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읽기 7 l 응원
인간과 축구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덴마크의 열성적인 축구팬
일부 극성맞은 종교인들이 ‘붉은 악마’의 이름을 고치라고 생떼를 쓴다는 보도를 자주 접한다. ‘백의천사’ 응원단을 이끈다는 기독교인들은 ‘붉은 악마’의 원조로 불리는 벨기에 축구협회에까지 항의서한을 발송했다고 한다. ‘붉은 악마’라는 ‘반기독교적, 반문명적’ 애칭을 고쳐달라고 했다는데 물론 벨기에 축구협회는 정중한,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답변을 보내왔다.
이 기회에 잠깐 생각해보자. 아니 나는 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이를테면 ‘백의천사’를 이끈다는 남철우 목사와 그 일행이 ‘특정 종교의 지원’을 이유로 들어 프로축구팀 일화 천마의 성남 연고지를 백지화하기 위해 가히 종교전쟁에 가까운 언행을 일삼고 있는 일이나 ‘악마’와 ‘천사’라는 기표에 스며 있는 기의의 바르트식 해석을 잠깐이라도 해보자는 얘기는 논외로 하자는 것이다. 그저 풍성한 잔치판에는 이 동네 저 동네 온갖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이라는 정도로 줄이겠다.
훈련된 매스게임…폭력·욕설은 이제 그만
응원, 그것도 자발적 응원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응원이란 ‘3·3·7 박수’와 ‘아리랑 목동’으로 대표되는, 저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연고전을 거쳐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로 이어지는 잘 훈련된 매스게임으로 기억된다. 요란한 복장에 흰 장갑을 낀 ‘응원단장’의 구령에 따라 요령껏 손뼉을 치고 함성을 지르는 것, 그것이 응원이라고 우리는 생각해왔다. 경기를 관람하기보다는 응원단장을 자주 쳐다봐야 하는 이 기이한 집단 응원은 어떤 경우에는 썩 유용할 수도 있다. 가령 야구나 농구처럼 쉬는 시간이 많은 경기에서는 불쏘시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마어마한 출력의 앰프, 눈쌀 찌푸리게 만드는 치어리더, 귀청을 뒤흔드는 풍선 막대기 따위가 주말 나들이하려는 가족이나 공 하나하나를 제대로 음미하려는 ‘극소수’ 야구팬을 쫓아내는 역기능을 하지만 말이다. 더욱이 ‘자유’와 ‘창의’의 상징이라고 자랑하는 연세, 고려 양 대학의 체육대회 때마다 이런 우스꽝스런 집단행동이 여전히 시끌벅적한 것을 보니 인류가 풀지 못할 또 하나의 비밀이 그 속이 있는 듯하다. 내 관심은 축구다. 축구는 무면허 음주운전자의 과속처럼 휴지부 없이 시종을 쾌속으로 질주한다. 급물살처럼 좌우로 휩쓸리는 다이나미즘 때문에 사실 응원단장의 구호에 맞춰 손뼉을 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때문에 축구장에는 북소리와 손뼉, 고함과 야유는 있을지언정 집단체조를 응용한 조직적 응원이란 불필요하다. 그 점에서 몇년 전, ‘붉은 악마’가 등장했을 때, 일본의 ‘울트라 닛폰’을 흉내냈다는 비판은 지금 돌이켜봐도 부적절하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그 원형은 유럽의 응원문화에서 도움을 얻었다. 비슷한 색의 옷을 입고 함성과 손뼉으로 일관하되 결코 경기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경기 자체의 흐름과는 무관한 ‘응원을 위한 응원’은 사양하는 방식은 사실 ‘세계화’된 응원 양상인 것이다. 이 점에서 훌리건(hooligan)의 과도한 집착 또한 부적절하다. 거리의 불량배를 가리키는 이 용어가 축구장의 난동꾼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980년대 영국. 1985년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클럽선수권 결승전 때는 영국 훌리건의 폭력으로 39명이 죽는 참사가 빚어졌다. 그 뒤 ‘반훌리건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대처의 극우보수정치가 훌리건을 낳은 한 원인이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축구광들의 소란과 폭력은 당시 영국 사회의 구조 속에서 배태된 것이다. 그 점만으로는 훌리건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지지’할 수는 없다. 그 양상은 파괴와 폭력이며 그 종착역은 백인남성을 근간으로 하는 파괴적 인종주의일 뿐이다. 게다가 그들은 축구장에 모였으면서도 축구는 구경도 하지 않는다. 그 대척에 롤리건(roligan)이 있다. 영국과 독일의 훌리건에 대비해 1980년대 덴마크 축구팬들을 지칭하면서 만들어진 말이다. ‘조용하고 질서 정연한’이란 뜻의 덴마크어 ‘롤리’에서 따왔다. 이들은 ‘야유’와 ‘욕설’의 차이를 안다. 그들은 시합 내내 열성적인 함성으로 자기 팀을 응원하고 상대방을 야유하지만 결코 욕설과 폭력으로 축구장을 살벌하게 만들지 않는다. 시합이 끝나면 목청껏 노래하고 떠들지만 결코 과격의 폭력 놀이는 즐기지 않는다. 위에 언급한 훌리건의 폭력사망 사태에 대한 반작용인 듯 유네스코는 지난 1985년 롤리건에게 페어플레이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폭력 없는 축구’를 모토로 덴마크의 열성팬들은 자국 대표팀의 경기가 열리면 세계 어디든지 달려간다. 단 조건이 있다. 국가가 울리면 무조건 따라 불러야 하고 상대방 국가가 울릴 때는 최대한의 예의를 지켜줘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맥주’(beer)를 뜻하는 단어를 10개국어 이상 알아야 회원 자격이 생긴다고 한다. 그 한 단어로 상대국에 대한 예의를 차리고 축구에 대한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다. 이번 월드컵 때 약 2천여명의 롤리건이 한국으로 건너온다고 한다. 그들은 이미 현지의 우리 대사관에 ‘beer’를 한국말로 어떻게 부르는지 배웠다고 한다. 내게 묻는다면 물론 ‘맥주’라고 말해주겠지만, ‘인간과 축구에 대한 예의’라는 뜻도 있다고 덧붙이고 싶다. 정윤수/ 문학평론가

사진/ 축구장의 난동꾼으로 불리는 훌리건. 영국 훌리건들이 물대포를 뚫고 독일 응원석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
응원, 그것도 자발적 응원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응원이란 ‘3·3·7 박수’와 ‘아리랑 목동’으로 대표되는, 저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연고전을 거쳐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로 이어지는 잘 훈련된 매스게임으로 기억된다. 요란한 복장에 흰 장갑을 낀 ‘응원단장’의 구령에 따라 요령껏 손뼉을 치고 함성을 지르는 것, 그것이 응원이라고 우리는 생각해왔다. 경기를 관람하기보다는 응원단장을 자주 쳐다봐야 하는 이 기이한 집단 응원은 어떤 경우에는 썩 유용할 수도 있다. 가령 야구나 농구처럼 쉬는 시간이 많은 경기에서는 불쏘시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마어마한 출력의 앰프, 눈쌀 찌푸리게 만드는 치어리더, 귀청을 뒤흔드는 풍선 막대기 따위가 주말 나들이하려는 가족이나 공 하나하나를 제대로 음미하려는 ‘극소수’ 야구팬을 쫓아내는 역기능을 하지만 말이다. 더욱이 ‘자유’와 ‘창의’의 상징이라고 자랑하는 연세, 고려 양 대학의 체육대회 때마다 이런 우스꽝스런 집단행동이 여전히 시끌벅적한 것을 보니 인류가 풀지 못할 또 하나의 비밀이 그 속이 있는 듯하다. 내 관심은 축구다. 축구는 무면허 음주운전자의 과속처럼 휴지부 없이 시종을 쾌속으로 질주한다. 급물살처럼 좌우로 휩쓸리는 다이나미즘 때문에 사실 응원단장의 구호에 맞춰 손뼉을 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때문에 축구장에는 북소리와 손뼉, 고함과 야유는 있을지언정 집단체조를 응용한 조직적 응원이란 불필요하다. 그 점에서 몇년 전, ‘붉은 악마’가 등장했을 때, 일본의 ‘울트라 닛폰’을 흉내냈다는 비판은 지금 돌이켜봐도 부적절하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그 원형은 유럽의 응원문화에서 도움을 얻었다. 비슷한 색의 옷을 입고 함성과 손뼉으로 일관하되 결코 경기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경기 자체의 흐름과는 무관한 ‘응원을 위한 응원’은 사양하는 방식은 사실 ‘세계화’된 응원 양상인 것이다. 이 점에서 훌리건(hooligan)의 과도한 집착 또한 부적절하다. 거리의 불량배를 가리키는 이 용어가 축구장의 난동꾼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980년대 영국. 1985년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클럽선수권 결승전 때는 영국 훌리건의 폭력으로 39명이 죽는 참사가 빚어졌다. 그 뒤 ‘반훌리건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대처의 극우보수정치가 훌리건을 낳은 한 원인이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축구광들의 소란과 폭력은 당시 영국 사회의 구조 속에서 배태된 것이다. 그 점만으로는 훌리건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지지’할 수는 없다. 그 양상은 파괴와 폭력이며 그 종착역은 백인남성을 근간으로 하는 파괴적 인종주의일 뿐이다. 게다가 그들은 축구장에 모였으면서도 축구는 구경도 하지 않는다. 그 대척에 롤리건(roligan)이 있다. 영국과 독일의 훌리건에 대비해 1980년대 덴마크 축구팬들을 지칭하면서 만들어진 말이다. ‘조용하고 질서 정연한’이란 뜻의 덴마크어 ‘롤리’에서 따왔다. 이들은 ‘야유’와 ‘욕설’의 차이를 안다. 그들은 시합 내내 열성적인 함성으로 자기 팀을 응원하고 상대방을 야유하지만 결코 욕설과 폭력으로 축구장을 살벌하게 만들지 않는다. 시합이 끝나면 목청껏 노래하고 떠들지만 결코 과격의 폭력 놀이는 즐기지 않는다. 위에 언급한 훌리건의 폭력사망 사태에 대한 반작용인 듯 유네스코는 지난 1985년 롤리건에게 페어플레이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폭력 없는 축구’를 모토로 덴마크의 열성팬들은 자국 대표팀의 경기가 열리면 세계 어디든지 달려간다. 단 조건이 있다. 국가가 울리면 무조건 따라 불러야 하고 상대방 국가가 울릴 때는 최대한의 예의를 지켜줘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맥주’(beer)를 뜻하는 단어를 10개국어 이상 알아야 회원 자격이 생긴다고 한다. 그 한 단어로 상대국에 대한 예의를 차리고 축구에 대한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다. 이번 월드컵 때 약 2천여명의 롤리건이 한국으로 건너온다고 한다. 그들은 이미 현지의 우리 대사관에 ‘beer’를 한국말로 어떻게 부르는지 배웠다고 한다. 내게 묻는다면 물론 ‘맥주’라고 말해주겠지만, ‘인간과 축구에 대한 예의’라는 뜻도 있다고 덧붙이고 싶다. 정윤수/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