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이 좋아 그림책방까지 만든 책방지기 서민경씨(왼쪽)와 권은정씨.
짧은 글과 그림으로 구성된 그림책은 여백이 많은 책이다. 그 여백이 독자에게 많은 이야기와 상상력을 끄집어낸다. 잊고 지낸 지난 아름다웠던 순간을 떠올리게 하거나 내 마음의 소리를 듣게 하거나 삶의 행복과 의미를 되새기게 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위로의 책이자 사랑의 책이자 감동의 책이리라. 그림책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함께 읽을 수 있는 모두를 위한 책이기도 하다. 바쁘게 살아가느라 숨 돌릴 틈 없는 어른에게는 더욱 필요한 책이다. 설 연휴를 맞아 잠시 인생의 쉼표를 찍게 하고 위로를 건네는 그림책과 그 매력에 흠뻑 빠진 어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한미화 출판평론가, 정미영 동화작가 등 그림책 전문가들이 꼽은 ‘내 인생 최고 그림책’ 5권도 추천한다.
<할머니의 식탁> <백조 왕자> <나는요> <바다로 간 고래> <달케이크> <마음은 언제나 네 편이야>…. 20㎡(6평) 규모의 좁은 공간에 알록달록한 그림 표지의 그림책이 빼곡히 진열돼 있다. 1월1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는 그림책방 ‘노른자’. 그림책을 좋아하는 세 엄마이자 문래동 이웃 서민경씨, 권은정씨, 박성혜씨가 함께 만든 곳이다. 2017년 7월 문을 연 이곳에서는 그림책 작가 강연, 책 모임, 도자기 수업 등이 열린다. 책방지기 권씨는 “아이를 둔 부모들뿐 아니라 3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손님이 찾는다”고 말했다.
세 엄마의 문래동 그림책방
책방지기 서씨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그림책 세계에 입문했다. “보통 때처럼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줬어요. 그때 읽은 책이 <행복한 엄마 새>예요. 아기 새를 키우는 엄마 새 이야기인데 엄마 새가 꼭 나인 것 같았어요. 책을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뚝 떨어지는 거예요. 나도 처음에는 행복한 엄마 새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아이에게 소리 지르는 고함쟁이가 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눈물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뜻한 위로를 받았어요.” 그때부터 아이 책을 살 때 자신을 위한 그림책도 산다고 한다. 아이는 동물, 공룡이 나오는 책을 좋아하고 서씨는 나를 돌아보고 위로를 주는 책을 선호한다.
그림책은 일상에 지쳐 무뎌진 감정을 깨운다. “그림책을 읽으면서 감동받을 때가 자주 있어요. 그럴 때 닫혀 있던 감정의 문이 갑자기 열린 것처럼 잘 웃고 잘 울어요. (웃음) 제가 원래는 머리형 인간이었는데 이제는 가슴형 인간이 된 듯해요. 마음이 말랑말랑해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책을 읽으며 자기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게 됐단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고 어떤 글에 감동을 받는지 알게 됐어요. 그날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요. 그림책을 읽으며 나를 더 알아가고 있어요.”
책방지기 권씨는 그림책방을 운영하며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숨은 그림책을 찾는 재미가 생겼단다. “혼자 어린이도서관에 가서 그림책을 몇 시간씩 보고 올 때도 있어요. 그림이 예쁜 예술적인 그림책을 좋아하거든요. 최근에 읽은 책 중에는 안 에르보 작가의 <바람은 보이지 않아>가 그런 책이에요. 앞이 보이지 않는 한 소년이 바람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예요. 그림도 좋지만 책 메시지도 기억에 남아요.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곁에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을 생각하게 됐어요. 그림책의 힘이죠.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고 따뜻한 말을 건네는 속 깊은 친구 같아요.” ‘그림책 읽는 어른’은 노른자 책방지기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인을 위한 그림책이 잇따라 출판되고 그림책을 즐겨 보는 성인 독자도 늘고 있다. 위로와 힐링 책이 관심받는 시대, 그림책 역시 어른에게 ‘위로의 책’ 장르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어두운 현실에 지친 이들에게 어린 시절 추억과 함께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자연과 사람, 공감과 우정, 사랑 등 잊고 지낸 삶의 가치는 물론 종이책이라는 물성이 가진 매력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선한 시선과 완벽한 사랑 표현 <이토록 어여쁜 그림책>에서는 그림책만이 줄 수 있는 ‘동심에서 찾은 위로’에 주목한다. “‘어린이’로 상징되는, 우리 마음의 원형만이 가질 수 있는 선한 시선, 온전한 이해, 완벽한 사랑이 가능한 세계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림책이 생물학적 나이를 넘어 어른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살벌한 현실에선 존재하기 어려운 이 따뜻한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림책을 함께 읽는 다양한 독서 모임도 꾸려지고 있다. 책읽는사회문화재단에 등록된 전국의 독서 모임은 2025개다. 이 중에서 그림책 독서모임은 240여 개에 이른다. 에세이 <어른의 그림책>을 쓴 황유진 작가는 성인을 위한 그림책 모임 ‘그림책 37도’를 열고 있다. 황 작가도 처음에는 그림책을 아이들이 보는 책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2009년 세계 일러스트원화전에서 그림책 원화를 보고 그 매력에 빠졌다. “전시회에 다니다가 인상적인 원화를 봤어요. 붉은 털실과 대충 그린 듯한 드로잉이었어요. 잘 그렸다기보다 주인공의 감정과 상황이 명료하게 잘 보인 그림이었어요. 그림을 꼭 잘 그리지 않아도 이렇게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구나 싶어 재밌었어요. 그러고는 집에 와서 처음으로 돈을 주고 그림책을 샀어요. 그 책이 <나는 기다립니다>예요. 처음에는 이 책을 쓴 세르주 블로크 작가가 너무 좋아서 그 작가의 그림책을 한두 권 사서 보게 되었어요. 서점에 가서 표지가 예쁜 그림책이 있으면 넘겨보고 그렇게 그림책을 좋아하게 됐어요.” 누군가에게 읽어줄 때 더 빛 발해 처음엔 혼자 읽다가 ‘그림책 37도’를 꾸리며 함께 읽는 재미도 더하고 있다. “그림책 읽기에는 정답이 없어요. 다 같이 같은 책을 읽어도 모임 사람들이 다 다른 의미로 읽어요. 그림책은 그렇게 ‘각자 다르게 읽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건네요. 글도 짧아 읽기 부담 없으니 다들 읽고서 자유롭게 각자 느낌을 이야기해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신의 생각이 존중받는 느낌도 받고요.” 황 작가는 모임을 할 때 항상 그림책 낭독을 한다. 그림책은 누군가에게 읽어줄 때 빛을 발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우리 다 다른 목소리를 가지고 있잖아요. 같은 책도 누가 읽어주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요. 한번은 혼자 읽었을 때 재미없어 덮었던 책인데 다른 회원분이 읽어주니 마음이 확 당기는 거예요. 갑자기 눈과 귀가 열리는 것 같아 다시 읽게 된 책도 있어요.” 무엇보다 그림책을 통한 ‘소통의 기쁨’이 크다. 황 작가는 말했다. “그림책 주인공이 겪는 위기와 갈등은 누구나 다 겪는 거예요. 모임 참석자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춰 그걸 해석해요. 다르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들으며 ‘인생을 살면서 휘청거리는 것은 나만이 아니구나’ ‘누구나 시련을 견디고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돼요.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정서적 지지를 보내요.” ‘그림책 37도’ 회원인 언어치료사 김봉순씨는 그림책도 좋지만 그림책을 만드는 사람, 그림책을 읽는 사람 등 그림책과 관련된 사람들도 사랑한단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만의, 비슷한 마음의 결이 있는 것 같아요. 따뜻하고 맑고 순수한. 그런 이들과 그림책 이야기를 나누면 마음이 깨끗해지는 느낌이에요.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처럼 따뜻해지고요.” 울적한 나를 위해 읽어주기도 김씨는 모임에서뿐 아니라 친구나 지인들을 만날 때도 그림책을 들고 나간다. “힘든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직접 하기 좀 쑥스러울 때 있잖아요. 그럴 때 그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위로의 메시지가 담긴 그림책을 읽어줘요. 내가 받은 감동을 전하고 싶어 친구들에게 그 책의 내용을 들려줄 때도 있어요. 나를 위해서도 읽어줘요. 하루를 마무리할 때나 울적할 때 혼자 있는 공간에서 나를 위해 들려주는 거죠.” 그래서 김씨는 아주 가까운 곳에 그림책을 둔다. 자신에게나 다른 이들에게나 언제나 그림책이 필요한 순간이 있어서다.
‘백화만발’, 국내 첫 시니어 그림책 3권 펴내
시니어 독서운동 마중물 되길
왼쪽부터 시니어 그림책 ‘백화만발’의 정안나 편집자, 도은숙 편집자, 백화현 기획자, 한기호 발행인.

<엄마와 도자기>, <할머니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