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 자료
젠더 정체성은 ‘과정’… 위반·교란으로 재의미화 버틀러의 설명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자란다’는 보부아르의 유명한 명제를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보부아르의 명제에서 옳은 점은 여성이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지적한 거라고 설명한다. 정체성은 타고나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과정 중에 있고, 이러한 주체 개념은 다양한 위반이나 교란을 가능하게 한다. 걸그룹이 슈트를 입고 남성 댄서가 립스틱을 바르는 것은, 역전된 젠더를 TV에서 공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패러디를 버틀러는 젠더의 가장 큰 특징으로 명명한다. 우리 일상은 일종의 퍼포먼스로 구성돼 있다. 여성은 되는 과정 중에 있는 주체로서, 젠더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의미를 지울 수 있게 된다. 이 근본적 전환을 버틀러는 ‘젠더는 수행(performance)’이라고 명명한다. “목적한 정체성을 스스로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젠더는 언제나 행위이다”. “주어진 젠더가 되어야 한다는 명령은 필연적인 실패, 즉 다양한 비일관적 배치물들을 만들어낸다. (중략) 좋은 엄마 되기, 이성애적으로 바람직한 대상 되기, 적합한 노동자 되기” 등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 당시 국가는 훌륭한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전쟁터에 아들을 내보내라고 명령했다. 전쟁에 나간 아들이 위험에 처한다는 것을 알지만, ‘훌륭한 어머니’는 기꺼이 아들을 군인으로 키우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모순은 젠더 규범의 장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버틀러는 페미니즘이나 퀴어 연구의 주요한 성과는 법적·군사적·정신분석학적 규범을 분석하고, 젠더가 어떻게 규제되고 있는지, 그런 규범이 어떻게 고안됐는지, 그리고 어떻게 주체의 삶에 체화됐는지를 밝히는 작업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버틀러에게 젠더는 법과 같이 규칙으로 설명될 수 있는 규범이 아니다. 젠더는 남성다움과 여자다움을 규범적인 것으로 만들어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이 규범이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만들어내고 역사적으로 유지되는 것이라면, 주어진 규범을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젠더 규범을 해체할 수도 있다. 남성이 여성성을, 여성이 남성성을 수행하는 드래그처럼 말이다. 드래그퀸 혹은 드래그킹의 과장된 여성성과 남성성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일종의 연기이자 행위임을 보여준다. 트랜스젠더 역시 남성 혹은 여성으로 이분화된 정체성을 지속해서 변화시키고, 젠더화된 정체성을 의문시하게 만든다. ‘정상성’이 인간의 반복되는 행위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는 곧 다른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정상성’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남녀 이분법으론 여성 억압 해결 못해”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젠더 규범을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걸까. 버틀러는 “나는 성적 관행의 형식이 특정한 젠더를 생산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규범적 이성애의 조건하에서 젠더를 통제하는 것이 때로 이성애를 안정되게 만드는 한 방법으로 활용된다고 주장하려는 것뿐이다”라는 말로 이 질문에 답한다. 섹스와 젠더,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을 ‘자연스러운 질서’로 삼는 것은, 젠더 규범을 통제함으로써 이성애 질서를 굳건히 하는 것이다. 여성이라는 범주를 단단히 고정된 것으로 상상할수록 젠더 이분법은 강화되고, 그 짝패로서 남성 범주가 강력해진다. 성차에 대한 페미니즘적 접근이 여성성을 이론화하려 할 때 범하는 오류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의 경계가 확실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버틀러는 이 구분이 이성애 중심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된다고 설명한다. 젠더 이분법이 없다면, 동성애는 억압될 필요가 없고, 이성애 역시 자연화·정상화될 수 없다. 젠더 이분법은 이성애 중심주의를 위한 “수고로운 구성물”이다. 버틀러는 여성성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의 경향 역시 그런 점에서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은 해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버틀러의 주장을 두고 ‘여자 없는 페미니즘’이라고 비판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버틀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이 유지되는 한, 여성 억압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이분법을 해체하고, 젠더를 일종의 가면이자 패러디로서 인지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성별에서 자유로운 주체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허윤 문학연구자·부경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