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공간에서 되살린 미술운동의 불씨 아트무브닷컴
“그 많던 민중미술가들은 다 어디에 갔을까.” 언젠가 기자는 이런 질문을 들었다. 요즘도 전시회에서 80년대 이름을 날렸던 민중미술가의 이름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민중미술, 또는 민중미술가라는 타이틀은 이력서에 적혀 있는 학적기록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움직임으로서의 민중미술, 집단으로서의 민중미술가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많던 민중미술가들은 어디에 간 것일까.
컴맹 작가들이 마우스 들다
흩어져 활동하던 일군의 민중미술가들이 인터넷 공간(www.artmov.com)에 다시 모였다. 사이트 머리에 뜨는 한 문장은 이들이 모인 이유를 설명한다. “공장을 다시 가동하자!”
지난 3월 초 문을 연 ‘아트무브닷컴’는 진보적 미술운동의 이념을 계승하고자 하는 온라인상의 미술행동 커뮤니티다. 88년 결성 이후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와 함께 민중미술운동의 양대축을 이끌었던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민미련)의 회원들이 주축이 돼 깃발을 올렸다. 지난해부터 민미련 선배들의 자기비판이 뜨거워지면서 퇴비가 되어 1년 뒤 사이트의 싹이 올랐다. 93년 미술계에 파문을 일으킨 민미련 해체선언을 주도했던 홍성담씨도 그 가운데 하나다. “출옥한 뒤 돌아와보니 민중미술운동이 행세주의와 운동브로커들 판이 돼 있더군요. 있으니만 못한 조직은 사라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반강제적인 해산 이후 거의 완벽한 단절이 돼버렸습니다.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시간이었지요. 선배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조직의 해소 뒤 제 갈 길을 가면서도 역사에 대한 진정성과 헌신성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작가들을 다시 모으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민미련의 큰 선배인 송만규씨를 비롯해 삼십대 초반의 젊은 작가들과 독일에서 활동하는 정영창씨까지 30명 가까이 모였다. 이들은 3월7일 첫번째 사이버 그룹전시 ‘전대전’(戰對戰)전으로 활동의 포문을 열었다. 2002년을 전쟁의 해로 선포한 부시의 전쟁에 맞서는 작가들의 전쟁선포다. 15명의 작가들에게 모니터 화면은 캔버스이자 방패이고, 마우스와 스캐너는 붓이자 칼이다.
“이쪽 사람들이 대부분 컴퓨터 문외한들이라 이 작업 자체를 웹아트라고 부르는 건 무리가 있죠. 아트무브닷컴의 목표 역시 웹아트라는 생산물이 아니라 행동으로서의 커뮤니티입니다.” 플래시 작품 를 발표한 작가이자 사이트 운영자인 권산씨의 말이다. 아트무브닷컴의 작업은 참여작가들에게 80년대의 진정성을 회복하는 것 이상의 도전이다. 권씨의 말처럼 작가의 상당수는 “아래아 한글도 사용할 줄 모르는” 컴퓨터 초보자들이다. 전시작품의 상당부분이 웹기능을 이용하기보다 회화나 설치작품을 스캐닝해서 올린 것도 이런 이유다. 스캐닝조차 작가들에게는 후배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쉬운 작업이 아닌 것이다. 요즘 권씨의 전화통은 불이 난다. 이메일 보내는 법에서 포토숍 이용까지 글자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작가들이 질문을 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들의 열의는 대단하다. 수묵화를 전공한 홍성민씨는 포토숍을 공부해 콜라주 작업을 해 보냈고, 전남지역에서 미술교사를 하는 진영조씨 역시 처음으로 플래시 작품을 제작했다. “3월7일 밤 11시 전시 오픈 때 모든 회원들이 사이버 공간에 집합하기로 했어요. 한 작가는 두 시간 동안 배타고 나와서 PC방으로 달려가기도 했죠.” 얼마 전에는 주로 광주·전남 지역의 작가들이 대거 상경해 홍씨와 함께 남대문에 나가 디지털 장비를 단체구입하기도 했다.
‘삐딱한 아이들’과의 연대도
4월12일부터 시작하는 ‘대통령선거’전은 서서히 달아오르는 대선 분위기에 맞춰 준비하는 이벤트. 참여작가들이 정치인의 아바타가 돼 사이버 공간에서 포스터도 만들고 사이버 유세도 하며 온라인 공간의 직접 투표까지 하게 된다. “전시보다는 작가들이 컴퓨터를 가지고 놀면서 웹공간의 기능과 그 속성에 익숙해지도록 연습해보는 일종의 워크숍 과정입니다” ‘대통령선거’전의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윤진 작가는 발랄한 아이디어로 작가들의 참여를 끌어내고 있다. 이회창, 이인제 등 오는 대선 후보들에서 전두환, 박정희 등 전직 대통령까지 망라해 선관위가 제시한 18명의 후보 가운데 하나를 각각의 작가들이 ‘찜’해서 선거전을 벌여나갈 예정이다. 작업 툴뿐 아니라 사이버 공간의 허와 실을 작가들이 직접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 이 행사의 취지. 패러디나 풍자에 가까운 이 행사와 별도로 대선에 즈음해 작가들의 정치적 입장을 공개하는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
뿔뿔이 흩어졌던 과거의 민중미술가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아트무브의 목표는 웹상에서 떠도는 젊은 미술행동가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지난해 홍씨는 인터넷에서 ‘삐딱한’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활발하게 띄우고 있는 ‘아이들’ 십여명을 작업실로 초대했다. 그 중에는 이미 스타가 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일면식도 없이 초대장을 띄웠지만 거의 다 찾아와 밤을 새우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솔직히 나는 엉뚱한 그림이나 그릴 줄 알았지 미술운동 같은 데는 전혀 관심 없는 무뇌아들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 이 친구들은 선배들이 어느 날 모두 떠나버렸다면서 자신들은 고향도 뿌리도 없는 떠돌이일 뿐이라며 나를 막 공격하는 거야. 꼼짝없이 당했어. 맞는 말이에요. 나 같은 선배들이 나쁜 놈이지 뭐.” 아트무브는 기존의 미술행동가들에게 문을 연 아트무브와 별개로 다른 사이트를 준비하고 있다. 알통닷컴(www.altong.com)이라는 제목으로 올 상반기 문을 여는 이 사이트는 발칙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젊은 미술행동가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할 공간이다.
이 사이트에는 민미련 출신의 1세대 디지털 웹아티스트들도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된다. 민미련 해소 당시 젊은 운동가들의 반수 정도는 디지털 작업으로 방향을 돌렸다. 퓨처아트, 미메시스 등 실험적 디지털 애니메이션 그룹이 이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성과는 국내외 각종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통해 금방 드러났다. 서울 민미련 출신의 <마리이야기> 이성강 감독 등 현재 애니메이션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작가 상당수가 민중미술가 출신이라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남보다 일찍 애니메이션에 눈을 돌린 덕분에 빠르게 성장했고, 자리도 잡았다. 이제는 새로운 미술행동을 꿈꿔야 할 때다.” 퓨처아트 1기 출신의 윤진씨를 비롯해 1세대 디지털 작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유다.
천천히, 소박하게…
“십년 동안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습니다. 아주 천천히 소박하게 진행해나갈 예정입니다.” 홍성담씨는 후배들에게 늘 “천천히 하자”고 이야기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비전과 자기 논리를 만들지 못해 무너졌던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빠르고 큰 성과는 기대하지 않는다. 아트닷컴의 과제는 현실가능한 영역에서부터 새로운 ‘행동’을 시작하고 책임지는 것, 작은 변화의 입김에 휘청대지 않는 탄탄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아트무브의 노선은 카피레프트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허락 없이 아트무브의 콘텐츠를 복사하거나 링크시키기를 사이트의 행동가들은 진심으로 바란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지난 3월 초 문을 연 ‘아트무브닷컴’는 진보적 미술운동의 이념을 계승하고자 하는 온라인상의 미술행동 커뮤니티다. 88년 결성 이후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와 함께 민중미술운동의 양대축을 이끌었던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민미련)의 회원들이 주축이 돼 깃발을 올렸다. 지난해부터 민미련 선배들의 자기비판이 뜨거워지면서 퇴비가 되어 1년 뒤 사이트의 싹이 올랐다. 93년 미술계에 파문을 일으킨 민미련 해체선언을 주도했던 홍성담씨도 그 가운데 하나다. “출옥한 뒤 돌아와보니 민중미술운동이 행세주의와 운동브로커들 판이 돼 있더군요. 있으니만 못한 조직은 사라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반강제적인 해산 이후 거의 완벽한 단절이 돼버렸습니다.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시간이었지요. 선배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조직의 해소 뒤 제 갈 길을 가면서도 역사에 대한 진정성과 헌신성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작가들을 다시 모으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민미련의 큰 선배인 송만규씨를 비롯해 삼십대 초반의 젊은 작가들과 독일에서 활동하는 정영창씨까지 30명 가까이 모였다. 이들은 3월7일 첫번째 사이버 그룹전시 ‘전대전’(戰對戰)전으로 활동의 포문을 열었다. 2002년을 전쟁의 해로 선포한 부시의 전쟁에 맞서는 작가들의 전쟁선포다. 15명의 작가들에게 모니터 화면은 캔버스이자 방패이고, 마우스와 스캐너는 붓이자 칼이다.

사진/ 김희상 작<별난사나이를 위한 기념비 Ⅰ+Ⅱ=Ⅲ(지구는내꺼)>

사진/ 백은일 씨의 대통령 선거전 포스터.

사진/ 아트무브닷컴으로 다시 뭉친 옛 민미련의 민중미술가들. 왼쪽부터 홍성담·원산·윤진 씨. (이정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