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개인, 폭력에 대한 독일 극작가의 고찰 ‘하이너 뮐러 페스티벌’
객석이 하나둘씩 차기 시작할 때부터 연극은 이미 시작됐다. 환히 밝힌 무대에서 단란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가족이 슬로모션으로 움직이고 있다. 젊은 아빠는 탁자에서 음식을 먹는다. 그러다 한구석에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 아이를 보며 미소짓는다. 연약해 보이는 젊은 엄마는 자못 으시시한 칼로 무언가를 다듬고 있다. 푹 꺾인 고개가 표정을 감추고 있다. 객석이 정리되자 막을 올리기 위해 모든 조명이 꺼진다. 갑자기 객석 뒤쪽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악!” 무대가 아니라 객석에서 터져나온 외마디 소리다. 1초쯤 ‘반짝’ 하고 빛이 뻗어나간 사이로 조금 전까지 표정이 없던 젊은 여인이 탁자 위에서 처참한 몰골로 죽어가는 모습이 공포스럽게 스쳐지나간 탓이다.
관객을 사로잡는 긴장감
<그림쓰기>는 갑작스런 긴장의 충격을 주고는 그 고삐를 조금도 늦추지 않는다. 카메라를 터뜨린 이는 살인현장을 검증하는 고참 형사였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죽었고, 아이는 넋이 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형사가 골몰하는 사이 영화의 회상장면처럼 과거의 사건들이 동시에 펼쳐진다. 음험한 미스터리와 ‘에로틱한’ 야릇함이 넘실대면서 잔인하고 섬뜩한 폭력이 순식간에 재현되는 현장이다.
연출자 정세혁씨는 원작자 하이너 뮐러가 저지른 살육과 피의 전장에서 그와 싸워 그를 넘어서려고 했으나 그의 손아귀에 압도당해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으나 작품은 무서운 기세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연극계의 이단아’로 불려온 기국서 예술감독이 “아주 감각적이고 훌륭하다”고 귀띔해준 건 과장이 아니었다. 영화에서 아무리 대단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건 2차원의 스크린에 갇혀 있을 뿐이다. 반면 연극은 아주 좁은 소극장 안에서도 사건이 얼마나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꾸려질 수 있는지, 배우의 몸이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지 체감하게 해준다. <그림쓰기>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림쓰기>는 4월21일까지 서울 대학로 단막극장(02-762-0810)에 열리는 ‘하이너 뮐러 페스티벌’의 세 번째 작품이다. 페스티벌을 이루는 세 작품은 매일 차례로 상연된다. 오후 4시30분 <햄릿기계>(연출 함형식), 6시 <메데아>(연출 이자순), 7시30분 <그림쓰기>의 순이다. 작품들은 ‘단막극장’답게 짧고 압축적으로 이어진다. 하이너 뮐러(1929∼95)는 옛 동독에서 주로 활동했던 극작가로 브레히트에 견주기도 한다. 2차대전 이후 독일의 살육과 세계의 야만성을 극화하면서 시대와 불화하는 개인의 고민에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좌절한 사회주의의 역사, 역사 속의 지식인, 역사 속에 되풀이되는 폭력문제, 남성과 여성의 역사적 역할 등이 뮐러의 주제들이다. 사회주의와 인간, 자본주의와 인간 뮐러의 대표작 <햄릿기계>는 이런 모든 문제의식을 뭉뚱그려 담고 있다. 나이 들어 죽음을 앞둔 햄릿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다. 아버지의 육신을 도려내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오필리어의 따뜻한 사랑에 구원받으려는 순간 그를 죽여버리는 식이다. 체 게바라와 투쟁에 나선 노동자가 햄릿의 사그라든 육신과 정신을 조롱하기도 한다. 이야기는 쉽게 설명되거나 흘러가지 않지만 순간순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메데아>의 출연자들은 모두 여성이다. 만삭의 몸으로 고통스런 진통에 시달리는 메데아 앞에 순백, 정열, 악몽의 형상을 한 세명의 메데아, 즉 각기 다른 자아가 나타난다. 복수의 화신으로 자기 자식까지 살해하는 비극의 주인공을 역사에 대한 항거자로 그려낸다. 예술감독 기국서씨는 “지금까지의 많은 작품들은 대부분 개인의 약점과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반성을 강요했다”며 “옛 동독의 작가는 사회주의와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했지만 앞으로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자본주의와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페스티벌의 의의를 말했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페스티벌 출품작 <그림쓰기>는 좁은 소극장안에서도 사건이 얼마나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꾸려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연출자 정세혁씨는 원작자 하이너 뮐러가 저지른 살육과 피의 전장에서 그와 싸워 그를 넘어서려고 했으나 그의 손아귀에 압도당해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으나 작품은 무서운 기세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연극계의 이단아’로 불려온 기국서 예술감독이 “아주 감각적이고 훌륭하다”고 귀띔해준 건 과장이 아니었다. 영화에서 아무리 대단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건 2차원의 스크린에 갇혀 있을 뿐이다. 반면 연극은 아주 좁은 소극장 안에서도 사건이 얼마나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꾸려질 수 있는지, 배우의 몸이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지 체감하게 해준다. <그림쓰기>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림쓰기>는 4월21일까지 서울 대학로 단막극장(02-762-0810)에 열리는 ‘하이너 뮐러 페스티벌’의 세 번째 작품이다. 페스티벌을 이루는 세 작품은 매일 차례로 상연된다. 오후 4시30분 <햄릿기계>(연출 함형식), 6시 <메데아>(연출 이자순), 7시30분 <그림쓰기>의 순이다. 작품들은 ‘단막극장’답게 짧고 압축적으로 이어진다. 하이너 뮐러(1929∼95)는 옛 동독에서 주로 활동했던 극작가로 브레히트에 견주기도 한다. 2차대전 이후 독일의 살육과 세계의 야만성을 극화하면서 시대와 불화하는 개인의 고민에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좌절한 사회주의의 역사, 역사 속의 지식인, 역사 속에 되풀이되는 폭력문제, 남성과 여성의 역사적 역할 등이 뮐러의 주제들이다. 사회주의와 인간, 자본주의와 인간 뮐러의 대표작 <햄릿기계>는 이런 모든 문제의식을 뭉뚱그려 담고 있다. 나이 들어 죽음을 앞둔 햄릿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다. 아버지의 육신을 도려내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오필리어의 따뜻한 사랑에 구원받으려는 순간 그를 죽여버리는 식이다. 체 게바라와 투쟁에 나선 노동자가 햄릿의 사그라든 육신과 정신을 조롱하기도 한다. 이야기는 쉽게 설명되거나 흘러가지 않지만 순간순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메데아>의 출연자들은 모두 여성이다. 만삭의 몸으로 고통스런 진통에 시달리는 메데아 앞에 순백, 정열, 악몽의 형상을 한 세명의 메데아, 즉 각기 다른 자아가 나타난다. 복수의 화신으로 자기 자식까지 살해하는 비극의 주인공을 역사에 대한 항거자로 그려낸다. 예술감독 기국서씨는 “지금까지의 많은 작품들은 대부분 개인의 약점과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반성을 강요했다”며 “옛 동독의 작가는 사회주의와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했지만 앞으로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자본주의와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페스티벌의 의의를 말했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