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규슈제국대학 재학 당시의 김대우. 임경석 제공
그중 서북학생친목회는 주목할 만하다. 김대우가 학생단 지도부 일원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매개체다. 이 단체는 함경남북도·평안남북도·황해도 서북 5개도 출신 경성 유학생들의 친목회였다. 김대우는 평안남도 강동군 출신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나, 1913년 중등학교 진학을 위해 경성에 오기 전까지 자랐다. 김대우는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공전에서 수학하기까지 6년간 경성에서 낯선 객지 생활을 했다. 그동안 자신과 비슷한 말씨와 생활 관습을 가진 친목회 학생들에게서 편의와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서북학생친목회에는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학생들이 즐비했다. 학생단 최초 회합인 대관원 모임 참석자 10명 가운데 서북 출신이 8명이나 되었다. 그중에는 한위건(함남 홍원), 강기덕(함남 덕원), 김원벽(황해 안악) 등 학생단을 이끈 3인 지도자를 비롯해, 모교인 경성공전의 1년 선배 주종의(함남 함흥)도 있었다. 김대우는 용모가 단정하고 키가 컸다. 180cm에 가까워 풍채가 당당했다. 잘생겼을 뿐 아니라 말도 잘했다. 관찰자 의견에 따르면, “회의 같은 데서 말할 때이든가 또는 집회의 의사 진행 같은 것을 할 때에 보면, 명민한 두뇌와 그 달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논리가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이런 재능과 활달한 성격이 그가 경성공전 대표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독립 가망이 없으므로 독립 희망하지 않는다” 김대우는 경찰에게 체포된 직후에도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 야마자와 사이치로 검사와 주고받은 3월13일치 신문 기록을 보면, 김대우가 어떤 진술 전략을 구사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는 혐의 사실을 시인했다. 시위에 참여한 것과 경성공전 대표임을 인정했다.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공감해 경성에서도 ‘소요’를 일으키기로 사전에 협의했노라고 시인했다. 설사 유죄판결을 받을지언정 조선 독립을 요구한 행위는 정당하다는 생각을 계속 견지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가담 시점과 인지 범위는 되도록 줄이려 노력했다. 자신의 혐의 내용을 가볍게 할 수 있고 동료들의 행위에 관한 발언 범위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호리 나오키 총독부 예심판사의 4월9일치 신문조서에서 진술 기조가 바뀌었다. 모든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경성공전 학생 대표자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고, 사전에 동료 학생들과 시위를 모의하지도 않았으며, 경성공전 학생들을 시위 현장에 동원한 것도 부인했다. 3월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작한 시위에 우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 외에는 검사 신문조서 내용을 온통 뒤집었다. 조선 독립을 희망하냐는 예심판사의 질의에는 “독립이 될 가망이 없으므로 지금은 독립을 희망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궁금하다. 도대체 김대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의 급격한 심경 변화는 왜 일어났고, 진술 기조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진술 번복의 의미는 자기 신념을 버리고 그에 배치되는 이념을 받아들인 점에 있었다. 1930년대 후반 유행한 사회현상에 빗대어 말하면 일종의 사상전향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마 수감 중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단순 시위 가담자조차 날마다 밤새 계속되는 구타와 고문에 실신했다. 김대우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수감자들처럼 좁고 불결한 시설에 갇혀 옆 사람과 살을 맞대고 다리도 뻗지 못한 채 쪼그린 자세로 날밤을 지새우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방법만 있다면 이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 그뿐인가. 미래에 대한 불안도 그를 압박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보기 드물게 공학 분야 전문교육을 이수한 그에게 안락한 직업과 세속적 출세가 보장된 터였다. 그 가능성을 송두리째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심경이 변화한 결정적 계기는 가족이었다. 뒷날 전향 정책이 본격화되던 1933년 즈음 경성형무소 수감자 사상전향 동기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부모나 기타 친족에 대한 정서적 반성’이 38%였다. 참사가 된 대지주 아버지 김대우의 아버지 김상준이 사상전향의 촉매가 됐다. 김상준은 강동군의 손꼽히는 큰 부자였다. 소유 농지 규모가 150정보(1정보는 약 9917.4㎡)를 헤아리는 천석꾼이었다. 김상준에게서 땅을 빌려 경작하는 소작인만도 80여 명이나 됐다. 단지 부유할 뿐만이 아니었다. 식민지 통치기구에도 다방면으로 연결된 관변 유력자였다. 일본의 한국 병합 직후인 1911년 군 참사(參事)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때, 김상준은 강동군 초대 참사로 임명됐다. ‘참사’란 관내에 거주하는 ‘학식과 명망이 있는 자’로서 도장관(도지사)이 임명하는 명예직 지방관이었다. 군수의 자문에 응하며, 수당을 받았다. 지방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인 유력자 상층부를 포섭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제도였다. 김상준은 일본인 관료들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기민하게 역량을 발휘했다. 군내 각지를 찾아다니며 민심 안정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부했다. “이번의 지방 소요에 있어서는 본인은 몸소 향당을 설복하여 민중의 향방을 밝혀 경거망동의 억제에 전력을 경주”했노라고. 그 결과 강동군에는 시위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노라고 주장했다. “사방 인근에서는 다 소요자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본군에서만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과장된 주장이었다. 3월5일 강동군 만달면 승호리 시위, 3월7일 고읍면 시위, 같은 날 원탄면 송오리 시위가 일어났다. 다만 주위 여러 지역에 비해 시위 규모도 작고, 시위 횟수가 적었다. 김상준의 관변 네트워크는 그에 머물지 않았다. 총독부가 출자한 각종 공공기관에도 임원으로 진출했다. 강동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강동군 지주회 부회장, 강동군 금융조합 조합장, 강동군 잠사업조합 부조합장 등이 그가 겸하던 직책이었다.

김대우의 아버지 김상준이 상신한 탄원서(위).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식에서 우등졸업장을 받은 학생들. 맨 오른쪽이 김대우. 1921년 3월. 임경석 제공









