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생리충’. 월경을 다룬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를 만든 김보람 감독은 기사에 달린 악플 중에서 이 낱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책 <생리 공감>에 썼다. “이 단어가 주는 모멸감을 여성인 나 자신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다.” 월경 혐오는 인간을 생물학적 남성/여성으로 구분하고 남성을 이성이자 문화, 여성을 몸이자 자연으로 묶는 이분법에 뿌리내리고 있다. 박이은실은 책 <월경의 정치학>에서 “이런 이분법은 자연이 문명에 지배되는 것처럼 성차에 따른 차별을 강화한다”고 썼다. 이 책에서 소개한 연구 결과들을 보면, 성별 역할이 뚜렷이 구분된 곳일수록 월경 혐오는 도드라졌다. 13세기 유대인 혐오에 동원되다 이 이분법에 따른 혐오는 왜 나왔나?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닌 유한성과 동물성을 투사할 타자가 있어야 자신은 그렇지 않은 존재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마사 누스바움은 책 <혐오와 수치심>에서 분석했다. 타자에게 뒤집어씌우고 손가락질해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는 방식이다. 그 대표적인 혐오 투사물이 여성의 몸이고 월경이다. 염운옥의 책 <낙인찍힌 몸>을 보면, 13세기부터 유대인 혐오에 월경이 동원됐다. 유대인 남성은 매달 피를 흘린다는 속설이 퍼져나갔다. 그 이분법이 내 몸에 스며 30년간 피 흘리는 내 몸을 혐오했다. 그런데 적어도 나는 세상이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으로 이뤄졌다는 이분법에 타자로라도 낄 수 있었다. 내 법적 성과 내가 느끼는 성이 같아 주민등록번호를 써야 하는 그 수많은 순간마다 별 고민 없이 적었다. 이런 편안함도 상대적 특권이다. 할머니부터 나까지 대대로 월경에 침묵하게 한 성별 이분법은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기도 한다. 세상은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으로 이뤄져야만 하니, 바로 여기 있는 사람을 없다고 한다. 존재 자체가 틀렸다고 한다. 환장할 노릇이다. 이혜민, 김승섭 등은 논문 ‘한국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 관련 경험과 장벽’에서 2017년 미국 연구를 바탕으로 한국 트랜스젠더 인구를 20만1377명으로 추산했다. 이 ‘보여선 안 되는’ 20만 명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학교에서, 직장에서 쫓겨난다.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당하며 온갖 혐오의 말을 뒤집어쓴 트랜스젠더 숙명여대 합격생은 입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안전이 위협당했나? 여성이 ‘생리충’이라 불려선 안 되듯, 같은 이분법의 피해자인 트랜스젠더가 ‘내시’로 불려선 안 된다. 남성이 여성을 향해 뱉은 ‘생리충’이 혐오이듯, 그 누구건 트랜스젠더를 향해 뱉은 조롱도 혐오다. 나의 눈으로 나의 몸을 볼 때 “각자의 상황대로, 각자의 존재대로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직접 듣자. 그리고 그대로 존재하게 하자. let it be.” 박이은실은 책 <월경의 정치학>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를 만들며 월경에 대한 수많은 경험과 자료를 취재한 김보람 감독은 어느 날 자기 가슴을 있는 그대로 봤다. 항상 작아서 부끄러웠던 가슴이다. “나는 평소처럼 샤워를 한 뒤 세면대 앞에서 물기를 닦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몸을 바라보았다. 그날 나는 무언가 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가슴은 여전히 작았다. 영화를 만들고 편집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선지 더 작아 보였다. 그런데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개성 있어 보였다. (중략) 아마 생리컵을 쓰면서 자기 몸과 친해져 남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던 몸을 본인의 시각으로 보게 된 것일지 모른다.” 한국에서 생리대가 판매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광고에서 월경혈은 파란색이었다. 지난해에야 빨간 피가 등장했다. 이제야 내 피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폐경 아니 완경이 코앞이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