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에 일시정지를 제안하는 미술… 2002 광주비엔날레의 네 가지 프로젝트를 돌아본다
2002년 광주의 봄은 ‘멈-춤’ 표지판들 속에 정지해 있었다. 도시 곳곳에 솟아난 ‘2002 광주비엔날레’ 광고판들 속에서 ‘멈-춤’이란 두 단어는 유난히 사람들 눈길을 끌었다. 차들이 질주하는 도심 한가운데서 ‘멈-춤’이라니…. 끔찍하게 빠른 삶을 살아가는 데 적응이 잘 안 되는 이들에게 올 광주비엔날레는 복음처럼 찾아온 듯했다. 4회째를 맞으며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현대미술제로 자리잡은 광주비엔날레를 둘러보러 광주역이나 광주비행장에 내린 나그네들은 행사장으로 가는 길가에서 푸른 하늘빛으로 펄럭이는 ‘멈-춤’(PAUSE·止) 깃발들의 마중을 받았다. 낯선 도시를 찾은 손님들은 이번 미술제가 지닌 뜻 하나를 미리 읽으며 청량한 기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지난 3월28일 오전 11시, 개막을 하루 앞두고 열린 ‘2002 광주비엔날레 프레 오픈’에서 성완경 예술감독이 강조한 것도 바로 이 ‘멈-춤’이란 전시 주제였다. “지난 세기 동안 숨가쁘게 달려온 속도에 대한 일시정지이자 휴식을 미술이란 형태로 제안하고 싶었다. 멈춤은 성찰과 재충전에 대한 권유다. 올 비엔날레에 참가한 작가들은 관람객들에게 휴식과 자유, 생성과 열림의 손길을 내민다. 이것은 새로운 비엔날레를 보여주는 하나의 대안이기도 하다. ‘멈춤’이란 한국미술이 제안하는 ‘유연성의 야심’이다. 광주는 새 세기에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인 ‘느림’을 전세계에 유포하는 문화적 발사기지가 되고자 한다.”
올 광주비엔날레에서는 기존의 ‘전시장 그림’들을 볼 수 없었다. ‘진열되어 있는 미술’이 아니라 ‘행동하는 미술, 함께 체험하는 미술’이 세계 30여개국에서 온 230여명의 작가들을 사로잡았다. 본전시와 특별전 등의 구분을 없애고 프로젝트 4개로 비엔날레를 구성한 대담함도 신선했다. 오는 11월 열리는 상하이 비엔날레를 준비하고 있는 중국 출신 웡링 예술감독은 “베리 임프레시브(매우 인상적)”란 한마디로 부러움을 나타냈다. 경쟁 상대에게 던질 수 있는 최상의 찬사였다.
# 프로젝트 1 ‘멈춤'
지난 3월29일, 중외공원 안 비엔날레관에서 막을 올린 프로젝트 1 ‘멈-춤’전은 관람객들을 낯선 체험 속으로 이끌었다. 베니어판으로 지은 가건물들이 늘어선 전시장 안을 어슬렁거리며 사람들은 자주 멈춰서서 작가들이 제안하는 ‘생각의 휴식’을 즐겼다. 유네스코 본상을 받은 타이작가 수라시 쿠솔웡의 작품 <휴식 기계>는 ‘딱정벌레’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폴크스바겐 자동차를 뒤집어놓은 것으로 흔들거리는 안락의자를 연상시켰다. 관람객들은 그 응접실에 누워 영화를 보거나 인터넷을 즐기며 휴식을 취했다. 특별상을 수상한 주재환씨의 작품 <크기의 비교>는 또 다른 멈춤을 끌어냈다. 세계화의 광풍을 주도하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 속에서 자본주의, 개발의 논리, 제국주의·세계주의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전시장에 와서 바쁘게 돌아치던 일상을 잠시 접고 한가로운 되씹음 속에서 잊어버렸던 자신을 돌아봤다.
성완경 예술감독과 함께 전시를 기획한 찰스 에셔(스웨덴 말뫼 현대미술센터 디렉터)와 후 한루(중국 출신 독립 큐레이터)가 이번 비엔날레를 “전시회가 아니라 ‘라이프 이벤트’”라고 정의한 까닭이 여기 있다. 현대 미술이 사람들에게서 앗아간 ‘성찰의 공간’을 되돌려놓겠다는 기획자들의 뜻이 얼마나 큰 호응을 얻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인간 행위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광주비엔날레는 확실한 차별성을 확보했다.
# 프로젝트 2 ‘저기:이산의 땅’
‘멈-춤’이란 주제는 일상뿐 아니라 한민족의 역사 속으로도 길을 넓혔다. 민영순(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 주립대 미대) 교수가 구성한 ‘저기:이산의 땅’은 만주·미주·남미 등으로 뻗어나간 한국인들의 해외 이주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획전이다. 재외동포와 해외 거주 한국 작가 24개 팀이 사진, 기록 필름, 설치물 등 다양한 작품들로 한국인의 정체성 문제를 다뤘다. <오리엔탈리즘> 연작을 내놓은 수잔 초이는 특히 동양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왜곡한 에로틱한 사진들로 큰 관심을 모았다.
미술평론가 하계훈씨는 “외국에 살며 ‘나는 누구인가’란 아이덴티티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뜻깊었다”며 “올 비엔날레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밀도 있는 결과물”이라고 평가했다.
# 프로젝트 3 ‘집행유예’
49명 작가가 참여한 ‘집행유예’전이 열리고 있는 5·18 자유공원은 22년 전, 뜨거웠던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간직한 공간이다.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폭도로 몰린 시민과 학생들이 개처럼 끌려와 고문받고 갇혀 있다가 재판정에 서서 사형과 징역형에 처해진 그 흔적이 몇채의 건물로 남았다. 전시 기획자인 성완경씨는 “처음 이곳을 둘러봤을 때, 하루 참배객이 3명꼴이란 얘기를 듣고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꼈다”며 ‘기억의 문제’가 프로젝트 3에서 다루고 싶었던 주제라고 말했다.
외국인들을 포함해 관람객들에게서 이번 비엔날레에서 가장 ‘광주적인 전시’, ‘가장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는 평을 들은 배경이 이 모순에 있었던 것 같다. 윤동천씨가 공원 안 담벼락에 붙인 현수막의 문구 ‘목격자를 찾습니다’처럼, 이제 22년 전 그 아픈 역사의 목격자를 찾는 일을 미술이 떠맡았다. ‘집행유예’전은 ‘조건부 정지’를 당한 유예된 시간 속에서 유예된 채 멈춰선 한국 민주주의를 되돌아보는 미술의 힘을 보여준다. 광주비엔날레가 그동안 광주라는 커뮤니티와 겉돌았던 한계가 ‘집행유예’전에 와서 돌파구를 찾은 인상을 받았다.
# 프로젝트 4 ‘접속’
자연과 사람, 공무원과 시민, 생선가게 아줌마와 아티스트가 만나는 곳이 또한 광주비엔날레였다. 옛 남광주역이 있던 도심철도 폐선부지에서 벌어진 프로젝트 4 ‘접속’은 미술과 도시를 맺어주려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 정기용(건축과)의 마음이 크게 다가오는 전시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20여명의 건축가들 뜻이 기차가 멈춰선 뒤 버려진 땅 위에서 봄꽃보다 더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2002 광주비엔날레’는 전시 기획자인 후 한루의 말처럼 “개막은 있으나 폐막은 없는” 비엔날레로 남을지도 모른다. 작가들이 출품한 것은 “생산품이 아니라 ‘생산성’”이었기에, 그 정신은 6월29일 비엔날레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세계 미술판을 떠돌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들의 고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프로젝트 3에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을 잴 수 있을까?>를 출품한 김종구씨는 작품을 설치하느라 며칠 밤을 세운 꺼칠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관람객들이 낯설다면 낯선 이 비엔날레를 얼마나 즐겁게 구경할까요? 저를 때로 멈추게 하는 가장 궁금한 질문입니다.”
정재숙 기자/ 한겨레 문화부 jjs@hani.co.kr

사진/ 2002 광주비엔날레 성완경 예술감독.

사진/ 2002 광주비엔날레 공식 포스터.

사진/ 주재환 작 <크기의 비교, B-52:빈라덴>


사진/ 신학철작 <한국현대사>.

사진/ 수잔 초이 작 <오리엔탈리즘> (왼쪽). 배영환 작 <잘가라 내 청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