에 도전해볼 것인가, 이 실장의 도움말을 구하려는데, 나이가 들어보이는 세분의 아주머니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우리 이 실장은 딸 같아서 좋아. 그래서 난 여기만 오잖아.” 이미 이 실장에게서 집을 구한 한 부인이 친구들에게 소개를 해주려고 왔다. “여기는 우리처럼 끝난 사람이 오는 곳이지.” 즉, 자녀교육이 끝난 사람들, 매일매일 시간 맞춰 뛰어나갈 일이 없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이다.

나는 북한과 지척거리인데 그 점은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세 부인 모두 나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쓱 훑어본다. “아, 일없어요. 무슨 총싸움, 이제 그런 거 없어요.” 달라진 남북관계가 이 한마디로 정리된다. 그보다 그들은 이곳이 겨울이 되면 얼마나 추운지를 이 실장에게 열심히 묻는다.

나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사할 때는 아무래도 날을 받아서 이사하는 게 낫지요? “아직도 그런 사람 있나봐? 일요일이 손 없는 날이지 달리 손 없는 날이 어디 있어. 아니, 근데 여직 그러고 살아요?” 난 완전히 구닥다리에 꼴보수로 몰린 게 분명했다.

이 실장은 하루빨리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싶다. 꼭 대표가 되어 자신의 사무실을 오픈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서다. 그러나 낮에 일하고 저녁에 들어가 집안일 마치고 밤에 공부하는 게 어디 쉬운가. 더구나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이 엄마로서는 초인적인 힘이 필요하다.

“처음엔 공인중개사 시험공부를 하려고 학원에 다녔지요. 한 시간은 졸고 다음시간은 그냥 듣고 또 한 시간은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러다가 왔어요. 2년 잡고 해요. 1차는 올해, 2차는 내년에. 아직은 깨지면서 배우는 중이죠. 처음엔 동·호수도 못 외웠는데 이제는 땅 보면 응, 저건 남향에 방은 몇개 정도, 바로 나와요.”

얘기 도중에 전화가 왔다. “아 네, 그런데 현재 전세 나온 게 하나도 없네요. 죄송해서 어쩌지요.” 전세대란은 통일동산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이 실장이 북쪽하늘을 바라본다. 혹시 북쪽 빈집을 좋은 값으로 세를 줄 수는 없을까 하는 궁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빈 들판 여기저기 진달래며 개나리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 출판문화 단지며, 실버타운, 대형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것이다. 북쪽이 지척인 게 흠이었던 땅, 그러나 이제는 이름마저 통일의 상징이 된 통일마을. 저 멀리 마음껏 달리는 경의선을 보며 남북한 사람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춤출 날이 올 것이다. 그 사이 우리의 이 실장은 저 어디 개성쯤에서 온 고객들에게 ‘사적인 대화’를 건네고 있을 것이다. “근데 어디 사세요?”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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