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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죽은 돈을 살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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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3-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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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정의 휴먼포엠

발기발기 찢어져도 귀신같이 짜맞춰내는 손,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노경희씨의 따뜻한 ‘신기’

사진/ 여상에서 날리던 인재들이 창구업무를 담당한 시절. 노경희씨는 한국은행 전국 '산찰대회'에서 2등한 경력도 있다. (박승화 기자)
“한국은행? 가만 그게 어디지? 아, 경대병원 옆인가? 경대병원이라 해야 빨리 알아듣지요.” 동대구역에서 만난 택시기사는 한국은행 가자는 손님은 처음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사실 나도 그랬다. 평생 살면서 내가 한국은행 갈 일이 어디 있을까. 지갑에서 돈 꺼낼 때 흘낏 보는 ‘한국은행’이라는 글자만으로 충분한 인연이라 여겼다. 그런데 노경희씨(42)가 그 엄청난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을 내 발로 찾아가게 만들었다.

“한국은행 대구경북 본부에서 장애인이 찢은 돈을 직원들이 합심, 사흘 동안 퍼즐 맞추기로 돈을 완성해 교환해 주었다”는 한겨레 대구발 기사 때문이었다. 화폐교환 창구 담당자가 바로 노경희씨. 한국은행의 이미지를 따스하고 서민적으로 만들어준 장본인이다.


아, 산처럼 쌓여있는 돈더미!

“오늘은 비가 와서 손님들이 많이 없는 편”이라며 반갑게 맞이한다. 한국은행에 입행한 지 23년 2개월. 현재 발권과 소속이다. 그는 못 쓰게 된 돈을 쓸 수 있는 돈으로 바꿔준다. 찢어진 돈, 불에 탄 돈, 녹슨 돈도 그의 손을 거치면 빳빳한 신권, 반짝거리는 새 동전이 된다.

그런데 ‘뱅크 오브 코리아’의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난 그만 주눅이 들고 말았다. 국가적 보안시설 출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패스카드가 필요한 유리문을 통과해야 했다. 지문 인식, 음성 인식, 눈동자 인식 같은 보안코드가 떠올랐다. 혹시 내 자전거 열쇠 때문에 빨간 불이 켜지며 부저 소리가 나지 않을까? 그런데 더욱 심각한 지경은 사무실 안에 들어가고 난 뒤였다.

돈이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돈 다발도 아니고 돈 뭉치도 아니고, 돈더미라니!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입이 저절로 벌어지면서 두눈이 휘둥그레진다. “와, 저게 전부 진짜 돈인가요?” 라는 왕초보적인 질문이 그냥 나와버렸다. 그런데 직원들은 할인마트에서 라면박스를 나르듯 무덤덤하게 돈더미 수레를 밀어 옮기고 있었다.

한국은행에 입행하면 “황금 보기를 돌 보듯이 하라”는 최영 장군식 극기훈련을 평소 하시나 보죠? 내가 돈에 넋을 잃은 사이 노경희씨는 창구에 손님을 맞으러 가고 없었다. 발권과 하대성 과장이 대답했다. “특별히 그런 훈련하지 않지만 저희로서는 늘 그런 마음자세가 되어 있지요. 우리는 돈이라고 하지 않고 미발행 화폐라고 합니다.” 미발행 화폐? 그러면 어떤 것을 ‘돈’이라고 하나요? “하하...우리 통장으로 들어오는 월급을 돈이라고 하지요.”

그런데요. 저, 저 정도면 돈이 얼마나 되나요? 여전히 내 눈앞에 왔다갔다하는 돈더미를 실은 수레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물었다. 아마 몇백억 또는 몇천억이라고 한 것 같지만 내게는 별 차이가 없었다. 어차피 나의 속셈능력을 넘어서는 단위였다. 대신 머릿속에는 그 동안 보아온 각종 갱영화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최근에 본 금고털이 영화 <오션스 일레븐>도 떠오른다. 앞으로는 ‘좋은 영화’를 골라봐야겠다.

“1억이 11kg이거든요. 보통 사람들 들고 가라고 해도 많이 못 들고 갈 겁니다.” 그 사이 자리를 함께 한 김용문 과장이 내게 설명해주었다. 김 과장은 반갑게도 <한겨레21> 독자였다. 나는 내 가방을 슬쩍 보았다. 작기도 하네. 하필 오늘 같은 날. 혹시라도 내가 ‘본의 아니게’ 돈더미 쪽으로 걸어가지 않도록 다리에 힘을 한껏 주었다.

“저희가 무덤덤하게 보일지 모르시겠지만, 사실 지금도 굉장히 신경쓰는 중입니다. 그리고 돈이 움직일 때는 언제나 2인이 동행해서 함께 가게 되어 있지요.”

그때 노경희씨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저희 직원들은 여기 들어올 때는 개인 핸드백이나 지갑 같은 것을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가방을 가능하면 돈더미에서 멀리 놓았다. 1만원 한 장이라도 ‘비는’ 일이 생기면 나도 조사대상일지 모르지 않은가.

인상만 봐도 사연을 안다

사진/ 노경희씨와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의 동료들. 1억원이 11kg이라거나 돈을 종이가 아닌 면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박승화 기자)
금방 오신 손님은 어떤 헌 돈을 갖고 오셨나요? “할아버지께서 용돈을 장판 바닥 밑에 보관해두셨나 봐요. 습기 때문에 돈이 떡처럼 서로 붙어 있어서 못 쓰게 돼버린 거지요. 전부 38만원 바꿔 가셨어요.” 평소 은행창구에 오는 사람의 사연들이 각양각색이겠네요? “그럼요. 개가 물어 뜯어먹는 것을 간신히 빼앗아온 것도 있고, 그건 액수의 반밖에 못 건졌어요. 지폐가 남은 게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 개는 무사했을까라는 부적절한 의문이 얼핏 들었다.

화폐교환에는 원칙이 있다. 전체 지폐의 5분의 2가 남았으면 금액의 절반. 4분의 3이 남았으면 전액. 불에 몽땅 탔더라도 재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역시 교환 가능. 실수로 세탁기에 빨았을 경우에도 (물론 이것을 ‘돈세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걱정없다. 원래 돈은 면으로 만든 것이다. 탈색이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불에 탄 돈을 바꾸러 오는 경우가 가장 많아요. 아이들이 장난으로 그런 경우도 있고, 또 어떤 분은 전자레인지 돌리다가 태우기도 하고요. 비상금을 감춰두었다가 잊은 거지요. 돌아가신 분 옷 태우다가 발견해서 갖고 오는 경우도 있어요.” 게다가 부부싸움 중에 돈을 찢어서 들고 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꼭 부부가 같이 와요. 그러고는 한장이라도 더 맞춰보려고 얼마나 열심인지 몰라요.” 싸움하다가 돈 찢으면 벌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하, 저희는 규정에 의해서 그런 돈이 들어오면 교환해드릴 뿐이지요.”

이 자리에 앉은 지 거의 3년이 다 되어간다는 노경희씨는 자신이 거의 관상가 수준이라고 자평한다. “창구에 오시는 분들 인상만 봐도 대충 어떤 사연의 돈이겠구나 싶어요. 지난 번 그분은 사정이 아주 딱해보이셨어요. 아예 체념하신 듯했어요. 시중은행에서 모두 문전박대를 당하신 뒤라서 그랬는지 제가 한번 보자고 했더니 얼마나 반가워하시던지….”

자신도 신체장애인인 남편이 공공근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정신장애인 부인이 돈을 한장씩 한장씩 발기발기 찢어놓았단다. 그 장애노인은 “여기서는 보자고 하네, 보자고 하네”라고 연신 중얼거리며 자루를 창구 안으로 내밀었다고 한다.

“바닥 가득이었지요. 처음엔 엄두가 안 났어요. 첫날은 하나도 못 맞추고, 이튿날은 일곱 장 맞췄지요.” 노경희씨가 그 돈들을 보여주면서 말을 계속했다. 새끼손톱 크기로 찢어진 돈들의 모자이크 조각 같았다. “다행히 돈을 오래 만지다 보니 세종대왕님의 귓볼만 봐도 좌우 앞뒤를 금방 알아보거든요.” 동료들도 모두 손을 모아주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머리에 쥐가 날 정도’의 퍼즐게임을 완성, 그 부부에게 큰돈을 되돌려줄 수 있었다. 모두 73만 5천원. “여간 고마워하지 않으셨지요. 저희야 당연히 할 일이지만. 그래도 왠지 슬퍼 보인 모습이 아직도 가슴이 아프네요.”

돈 주인의 마음까지 쓰다듬어준다

지금은 돈 세는 기계가 있고 컴퓨터가 은행업무 대부분을 담당하지만 옛날에는 여상에서 날리는 인재들이 창구업무를 담당했다. 노경희씨는 그 시절 한국은행 전국 ‘산찰대회’에서 2등한 경력이 있다. 그가 자신의 솜씨를 한껏 뽐냈다.

“대회 때는 만원권을 3백장 한꺼번에 펴야 해요.” 그는 만원 다발을 금방 부챗살로 펴보였다. 그리고 재빨리 ‘귀신같이’ 정확하게 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일과는 다른 업무인 지금의 일은 “참을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얼마 전에 구두쇠로 유명한 어느 노인 분이 돌아가셨는데 평생 동전으로만 돈을 열 몇 가마니 모으셨대요. 아들이 한가마니를 들고 왔어요. 500원에서 10원짜리 동전이 산더미였지요. 하루 종일 걸려 셌어요. 200만원쯤 되더군요. 이 일은 생색내기가 아니에요. 업무를 배운다는 그런 성취감을 느끼기도 어렵고….”

그 전에는 세 명이 하던 일을 외환위기 이후 혼자서 하니 잠시라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사실 힘들고 짜증날 때도 있지만요, 보람 있어요. 가난하고 어려운 분들은 특히 너무 고마워하세요. 우는 분도 계시구요. 인사를 꾸벅꾸벅 하시며 가는 분들을 보면 그냥 마음이 좋지요. ”

쓸 수 있게 된 돈을 가슴에 안고 가던 사람들 중에는 다시 발길을 돌려 껌 한통이나 삶은 고구마를 창구에 내밀고 가는 이도 있다. 빈한한 사람들의 전부일 수도 있는 ‘헌 돈’. 노경희 씨는 자신의 창구를 통해 헌 돈을 새 돈으로 바꾸어주는 일만 하는 게 아닌 듯하다. 세상살이의 온갖 사연을 담은 돈, 저 넓은 저잣거리를 다 돌고 가장 험하고 지친 모습으로 귀환한 돈을 만지면서 그 돈을 따라온 사람들의 마음도 쓰다듬어주는 것이다. 돈을 세는 그의 정확한 손길이 그래서 따뜻해보이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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