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의 한 산란계 농장 케이지. 이 농장에 있는 닭 5만 마리는 하루 평균 달걀 2만2천 개를 생산한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진흙·꼬리 없애 ‘생산장치’로 이는 동물의 삶을 완전히 통제해서 이룬 결과였다. 그중 핵심은 배터리 케이지 같은 ‘밀집형 가축사육시설’이었다. 20세기 중반부터 미국 등 서구에서 시작된 밀집형 사육시설을 중심으로 한 사육 방식은 기존 방식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 첫째, 작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개체를 넣어 사육 밀도를 높였다. 동물은 콘크리트 벽과 바닥으로 된 ‘공장’에 들어가 살았다. 닭에게는 몰래 가서 알을 낳던 자리가 사라졌다. 돼지에게는 구를 수 있는 진흙 목욕탕이 없어졌다(돼지는 원래 이렇게 체온을 식힌다). 작은 공간에 많은 개체를 넣다보니 동물의 면역력이 약해졌다. 각종 질환이 생기면 삽시간에 번졌다. 폐사 개체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돼지의 경우 어릴 때 꼬리를 잘랐다. 스트레스를 받은 돼지가 다른 돼지의 꼬리를 물기 때문이다. 임신한 암퇘지와 분만한 암퇘지는 따로 모아 ‘스톨’이라는 감금틀에 넣었다. 몸을 한 바퀴 돌 수도,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이 작은 철제 우리에서 돼지는 그저 일자로 누워 있어야 한다. 어미돼지가 새끼를 깔아뭉갤 수 있어 만든 사육 장치다. 둘째, 생명공학을 이용한 사육 기법이 적용됐다. 과학자와 농장주들은 적은 비용으로 높은 품질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사료에는 가장 좋은 품질의 고기와 생산물이 나올 수 있도록 원료를 배합했다. 칼슘, 인, 비타민 등 영양소를 어떻게 배합하느냐가 달걀 품질을 좌우했다. 과거에는 닭을 실내에서 키울 수 없었다. 실내에서는 자라지 않고 알 낳는 능력도 떨어졌다. 그러나 비타민D의 발견은 실내에서도 24시간 닭을 사육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셋째, 농장은 기계화와 자동화로 움직이는 첨단 공장 시설로 변모했다. 먹이를 자동으로 줄 뿐만 아니라 온도와 습도, 광량을 자동 조절해 동물은 흡사 온실에 사는 화초와 비슷해졌다. ‘무창계사’라고 하는 첨단 자동화 공장은 아예 사람이 들어갈 필요조차 없다. 환기구 없이 자동으로 공기를 순환시키고, 닭 수만 마리를 인부 한 명이 관리한다. 사람이 들어갈 때는 단 한 번, 계사를 비우는 날이다. 인간이나 동물은 모두 정서적인 주체다. 둘 다 고통을 느끼고 희로애락을 표현할 줄 안다. 정서적인 두 주체의 몸이 만나는 지점에서 영향력이 교환된다. 그 영향력이란 서로를 움직이는 힘이다. 사랑·귀여움·애착·혐오 등의 감정을 일으키고, 안고 쓰다듬고 피하고 도망치는 등의 행위를 일으킨다. 이렇게 몸과 몸을 연계하는 에너지 혹은 능력을 ‘정동’(Affect)이라고 한다. 공장식 축산의 형성은 바로 인간과 동물의 만남을 소거하는 과정이었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닭과 마당에서 만났다. 닭은 집 구석구석에 알 낳는 자리를 봐두었고, 인간은 닭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외양간에선 소가 살았고, 아침에는 쇠죽을 끓이는 냄새가 퍼졌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본격화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동물은 물리적으로 격리됐다. 동물은 만원버스 같은 공장에 입주했다. 소거된 인간과 동물의 만남 미국의 동물보호 운동가이자 변호사인 짐 메이슨은 전통적인 미국의 농가에서 자랐다. 그는 12년 동안 손으로 소젖을 짰다. 이것을 공장식 축산 체제의 젖소와 비교해보자. 공장식 축산에서 소젖 짜기는 착유기가 대신한다. 사람과 동물의 몸과 몸의 부딪침, 긴밀한 만남은 사라지고 없다. 만약 손으로 젖을 짰다면, 설사 그것이 젖을 훔치는 행위라고 하더라도, 약간의 불편함이나 미안함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몸과 몸이 만났을 때 나오는 힘, 동물이 주는 정동의 힘이다. 공장식 축산은 정동의 힘을 소거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비가시적 영역으로 동물을 이동시켜 착취를 은폐하고 만남을 제한하자, 인간의 죄의식은 말라버렸다. 우리는 양념치킨 한 마리가 담긴 종이상자를 열면서, 좁은 공간에 갇혀 6주 만에 생을 마감한 어느 닭의 슬픈 삶을 연상하지 못한다. 이거야말로 공장식 축산이 가진 가장 큰 폐단이다. 남종영 <한겨레> 기자 fandg@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